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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ㅣ 삶창시선 39
함순례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12월
평점 :
시를 말하는 시 55
시와 눈물밥
― 혹시나
함순례 글
삶창 펴냄, 2013.12.6.
오월이 무르익습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 한 그루는 어느새 복숭아알을 몇 맺습니다. 아직 조그마한 알입니다. 지난해에 심은 자그마한 나무인데 올해에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습니다. 씩씩한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면서 대견하구나 싶고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아이들을 불러 복숭아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복숭아알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라고 얘기합니다.
뒤꼍에서 자라는 감나무와 탱자나무에 하늘타리 넝쿨이 꽤 올라옵니다. 어느새 또 올라왔느냐 싶어 가시에 찔리면서 두둑두둑 뜯습니다. 너희가 나무 말고 돌울타리를 타고 자라면 그대로 두는데, 왜 나무를 타고 자라니. 너희가 나무를 타고 자라니 나뭇가지가 아프고 힘들어 하는구나. 너희한테 안 된 일이지만, 다른 데에서 자라면 어떻겠니.
하늘타리잎은 쌈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늘타리 열매는 여러 곳에서 약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늘타리뿌리도 무엇엔가 쓰지 싶습니다. 해마다 하늘타리는 이 나무 저 나무를 감돌고 자랍니다. 이레쯤 눈여겨보지 않으면 어느새 나무마다 친친 감습니다. 등나무나 칡처럼 넝쿨이 빠르게 뻗습니다.
..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 (담양)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되면, 하늘타리잎은 모두 마릅니다. 잎이 모두 떨어집니다. 이러면서 하늘타리 넝쿨줄기도 죽는가 하고 생각하는데, 이듬해 봄에 보면, 말랐다 싶은 넝쿨줄기에서 새롭게 잎이 돋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지만 죽은 넝쿨줄기가 아니에요. 말랐거니 하고 나무에 얽힌 넝쿨을 그대로 두면 더 굵고 단단하게 나무를 감싸고 오릅니다.
넝쿨도 넝쿨대로 자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틀림없이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 감나무도 감싸고 뽕나무도 모과나무도 매화나무도 감싸면서 오르리라 생각해요.
무엇일까요. 넝쿨줄기는 왜 온갖 나무마다 감싸면서 오르려 할까요.
숲에서도 넝쿨줄기가 이처럼 뻗을까요.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한테 몸을 모조리 빼앗깁니다.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가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저마다 어떤 삶이거나 숨결일까 궁금합니다.
.. 나무에 깃들어 붉은 열매 쪼아 먹고 / 이파리를 갉아 먹던 / 벌레들의 생애가 한순간에 지나간 것이다 / 누군가는 까치발 세워 그 자릴 건너가고 / 누군가는 아예 멀리 돌아가고 / 몇몇은 성큼성큼 밟고 간다 .. (검은무당벌레)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있는 놀이터에 마실을 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서서 자전거를 세우기 무섭게, 두 아이는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토요일 낮, 초등학교 운동장은 조용합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백 남짓 되는데, 아무도 토요일 낮에 이곳에서 놀지 않습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라 하더라도 꽤 먼 데서 노란버스를 타고 다니는 아이가 많습니다. 면소재지 어린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집에서 인터넷게임을 할는지 모르고, 이냥저냥 마당에서 놀거나 텔레비전을 볼는지 모릅니다. 시골에 살면서 바다나 숲이나 들로 나들이를 가는 어린이는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어버이 일손을 거들면서 바닷일이나 들일을 하는 어린이 또한 거의 없습니다.
.. 하루쯤 학원 좀 쉬자 하더니 / 내가 잠시 조는 틈에 사라진 아들 녀석 / 얼굴 뿔그족족 술 냄새 확 풍기며 돌아왔다 .. (술국)
아이들은 배부르면 사이좋게 잘 놉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난 뒤 개운한 몸으로 상냥하게 잘 놉니다. 아이들은 배고플 적에 곧잘 툭탁거립니다. 아이들은 졸음이 몰려들면 떼를 쓰거나 투정을 부립니다.
어른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어른은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마나요. 어른은 주머니가 후줄근하기에 웃음기 없이 차가운 낯빛으로 살아가나요. 어른은 언제나 고단하기에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서 손전화 기계나 텔레비전을 멍하니 들여다보면서 하루를 보내는가요.
.. 서울 모퉁이에 / 집 한 채 들였습니다 / 웃풍 심한 살림에도 찡그림 없던 / 시누이 / 저리 펄펄 납니다 .. (첫눈)
함순례 님 시집 《혹시나》(삶창,2013)를 읽습니다. 눈물밥을 먹으면서 지낸 이야기를 싯말로 읽습니다. 눈물밥과 함께 곧잘 누리던 웃음밥 이야기를 싯말로 읽습니다. 삶에는 눈물밥도 있고 웃음밥도 있구나 싶습니다. 눈물밥만 있는 삶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웃음밥만 있는 삶도 없을까요. 웃음밥만 짓는 삶은 참말 없을까요. 노래밥을 짓고, 춤밥을 지으며, 이야기밥을 짓는 삶은 어디에 있을까요. 꿈밥과 사랑밥을 짓는 삶은 누가 어디에서 지을 수 있는가요.
.. 사대강 사업으로 뒤틀린 금강 자락 / 차고 높은 나포길에서 / 우린 사이좋게 / 장딴지에 힘주고 칼바람을 밀고 나갔다 .. (금강하구언, 차고 높은)
햇볕이 누그러지는 때부터 개구리가 논마다 울어댑니다. 햇볕이 기울 즈음 개구리 노래는 한껏 솟습니다. 달이 뜨고 별이 돋을 무렵 개구리는 그예 노래잔치입니다. 시골마을에 마지막 군내버스가 끊기는 여덟 시 반 언저리에는 온통 왁왁 소리로 가득합니다. 멧골에서 노래하는 멧새 노래는 개구리 노래에 잠깁니다.
아이들을 재웁니다. 모기 한 마리가 내 뒷통수로 윙 나는 소리가 들려 잽싸게 손바닥을 찰싹 맞부딪습니다. 모기가 살짝 걸렸으나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는 방은 문을 가만히 닫고 불을 켭니다. 내 손바닥에 살짝 스친 모기가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재빨리 왼손바닥으로 모기를 철썩 내리칩니다. 모기 주검은 내 손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습니다. 부엌으로 가서 손바닥을 씻습니다. 작은아이가 낮에 먹다가 남긴 밥그릇을 봅니다. 아이들이 저녁에 남긴 밥은 내가 치워야지요.
깔깔대고 놀다가 서로 툭탁거리기도 하던 아이들은 새근새근 가늘게 숨소리를 내며 잡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두 아이 사이에 가만히 누워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작은아이가 노랫소리를 듣고 살짝 깹니다. 그대로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코코 자고 아침에 다시 즐겁게 일어나서 웃음꽃을 피우렴. 새 하루에 새로운 웃음으로 이야기보따리를 꾸리렴. 4347.5.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