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어떤 소리를 듣는가
사월에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이니 마땅히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개구리는 삼월부터 깨어나는데, 삼월에는 드문드문 개구리 소리를 듣고, 사월이 되면서 비로소 소리가 늘며, 사월 끝무렵에는 소리잔치가 이루어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구리 소리입니다.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아침부터 한낮 사이에는 개구리 소리가 살짝 잦아듭니다. 해가 기우는 저녁부터 개구리 소리는 커다란 소리물결이 됩니다.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기에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분들은 사월에 개구리 소리를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오월이 되거나 유월이 되어도 도시에서는 개구리 소리는커녕 개구리 뒷다리조차 구경을 못할 수 있어요.
톰 새디악 님이 쓴 《두려움과의 대화》(샨티,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톰 새디악 님은 미국에서 돈과 이름을 무척 크게 거머쥔 영화감독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돈도 이름도 내려놓으면서 새로운 두 가지를 어루만지려고 한다고 해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전용헬기까지 타고 다니던 영화감독이 돈과 이름을 살포시 내려놓고는 다른 길을 걷도록 할까요?
톰 새디악 님은 이녁이 쓴 책에서 “역사상 인간이 오늘날처럼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던 시대는 없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그 즉시 우리 컴퓨터의 스크린이나 텔레비전 수상기, 심지어 휴대폰에까지 전 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에 딸려온 메시지들은 우리가 주목해 주기를 간청하고 … 가짜로 살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저자가 될 수 없다(55∼5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분이 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아주 마땅한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신문이고 방송이고 인터넷이고 온통 그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일어나고 먹고 자고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지내는데, 어느 일 하나가 터지면 이 모두를 까맣게 잊고 ‘커다란 일’ 하나에만 매달려야 하는 듯이 내모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사월에 개구리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아무리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전쟁이 터지건 불이 나건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삼월부터 풀이 돋고 꽃이 피듯이, 사월에는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먹을 곡식과 열매를 얻고자 씨앗을 심습니다. 슬플 때에는 슬피 울면서 씨앗을 심어요. 기쁠 때에는 기쁘게 웃으면서 씨앗을 심어요. 사월에 손을 놓지 못합니다. 오월에도 손을 놓지 못합니다. 오월에는 오월대로 우리를 기다리는 들빛이 있습니다. 유월에는 유월대로 우리 손길을 바라는 들바람이 있습니다. 칠월에는 칠월대로 우리 손품을 누리고 싶은 들내음이 있어요.
그런데, 사월 어느 날,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았어요. 배가 가라앉으면서 선장과 승무원 여럿이 몰래 빠져나왔어요. 배에 탄 수백 아이와 어른을 그대로 둔 채 선장과 승무원 여럿은 제 몸만 건사했어요. 바닷속에 잠긴 수많은 사람들 주검은 아직 건지지 못해요. 바닷속에서 슬픈 소리가 울려요. 배가 가라앉으면서 배에 탄 사람들 슬픈 소리가 퍼져요. 그렇지만, 이 슬픈 소리에 귀를 닫은 어른들이 많아요.
톰 새디악 님은 “성장의 신은 행복, 삶의 질, 만족, 성취감, 삶의 의미 혹은 목적 지수 같은 것은 측정하지 않고 단지 하나 ‘수익’만 측정하고 따진다. 수익이 높으면 경제는 잘 굴러가는 것이고, 수익이 낮으면 배가 침몰중이니 바로잡아야 한다. 수익이란 물론 돈을 뜻한다 … 삶이라는 더 큰 장부에서 보면 화학물질에 노출돼 더 이상 곡식을 수확할 수 없는 땅과 진폐증으로 가장을 잃은 가족이 곧 고통스러운 진짜 손실로 기록된다(132, 1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바닷속에 가라앉아 목숨을 잃는 사람이 이백을 넘고 삼백에 이르려 합니다. 너무 끔찍합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목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끔찍합니다. 왜 이 목숨은 바닷속에 잠겨야 할까요. 왜 이 목숨은 안타깝고 애틋하게 떠나야 할까요.
이백 사람이 죽기에 스무 사람이 죽을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스무 사람이 죽기에 두 사람이 죽을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죽기에 두 사람이 다칠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죽어도 슬프고 다쳐도 슬픕니다. 삶과 죽음은 숫자로 따질 수 없습니다. 수백 사람이 죽기 앞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적부터 제대로 살폈어야 할 일입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 앞서 처음부터 올바로 살폈어야 할 일입니다.
배가 왜 가라앉았을까요? 돈 때문입니다. 배가 가라앉은 뒤에도 터무니없는 일이 왜 곳곳에서 불거질까요? 돈 때문입니다. 밑뿌리를 살피면 모두 돈 때문입니다. 어른들 스스로 이 사회를 돈으로 굴러가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돈에 미친 사회’에 내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바닷속에 잠겨 죽고 맙니다. 그리고, 바닷속에 아니더라도 입시지옥에서 죽습니다. 해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입시지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백 수천 아이들 이야기는 신문에도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뜨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아이들도 아주 많은데, 이 아이들 이야기 또한 언론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가라앉은 배에서 죽은 아이보다 입시지옥 때문에 괴로운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가 훨씬 많습니다.
‘더 많은 아이가 죽었’으니 그 일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도 많은 아이가 사고로 죽고 입시지옥 때문에 죽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돈바라기’입니다. 돈이 아니면 안 되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대통령이 ‘재난관리국’을 만들라느니 더 힘을 실으라느니 한다고 해서 아이가 안 죽을 일이 없습니다. 괜스런 공무원이 더 늘어나고 공문서만 더 생길 테지요. 사회를 고치고 교육을 뜯어고치며 문화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입시지옥으로 치닫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꾸는 배움터가 되어야 합니다. 돈으로 계급과 신분을 가르는 사회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품앗이와 두레로 즐거운 마을살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두려움과의 대화》라는 책을 쓴 갑부 영화감독이던 톰 새디악 님은 돈과 이름을 내려놓고 ‘사랑’과 ‘꿈’ 두 가지를 찾으려 한다고 밝힙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사랑과 꿈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돈과 이름이 춤추는 사회는 그악스럽습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빛낼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4347.5.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