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25. 올바르게 쓰는 말
― 한국말 살찌우는 세 가지 길
너무 많은 분들이 헷갈리거나 잘못 아는데,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려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대학교에서 어느 학문을 익힌다든지 한국말사전을 외운다든지 하더라도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는 길은 책에도 사전에도 학문에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띄어쓰기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거나 살피는 맞춤법과 표준말과 띄어쓰기는 모두 서양 문법 틀에 맞추어 세웠습니다. 우리 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거나 가르치던 틀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느 누구도 책으로 말을 물려주지 않았어요.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웠습니다. 이 땅 모든 어버이가 말을 가르쳤고, 이 땅 모든 아이들이 집에서 말을 배웠어요.
훈민정음이 태어났어도 한국말 문법이 따로 없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적은 책이 나왔어도 한국말 문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고려나 조선 때에 나온 책은 임금님과 학자가 중국말을 바탕으로 쓰던 책일 뿐입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말로 나온 책은 없습니다.
서양 문명과 학문이 들어오면서 한국말도 문법이라는 틀을 세워야 한다고 깨달은 분이 나타났지만, 정작 한국사람이 예부터 쓰던 한국말 틀을 찬찬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한국말에는 없는 때매김(시제)을 억지로 나누는 바람에 ‘-었었-’을 넣는 글말이 생겼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을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대이름씨인 ‘그女’를 일본책을 옮기면서 잘못 받아들였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나의·너의’를 일본말을 옮기면서 함부로 들였습니다. 사람들은 책(글)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입(삶)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으나, 학자들은 입(삶)이 아닌 책(글)으로 한국말을 다루려 하면서 크게 엇나가거나 뒤틀렸어요. 이 때문에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 배우기가 어렵다는 소리가 불거집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한국말 문법’ 가르치기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국말 문법을 배우면서 머리가 터집니다. 입(삶)으로는 누구나 한국말을 거리낌없이 하지만, 머리(마음)로는 한국말을 어떻게 이처럼 잘 쓰는가를 깨닫지 못해요. 입(삶)으로 늘 쓰는 한국말 얼거리가 어떠한가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어른과 아이 모두 한국말 뼈대와 밑바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김서영 님이 쓴 《아이 스스로 즐기는 책벌레 만들기》(국민출판,2011)라는 책을 읽다가 “한 가지 종류의 책을 읽으려고 하는 아이들”이라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겹말을 쓰면서 못 깨닫습니다. 제대로 썼는지 잘못 썼는지 느끼지 못해요. ‘가지’와 ‘종류(種類)’가 같은 낱말인 줄 못 느낍니다. “한 가지 책”이라고 적든지 “한 갈래 책”이라고 적어야 가장 알맞으며,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한 종류 책”이라고 적어야 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도 글을 읽는 사람도 못 느끼고 말아요. 어릴 적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면 한국말을 제대로 알려주거나 들려주는 이웃이나 동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한국말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참답게 배우지 않습니다. ‘very’와 ‘bery’가 다르듯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지만,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한국말은 늘 푸대접입니다. 학자들이 세운 한국말 문법이 한국말 삶과 어긋난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교과서로 곧이곧대로 외우라 할 뿐이요, 시험문제로 낼 뿐입니다. 어긋난 틀에 맞춘 한국말을 삶이 아닌 학문으로만 다가서기에, 한국말을 다루는 논문과 책조차 한국말이 아닌 서양말이나 일본 한자말로 풀이합니다.
아이들은 한글을 깨치기는 하지만 한국말을 깨치지는 못합니다. 한글을 깨친 뒤 올바른 한국말을 배우지 못하니, 어린 나이부터 제 넋을 슬기롭게 가꾸거나 다스리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아이와 가장 가까운 어버이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배우지 않은 채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교사와 초·중·고등학교 교사 또한 한국말을 참답게 배우지 않으면서 교과서 수업만 합니다. 대학교에서도 한국말로 학문을 바로세우지 못합니다. 회사와 공장에서도 한국말을 아름답게 갈고닦지 않습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영어와 일본 한자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류를 씁니다.
말을 올바르게 쓰자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즐겁게 말하기입니다. 둘째, 곱게 말하기입니다. 셋째, 착하게 말하기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으로 말을 하면 얄궂거나 뒤틀리거나 잘못된 말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마음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말을 하면 얄궂거나 뒤틀리거나 잘못된 말을 찬찬히 거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샘솟는 착한 넋으로 말을 하면 시나브로 밝게 빛나는 이야기가 흐를 수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띄어쓰기가 아닌,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착함 세 가지를 살필 노릇입니다.
언제나 이와 같거든요. 다른 나라와 겨레에서도 이와 같아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물려주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셔요.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즐겁게 말합니다. 아름답게 말합니다. 착하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어버이가 들려주는 즐겁고 아름다우며 착한 말에 젖어드는 삶을 누립니다. 입에서 입으로만 말을 가르치고 물려주면서도 수천 수만 수십만 해를 이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문법으로 말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습니다. 학습이나 교육효과를 헤아리며 말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가장 즐겁게 밥을 먹고 아름답게 웃으면서 착하게 뛰놀기를 바라는 어버이 마음이 고스란히 말삶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먹을 밥 한 끼니를 가장 즐겁고 아름다우며 착하게 일구어 마련하듯이, 아이가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마음으로 삭힐 말이 참삶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애쓰지요.
어려운 말투나 번역 말투나 잘못된 말투가 나타나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즐거움이 없고 아름다움이 없으며 착함이 없을 때 말이 뒤틀려요. 지식(책·글)이 아닌 삶인 말입니다. 학문이나 문법이 아닌 삶인 말입니다. 4347.3.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