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75) 존재 175 : 존재하지도 않는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최승자-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1984) 88쪽 〈시인〉
존재하지도 않는
→ 있지도 않는
→ 드러나지도 않는
→ 나타나지도 않는
→ 보이지도 않는
→ 없는
…
말을 빚는 시인입니다. 말을 가꾸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한 마디 두 마디 알뜰살뜰 보듬어 말빛을 밝힙니다. 시인이 쓴 ‘존재’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있다’와 ‘드러나다’와 ‘나타나다’와 ‘보이다’를 모두 나타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말 ‘있다’를 쓰더라도 다른 느낌을 아울러 담아요. ‘보이다’를 쓰거나 ‘드러나다’를 쓸 때에도 다른 느낌을 함께 담습니다.
한자말 ‘존재’를 써야만 깊거나 너르지 않아요. 시인 스스로 ‘있다’라는 낱말을 깊거나 너르게 다룰 수 있습니다. ‘보이다’나 ‘나타나다’라는 낱말을 새롭게 가다듬어 한결 환하게 선보일 수 있어요. 4347.4.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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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뼈를 /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실(實)은’은 “실제로는, 사실대로 말하자면”을 뜻합니다. ‘실제(實際)로’는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를 뜻하고, ‘현실적(現實的)’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는”을 뜻하며,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합니다. 이래저래 살피면 모두 돌림풀이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실은’을 ‘곧’이나 ‘그러니까’나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따지면’이나 ‘정작’이나 ‘참으로는’이나 ‘참말로는’이나 ‘이 땅에는’ 같은 말마디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뼈를”은 ‘-의’를 손질해서 “시간이라는 뼈를”이나 “시간에 있는 뼈를”로 손볼 만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