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누구나 풀을 먹는다

 


  시골집이 아침부터 시끄럽습니다. 이웃 할배가 아침부터 기계를 들고 풀을 베기 때문입니다. 이웃마을 너머 골짜기에서 찻길을 넓힌다며 숲에 우거진 나무를 잔뜩 베기 때문입니다. 마을 곳곳에서 기계를 써서 풀을 베는 소리가 윙윙 울립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동안 이 시끄러운 소리에 새들이 모두 놀라 어디론지 숨습니다. 새가 숨으니 시골에서 새소리가 끊어집니다.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니, 골짜기에서도 숲짐승과 새가 모두 떠납니다. 숲에서 살던 짐승과 새도 모두 놀라겠지요. 놀랄 뿐 아니라 무섭고 두렵겠지요. 꽤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는 데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톱 소리가 우리 마을로 울려퍼집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어느 누구도 기계로 풀을 베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낫으로 풀을 베었습니다. 게다가 지난날에 풀을 벤 까닭은 소한테 먹이려는 뜻입니다. 또는, 나물로 삼으려고 호미로 캐거나 손으로 꺾거나 뜯었어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은 시골에서는 나물을 먹을 만한 ‘입’이 없습니다. 늙은 어른 두 사람이 나물밥만 먹더라도 도무지 이 많은 풀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늙은 어른 두 사람이 소를 건사하기란 어렵습니다. 소를 써서 논밭을 가는 시골이 거의 없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몸으로 소를 몰 수도 없습니다. 소를 내다 판다 하더라도 한두 마리 키워서는 돈이 안 맞습니다.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디로 가나 시골사람 스스로 풀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시골은 어디에서나 풀을 끔찍하게 여기고 손사래치며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이 쓴 《잡초의 재발견》(우물이 있는 집,2013)이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생물학자가 쓴 이 책은 1950년에 첫 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나오기는 했으나, 나올 적마다 거의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2013년에 새 옷을 입었는데, 요즈음은 얼마나 사랑받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은 “잡초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거나 바람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광물질과 영양분을 저장함으로써 다른 식물들이 그것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토양의 상태를 유지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학자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시골마을 ‘농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여길까요? 학자님은 “돌려짓기 농법에서 잡초는 토양이 경질층을 부수어 농작물 뿌리가 깊은 곳에서 양분을 흡수할 수 있게 한다. 잡초는 토양을 섬유화시켜서 비옥하게 만들며 그렇게 땅속의 동식물엑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흙과 풀을 지켜보고 살핀 끝에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농학을 가르치거나 살피는 교수와 학자는 어떻게 여길까요? 이런 생각을 하거나 이런 말을 들려주는 전문가나 지식인은 있을까요? 농협 일꾼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요? 농약 회사와 비료 회사 일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요즈음 으레 ‘채식’과 ‘육식’을 말합니다만, 오롯한 ‘고기먹기(육식)’란 없습니다. 소이든 돼지이든 풀을 즐겨먹거든요. 닭도 풀과 풀벌레를 즐겨먹어요.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기는 거의 다 ‘풀을 먹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풀짐승이 풀을 못 먹습니다. 풀짐승이 풀이 아닌 사료를 먹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고기 한 점을 장만하거나 밥집에 가서 고기를 시켜서 먹는다 할 적에 ‘풀을 먹고 살던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풀 아닌 사료와 항생제만 먹고 살아온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투성이입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풀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하고 ‘사료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가 맛이 다른 줄 알리라 생각합니다. 풀밭에서 풀이랑 풀벌레를 먹고 자란 닭하고 공장에서 잠을 못 자고 항생제와 사료만 먹고 자란 닭하고 맛이 얼마나 다른데요. 시골집에서 흙을 밟고 뛰놀던 닭 한 마리를 잡으면 어른 너덧 사람이 먹어도 푸짐할 만큼 살점이 나오는데, 맥주집에서 먹는 튀김닭 한 마리는 몇 사람이 어느 만큼 먹을 만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풀을 풀답게 가르치거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업고등학교’가 거의 모두 사라졌습니다. 흙살림을 가르치는 농업고등학교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대학입시에만 매달릴 뿐, 아이들이 스스로 텃밭을 일구도록 도울 생각이 없고, 학교급식도 학교텃밭에서 남새를 얻지 않아요. 도시내기는 도시에서만 살도록 하는 얼개요, 시골내기는 시골 떠나 도시로 가도록 하는 틀입니다.


  “자연은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완전한 책이었다(41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숲에서 책을 읽고,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서 삶을 읽으며 꿈을 키우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개구리와 풀벌레가 베푸는 노래잔치를 귀여겨듣는 이웃은 어디에 있나 궁금합니다.


  우리 시골집에서 도시로 마실을 갈 적에 시외버스는 여러 시간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러 시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서울로 가노라면, 고속도로 옆으로 펼쳐진 숲이나 멧자락을 보곤 합니다. 이때 어디에서나 ‘시멘트로 만든 물골’을 만납니다. 큰비가 내리면 빗물이 이 물골로 흘러내리도록 놓았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골이 있으면 멧자락이 무너지지 않거나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외려 이런 물골 때문에 멧자락이 무너지거나 흙이 쓸려 내려갑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요.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비가 퍼붓고 태풍이 지나가더라도 멧봉우리는 낮아지지 않습니다. 가랑잎이 지고 풀줄기가 삭으면서 새로운 흙이 되거든요. 나무뿌리와 풀뿌리가 흙을 단단히 붙잡기 때문에 어떤 빗물에도 좀처럼 흙이 쓸리지 않아요. 풀을 모조리 베고 나무를 함부로 베었다면? 이러면서 시멘트 물골을 낸다면?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잡초밭 안의 나무들이 바깥쪽의 나무들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수원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질비료 세례를 심하게 받았던 과수원의 토양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린 채로 버려져 있었다(61쪽).” 같은 이야기는 이웃 일본에서 ‘기적의 사과’를 거둔 할배가 보여주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국사람은 아직 하나도 못 깨달으며 풀을 죄 ‘잡초’로 여기며 때려죽이기만 합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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