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198
이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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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70



내 속에 숨은 노래

―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이하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2.6.



  봄이 되어 시골은 부산합니다. 집집마다 경운기를 몰고 논과 밭으로 갑니다. 기계를 써서 땅을 갑니다. 논둑과 밭둑을 태우고 트랙터가 움직입니다. 풀을 베는 칼날이 윙윙거리고, 풀을 잡는 농약을 쏴아 뿌립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으면 제비가 깨어납니다. 처마 밑은 새벽부터 복닥복닥 시끌시끌합니다. 제비는 알을 낳기 앞서 보금자리를 손질합니다. 진흙을 물어 날라서 붙이고 지푸라기를 바닥에 깝니다. 제비가 새로 집을 짓거나 옛 집을 고치는 모습을 볼라치면, 예부터 우리들도 이렇게 흙과 짚으로 집을 지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입니다.



.. 두 남자는 위장 크림 민얼굴에 덧칠한다 / 폐도 위로 카메라 레일이 깔리고 / 석탄 운반차 대신 이동차가 지난다 / 왜 따라오셨어요, 환갑 앞둔 아버지는 / 묵묵부답 허리 굽혀 짚신을 묶는다 ..  (화장하는 父子, 엑스트라 4)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사람이 살았고, 새 또한 흙을 물어다가 처마 밑에 집을 지어 살았습니다. 흙에서 돋은 풀에는 풀벌레가 대롱대롱 매달리며 풀노래를 부릅니다.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에서 돋은 새 잎사귀는 나비 애벌레가 갉아먹으면서 자랍니다. 개구리는 풀밭에서 노래하다가 봄비가 내리고 난 뒤에는 둠벙과 논을 찾아갑니다. 시원한 물에 몸을 적십니다. 저마다 왁왁거리며 봄을 기뻐합니다.


  사람이 먹는 모든 밥은 흙에서 비롯합니다. 쌀도 보리도 밀도 수수도 흙에서 태어납니다. 흙으로 이룬 논과 밭에 심거나 뿌린 씨앗이 자랄 때에 곡식이 됩니다. 사람이 먹는 열매도 흙에서 비롯합니다. 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는 뿌리가 흙에서 받아들인 기운으로 익어요.


  시골에서 짓는 농사란 흙을 가꾸는 일입니다. 흙을 가꿀 때에 밥을 얻습니다. 흙을 살찌우고 살릴 때에 밥이 싱그럽습니다. 흙을 아끼고 사랑할 적에 맛나며 좋은 밥을 누립니다.



.. 전기가 나가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  (정전)



  매화나무에 꽃이 떨어진 뒤 열매가 익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구슬 같던 푸른 알이 날마다 굵어집니다. 매화일이 됩니다. 탱자나무에 꽃이 떨어진 뒤 열매가 익습니다. 탱자꽃이 지고 나서 맺는 탱자알도 구슬 같습니다. 푸른 빛깔이 싱그러운 구슬입니다. 감알도 발갛게 익기 앞서는 푸른 빛깔입니다. 풋감도 동글동글 예쁘장합니다. 고추도 빨갛게 익기 앞서 푸른 고추입니다. 까마중도 까맣게 익기 앞서 푸른 열매예요.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데, 생각해 보면, 어린이와 어른 사이를 푸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푸르고 몸이 푸르기에 푸름이일 테고, 마음과 몸이 한껏 무르익기 앞서 싱그럽게 빛나기에 푸름이로구나 싶습니다.



.. 주식으로 퇴직금까지 날린 큰아버지가 / 수년 만에 / 고조할아버지 제사에 돌아온 설에 / 아버지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묏자리 얘기를 꺼낸다 ..  (묏자리)



  이하 님이 일군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실천문학사,2012)을 읽습니다. 이하 님은 이녁 마음속에 숨어 사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꿈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노래를 이야기하고 춤을 이야기합니다.


  홀로 떠돌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와 이녁 사이에 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조용히 생각에 잠기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맞닥뜨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시에 담는 넋은 무엇일까요. 시로 나누는 삶은 어떤 무늬가 될까요.



.. 이 도시엔 언제부턴가 커다란 공동묘지가 들어섰다 // 사람들은 아침마다 정장을 차려입은 채 그 회벽으로 걸어 들어갔고 / 저녁이면 죽음의 그림자를 하나씩 메고 나왔다 ..  (0호선)



  바람이 붑니다.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립니다. 햇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은 내 얼굴과 살갗을 태웁니다. 바람은 햇볕에 그을리는 내 얼굴과 살갗을 시원하게 어루만집니다. 햇볕은 이불을 보송보송 말리고, 씨앗과 새눈을 틔웁니다.


  아침부터 신나게 뛰놀던 작은아이가 꾸벅꾸벅 좁니다. 작은아이를 무릎에 앉힙니다. 어느새 눈을 지긋이 감고는 까무룩 잠듭니다. 아이를 살며시 눕힙니다. 오월바람은 작은아이 얼굴을 가볍게 스치면서 마당을 감돕니다.


  큰아이도 졸린 얼굴입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좀처럼 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더 버티고 싶을까요. 더 놀고 싶을까요. 큰아이는 졸린데 더 버티면서 놀려 하다가 으레 코피를 쏟습니다. 코피를 쏟으면서도 더 개구지게 뛰놀려 합니다.



.. 회화나무展은 건물 안이 아닌, 바깥도 아닌 / 길의 복판에서 한겨울에만 열린다 /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 / 대부분의 생을 길에서 보낸 사람은 / 티켓 없이도 볼 수 있으리라 ..  (회화나무展, 정동 일기 3)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은 이하 님이 이제껏 걸어온 길을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즐겁게 살던 웃음과 고단히 살던 눈물을 보여줍니다. 애틋하게 누리던 사랑과 안타까이 보낸 하루를 보여줍니다.


  시 한 줄로 말문을 엽니다. 시 한 줄로 어버이 넋을 헤아립니다. 시 한 줄로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젖습니다. 시 한 줄로 동무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시가 있어 새롭게 기운을 내는 삶인지 모릅니다. 시가 있어 다시금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삶일 수 있습니다. 시가 있어 오늘도 어제와 같이 활짝 웃으면서 어깨동무하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 거즈에 물 묻혀 깨어난 아버지에게 건넨다 / 패혈증 올 때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 17년 전 넌 어떻게 참았니 / 가족들 걱정할까 맹장 터져 복막 찢겼던 아들과 / 자식들 애먹을까 복막염도 참다 피가 거꾸로 흐른 아비가 국립의료원 병실에 앉아 할 말을 고른다 ..  (유전)



  해가 질 무렵 제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암수 제비 두 마리는 서로 엉키듯이 날갯짓을 하고는 처마 밑으로 깃듭니다. 아직 손질을 마치지 않은 조그마한 둥지이지만, 암수 제비 두 마리한테는 더없이 포근한 쉼터이자 삶터입니다. 작은 둥지에서 제비 두 마리가 노래하고, 작은 둥지에서 어린 제비 여러 마리가 태어납니다. 작은 둥지에서 새로운 사랑이 퍼지고, 작은 둥지에서 날마다 웃음이 흐릅니다. 살아가는 기쁨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은 늘 우리 둘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347.5.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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