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아무나 쓰는가

 


  책은 아무나 쓴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가슴속에서 샘솟는다면, 책은 어느 누구라도 쓴다. 책은 아무나 못 쓴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가슴속에서 샘솟지 않으면, 아무리 이름난 글쟁이라 할지라도 책은 함부로 못 쓴다.


  책은 아무나 쓴다. 재벌 우두머리도 쓰고, 대통령도 쓰며, 시장이나 군수나 의사나 변호사도 쓴다. 시골 할매도 쓰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도 쓰며, 유치원 교사도 쓴다. 초등학교 어린이도 쓰고, 청소 일꾼도 쓰며,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일꾼도 쓴다. 꼭 작가나 시인이나 소설가나 교수나 학자만 책을 쓰란 법이 없다.


  책은 아무나 못 쓴다. 시인이기에 시집을 내야 하지 않는다. 사진가라서 사진책을 내야 하지 않는다. 학자라서 논문책이나 학술책을 내야 하지 않는다. 하고픈 말이 없이 실적쌓기를 할 생각으로 내는 책은 책이라 할 수 없다. 나누고 싶은 빛이 없이 이름쌓기를 할 뜻으로 내는 책은 책이 되지 않는다. 지구별을 사랑하는 넋이 없이 돈쌓기를 할 마음으로 내는 책은 책꼴은 갖추되 책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책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이 있어야지. 책에 담을 이야기를 온몸으로 부대낀 삶이 있어야지.


  요즈음은 ‘책을 말하는 책’이 곧잘 나온다. 스스로 다리품을 팔지 않고도 ‘책 몇 권 뒤적이거나 읽은 다음’ 이럭저럭 자료와 정보를 추슬러서 내는 ‘책을 말하는 책’이 더러 나온다.


  책을 내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릴 수 없고, 말릴 까닭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다. 죽어서 이 땅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쓴다면, 책이나 신문 같은 자료만 남았을 테니, 죽은 사람 이야기는 책을 뒤져서 쓸밖에 없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안 죽고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 이야기를 쓸 때에는? 이때에도 책만 뒤져서 어느 한 사람 이야기를 쓸 만할까? 멀쩡히 살아서 날마다 새로운 빛을 일구는 사람 이야기를, 이녁을 안 만난 채 써도 될 만할까?


  쉽게 쓰는 책을 쉽게 읽으리라 본다. 쉽게 써서 쉽게 읽히는 책은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리라 본다. ‘알아듣기 쉽게 쓰는 글’과 ‘깊이 생각을 가다듬지 않은 채 쉽게 쓰는 글’은 사뭇 다르다. 죽어서 이 땅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쓰더라도, 죽은 그이가 살아서 움직이던 곳을 찾아가서 가만히 돌아보고 난 뒤에 쓰는 글이랑, 죽은 그이가 남긴 글조각만 붙잡으면서 쓰는 글은 매우 다르다. 오늘날은 인터넷 시대라 할 테니, 인터넷만 뒤져도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그때그때 쓴 글’을 손쉽게 뒤져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어쩌면 ‘굳이 안 만나고도 인터넷 살피기’만으로도 ‘마치 만난 듯이’ 글을 쓸 만하기도 하다.


  참말, 책을 아무나 쓰는 때가 되었구나 싶다. 책을 아무나 쓰면서 아무나 책을 읽는 때가 되었구나 싶다. 곰곰이 헤아려 본다. ‘아무나 책을 쓰는’ 우리 모습은 어쩐지 슬프거나 안쓰럽지 않은가? ‘아무나’나 아니라 ‘누구나’로 거듭나고, ‘누구나’에서 ‘모두’로 다시 태어날 적에 즐거우면서 아름답지 않을까? ‘누구나 책을 쓰’고 ‘누구나 책을 읽’으면서, ‘모두 책을 쓸 수 있’고 ‘모두 책을 즐길 수 있’는 삶을 맞이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즐거운 웃음과 아름다운 사랑이 꽃피우지 않으려나?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oren 2014-01-11 12:41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책을 만드는 일'을 무슨 상품 만들 듯이 만들고 그것도 어떨 땐 불량품들 만들기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갈수록 진짜 작가도 드물어져 몽테뉴의 말대로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너무 자주 갖게 됩니다. 이미 몽테뉴가 살던 때부터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널리 퍼져있었던 듯하니 세월을 탓할 수도 없겠다 싶기는 합니다.

* * *

책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연구의 노력을 아껴 두고 상투어로 잡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진부한 소재 외에는 소용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소크라테스가 아주 재미나게 에우티데모스를 질책하던 식으로, 학문의 우스운 성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데 소용된다. 나는 작가가 여러 박학한 친구들에게 이것을 조사해 달라고 하고, 이 다른 재료로 저것을 꾸며 달라고 당부하며, 자기로서는 연구하지도 않고 들어 본 일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일을 계획하고, 이 알지 못하는 재료의 묶음을 기교있게 엮어 놓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책을 꾸며 놓는 것을 보았다. 잉크와 종이만이 자기 것일 뿐이다. 그것은 솔직히 말한다면 어떤 책을 사거나 빌려 오는 일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책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을 알림이 아니고,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는 바, 그가 책을 만들 줄 모른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나는 그 많은 빌려 온 것으로부터 어떤 것은 태평하게 표절하며, 그것을 가장하고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새로운 용도에 사용한다. 그 글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사람들이 말할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거기에 내 손으로 다른 특수한 의미를 주어 가며, 그것을 그만큼 아주 순수하게 남에게서 따온 것이 아니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도둑질한 것을 드러내 보이며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들은 법 앞에서는 나보다 신용이 있다. 우리 따위의 본성론자(本性論者)들은 인용하는 명예보다도 창작의 명예를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게 평가한다. (몽테뉴)

숲노래 2014-01-11 18:00   좋아요 0 | URL
몽테뉴 님이 밝힌 좋은 글월 잘 읽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잉크와 종이'조차
그들 것이 아니라고 느껴요.
그들은 잉크와 종이조차
스스로 만들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