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힘 세계사 시인선 109
이지엽 지음 / 세계사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48

 


시와 봄길
― 씨앗의 힘
 이지엽 글
 세계사 펴냄, 2001.4.5.

 


  겨울에도 퍽 포근하게 바람이 부는 남녘에서는 유채잎이 넓적넓적 벌어집니다. 머잖아 유채꽃 노란 물결 일렁이겠다고 느낍니다. 냉이꽃은 진작에 올라왔습니다. 다만, 냉이꽃잔치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설을 지나고 이월로 접어들면 곳곳에 냉이꽃잔치 이루어지겠지요. 냉이꽃잔치 둘레에 꽃다지꽃잔치와 꽃마리꽃잔치 이루어질 테고, 봄까지꽃과 코딱지나물꽃과 별꽃이 함께 봄꽃잔치를 베풀리라 생각해요.


  따스한 곳뿐 아니라 추운 곳에서도 봄꽃잔치를 앞두고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웁니다. 흰눈이 쌓인 얼어붙은 땅바닥에 납작하게 잎사귀 살몃살몃 벌린 풀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은 떡잎을 빼꼼 내민 풀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마다 겨울눈 도톰하고 단단하게 맺습니다. 들판과 숲에 쌓인 흰눈이 녹으면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면 모두 한꺼번에 깨어나 까르르 하하하 호호 히히 웃음노래 들려주리라 생각합니다.


.. 물은 징검다리 건너뛰면서 / 마음은 늘 개울에 빠져 발이 시렸구나 ..  (내 마음의 곡선)


  봄이 오면 숲과 들에 진달래 핍니다. 진달래 피는 곁에 찔레가 핍니다. 찔레 곁에는 민들레가 핍니다. 민들레 곁에는 제비꽃이 핍니다. 제비꽃 곁에는 괭이밥꽃이 핍니다. 괭이밥꽃 곁에는 토끼풀꽃이 핍니다.


  온갖 꽃이 얼크러집니다. 숱한 풀이 뿌리를 나누고 줄기가 만납니다.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면서 자랍니다. 서걱서걱 바람 따라 나부끼면서 춤을 춥니다. 풀내음이 짙어 풀벌레 깃들고, 풀벌레 깃드는 곳에 풀개구리 노래합니다. 풀개구리 노래하면서 새들이 내려앉고, 새들이 내려앉는 언저리에서 흐르는 냇물에는 다슬기 있습니다. 다슬기는 개똥벌레가 잡아먹고, 개똥벌레는 별빛마냥 고운 빛을 들판에 남깁니다.


  송알송알 복닥복닥 왁자지껄한 봄입니다. 한꺼번에 눈을 뜨면서 활짝 깨어나는 봄에는 어디에서나 노래입니다. 시골 흙지기도 노래요, 시골 풀벌레와 멧새도 노래입니다. 개구리도 노래이고, 나무와 꽃도 노래입니다. 구름과 무지개도 노래이면서, 하늘과 바다도 노래예요.


.. 어느새 봄이다 / 고개 들고 보니 정말 환한 봄날이다 ..  (나는 왜 詩를 쓰는가)


  이지엽 님은 시집 《씨앗의 힘》(세계사,2001)에서 봄을 노래합니다. 시를 쓰는 까닭은 봄을 누리기 때문이라고 속닥속닥 노래합니다. 봄에 봄을 누리니 저절로 노래가 나옵니다. 봄에 봄을 맞이하니 시나브로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봄에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인이 됩니다. 봄에는 봄빛을 그득 먹으면서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릅니다. 봄에는 흙내음과 풀내음 사이를 감도는 봄내음에 젖어 누구라도 시를 사랑하고 아낍니다. 봄에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풀씨와 꽃가루를 그득 느끼면서 시 한 줄이란 씨앗 한 톨과 같다고 깨닫습니다.


.. 도갑사 가는 길 벚꽃이 피었습니다 / 그 꽃터널 지나며 / 아내는 참 곱다 차암 곱다 / 다시 봐도 환해서 눈 둘 곳을 잃습니다 ..  (꽃터널에서 길을 잃다)


  봄에 봄을 노래하듯이 여름에 여름을 노래합니다. 가을에 가을을 노래하고, 겨울에 겨울을 노래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를 바라보며 아기를 노래합니다. 아침햇살을 누리며 아침과 햇살을 노래합니다. 저녁노을을 마주하면서 저녁과 노을을 노래해요.


  밥 한 그릇 받을 적에 나락 한 톨과 숟가락을 노래합니다. 구멍 난 자리를 기우며 옷 한 벌과 바늘 한 땀을 노래합니다. 자전거를 노래하고 두 다리를 노래합니다. 흰눈을 노래하고 보슬비를 노래합니다. 뭉게구름을 노래하고 소나기를 노래해요.


  노래하지 못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노래로 태어나지 않을 이야기는 없습니다. 노래하지 못할 꿈은 없습니다. 노래로 거듭나지 않는 꿈은 없습니다. 노래하지 못할 사랑은 없어요. 노래로 맑게 웃지 않는 사랑은 없어요.


.. 마슬 갔다가 돌아오는 깜깜한 저녁 / 어린 나는 그냥 무서워 어머니 손을 꼭 잡고 / 졸린 눈을 비비며 고샅 대숲을 얼른 지나치려는데 / 산기슭께 자물자물거리는 불빛을 보고 / 어머닌 나직하게 중얼거리셨지요 ..  (배꼽)


  겨울나무는 봄나무입니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마다 봄눈이 그득 맺혔으니, 겨울나무란 봄나무입니다. 봄나무는 여름나무입니다. 봄에 꽃망울 터뜨리는 나무마다 새잎 몽글몽글 돋으려 하니, 봄나무란 여름나무입니다. 여름나무란 가을나무입니다. 여름에 잎사귀 짙푸른 나무마다 꽃송이 떨구며 자글자글 열매가 굵어지니, 여름나무란 가을나무입니다. 가을나무란 겨울나무입니다. 굵어진 열매가 소담스레 익고, 열매와 나란히 잎사귀 붉게 물드는 빛깔이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겨울빛입니다.


  삶이 흘러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자라 꿈이 됩니다. 꿈이 피어나 이야기가 됩니다. 이야기가 퍼지면서 다시 삶이 됩니다. 지구별은 수많은 푸른 숨결 삶이 모여 사랑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푸른 숨결 삶이 사랑이 되면서 꿈이 꿈틀거립니다. 이 꿈은 새로운 씨앗처럼 뿌리를 내려 이야기로 거듭나고, 어느새 예쁜 삶옷을 새삼스레 입어요.


  시를 쓰는 우리들은 지구별을 어루만집니다. 시를 읽는 우리들은 지구별을 노래합니다. 시를 쓰는 우리들은 지구별을 가꿉니다. 시를 읽는 우리들은 지구별을 지킵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며 봄볕 기다리는 풀포기 돋은 흙길을 거닐면서 봄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4347.1.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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