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을 읽는 마음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일 적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는지 궁금합니다. 성평등이라는 낱말이 아직 떠도는 만큼, 이 나라와 사회에는 성평등이 없다고 느낍니다. 민주라든지 평화라는 낱말도 아직 떠도니까, 이 나라와 사회에는 민주와 평화 또한 없구나 싶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이라는 낱말을 들추지 않아요. 꿈이 넘실거리는 데에서는 어느 누구도 ‘꿈’이라는 낱말을 애써 꺼내지 않아요. 모두 사랑이고 꿈이니, 이런 낱말이 없어도 사랑스럽게 꿈꿉니다.

 

아버지로서 언제나 두 아이를 데리고 움직입니다. 아주 드물게 곁님이 함께 움직이지만, 곁님은 시골집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20분을 달릴 적에도 멀미를 하고, 멀미에서 깨어나자면 두 시간쯤 걸립니다. 그러니, 설이나 한가위 같은 때에도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 만나러 마실을 못하기 일쑤예요. 그동안 억지로 아픈 몸 움직여 마실길 나섰지만, 길을 떠날 적과 시골집으로 돌아올 적에 몹시 힘든 나머지, 지난해와 올해에는 설과 한가위에 혼자 시골집을 지킵니다.


 

  아픈 사람일 때에 아픈 이웃을 알 수 있을까요.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면 아픈 이웃을 알 수 없을까요. 내 이웃과 동무 가운데 우리 곁님이 ‘아프’고 ‘힘든’ 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는 분이 얼마 없습니다. 이웃이나 동무가 아니라면 더더욱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다는 이웃이나 동무조차 찬찬히 살펴 주지 못합니다. 아버지로서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닐 적마다 사람들 눈빛을 읽습니다. 사람들 눈빛이 매우 거북합니다. 서로서로 거북합니다. 그러나, 굳이 거북하게 느낄 일은 없어요.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왜 어머니 아닌 아버지가 아이들 데리고 걸어서 돌아다니느냐’ 하고 여길 뿐이니까요.


 

  아이들 재우고 나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허리를 펴는 깊은 밤에 고요히 생각에 젖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일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까요. 너무 힘들어 여느 아버지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는 셈일까요. 기운은 사내가 더 세다고들 하면서, 막상 기운 센 사내는 아이 둘조차 데리고 다니지 못할 만큼 바보스러운 셈일까요. 주먹힘은 사내가 훨씬 세다 하지만, 아이들 아끼고 사랑하는 넋과 숨결과 손길과 눈빛은 아무것도 없는 사내들인 셈일까요.


 

  시외버스에서 기차에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나는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대꾸해 줍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요.” 아픈 곁님을 돌보지 못하고 두 아이만 데리고 나왔으니, 나로서는 곁님이 시골집에서 제대로 끼니 챙기며 지낼까 생각하는데, 내 둘레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와 사뭇 다릅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내 마음을 읽고 어깨동무를 할 이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7.1.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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