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거기에 그들처럼 -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 2000-2010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2

 


게바라는 사진기를 안 들었다
― 나 거기에 그들처럼
 박노해 사진
 느린걸음 펴냄, 2010.10.1.

 


  체 게바라 님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혁명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총을 들어 이룬 혁명을, 이 다음에는 어떻게 일구었을까요. 총을 내려놓고는 호미와 연필을 들었어요. 어쩌면, 호미와 연필이 아닌 망치와 연필을 들었달 수 있고, 스패너 또는 드라이버하고 연필을 들었달 수 있습니다.


..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었다 ..  (289쪽)


  총칼에 탱크와 미사일까지 거느린 독재권력자를 몰아내려면 총을 나란히 들어야 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총질을 해대는 독재권력자는 총맛을 보아야 비로소 눈을 번쩍 뜰는지 몰라요. 평화로운 손길이나 따스한 사랑을 모르니, 평화로운 손길을 내밀거나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도 하나도 못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폭력을 폭력으로 맞설 적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쪽에서 더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앙갚음하곤 합니다. 폭력을 다스리는 길은 폭력밖에 없다고 여겨, 스스로 폭력굴레에 갇히기까지 해요. 고문기술자라는 이름을 내걸며 독재정권 지키는 데에 한몫 단단히 한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이 사람들을 고문한 대로 이들을 고문하면, 이 고문기술자들은 잘못을 뉘우칠까요. 이녁이 이제까지 어떤 짓을 했는지 제대로 깨달아 크게 뉘우치면서 고개를 숙일까요.


  어떤 전쟁도 전쟁으로 몰아내지 못합니다. 전쟁으로 전쟁을 몰아내면 다시 전쟁이 찾아듭니다. 전쟁무기 내세워 땅을 넓히려 하면, 맞선 쪽에서도 똑같이 전쟁무기 앞세워 땅을 되찾으려 할 뿐이에요. 전쟁무기는 평화가 아닌 전쟁에만 이바지합니다. 군대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지킵니다. 평화를 바란다면 평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를 누리려 한다면, 삶과 넋과 말이 모두 평화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았다. / 아니, 사랑이 없다면, /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  (289쪽)

 

 


  지구별에 평화를 불러들이는 몸짓은 언제나 따사롭습니다. 지구별에 사랑이 감돌도록 이끄는 손짓은 늘 보드랍습니다. 지구별에 꿈이 푸르게 우거지도록 북돋우는 마음짓은 노상 너그럽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즐겁게 웃지 못해요. 내가 남을 죽이면, 남도 나를 죽이기 마련이에요. 피로 얻은 열매는 피로 갚을 뿐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할밖에 없어요. 사랑으로 얻은 열매는 사랑으로 돌려주기 마련이에요.


  전쟁은 전쟁 씨앗을 뿌려 새 전쟁 피어나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 씨앗을 드리워 새 사랑 자라나게 합니다. 우리 손에는 무엇을 쥐어야 할까요. 우리 손으로 무엇을 가꿔야 할까요. 우리 손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예부터 도시를 이루어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이들은 언제나 전쟁 미치광이 되었습니다. 어느 역사책을 보더라도 도시에서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노상 전쟁에 미쳐서 전쟁짓 하느라 날뛰었어요.


  예부터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고 풀을 먹던 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롭게 살았어요. 어느 역사책을 보더라도 시골에서 조용히 흙과 풀을 누리며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롭게 살던 이들 모습은 하나도 안 담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며 역사책을 써요. 사람들은 평화롭고 사랑스레 살 적에는 굳이 역사책을 안 써요. 사람들은 전쟁 미치광이가 되면서 학문을 하고 지식을 넓히며 권력을 굳힙니다. 사람들은 평화롭고 사랑스레 흙과 풀을 누리는 동안 학문도 지식도 권력도 부질없는 줄 슬기롭게 깨달아요.


  씨앗을 심어 알뜰히 돌보며 거두면 될 뿐이에요. 몸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알면 돼요. 따로 책으로 써야 하지 않아요. 풀과 꽃과 나무마다 사랑스레 이름을 붙여서 부르면 돼요. 굳이 학술이름이니 라틴말이름이니 욀 까닭이 없어요. 무슨 갈래로 나누고 어떤 갈래로 그러모아야 하지 않아요.

 


.. 세계의 진실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 ‘사랑한 만큼 보이는 것’이다. / 사랑은 곧바로 쏘아진다! / 자신의 가슴을 관통 당하지 않으면 / ‘불꽃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290쪽)


  이웃으로 지내면 서로를 살가이 깨달으면서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웃으로 지내지 않으면 서로를 제대로 모를 뿐더러 얕게 훑을 뿐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이웃으로 여겨 살가이 지내면 나무살이를 아주 깊고 넓게 깨닫고 압니다. 나무 한 그루를 오직 학문으로 다루거나 파헤치려 한다면, 나무를 베어 나이테를 읽거나 나무 성분을 살핀다 하더라도 나무살이를 제대로 모를 뿐더러 나무를 죽이고 말아요.


  제비 한 마리를 잡아다가 배를 갈라야 제비를 잘 알까요? 제비 표본이나 박제를 만들어야 제비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제비와 이웃이 되어 제비가 둥지를 지을 만한 처마가 있는 시골집에서 흙을 만지며 언제나 제비랑 인사를 하고 지내면, 대학교를 안 다니고 논문을 안 쓰더라도 어느 누구보다 제비를 잘 알고 제비하고 사랑스레 삶을 짓습니다.


  알자면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알려면 이웃이 되어야지요. 설문지 들고 캐묻는대서 알지 않아요. 보고서 쥐고 달달 외운대서 알 수 없어요. 인터뷰를 하면 알 수 있나요?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곁에서 이웃이나 동무로 지내야 알아요. 곁에서 한솥밥 먹으며 어깨동무를 해야 비로소 알아요.


  누군가를 사진으로 담으려 한다면, 누군가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이웃이 되어 살가이 사귀고 아낄 때에 비로소 차근차근 알 수 있어요. 서로 이웃이 되지 않으면, 서로 마음으로 아끼지 않으면, 그럴듯한 모습은 사진으로 찍더라도, 이야기가 될 사랑과 빛과 넋과 삶은 사진에 조금도 못 담습니다.


..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  (291쪽)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살다가 노동도 혁명도 내려놓아야 한 채 시인이 되었던 박노해 님이 모든 굴레와 짐을 내려놓으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이웃을 만나러 길을 떠나고, 이웃을 만나 웃고 울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떠난 길은 아니에요. 사진을 찍어 사진책 내놓으려는 길은 아니에요. 다큐사진을 이룬다거나, 고발이나 폭로를 하려는 길은 아닙니다. 그저 이웃을 만나러는 길에 사진기를 손에 쥐어요. 예쁜 이웃을 만나면서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살갑게 이웃사랑을 하면서 저절로 사진기를 품에 안습니다.


.. 사진가와 지역은 운명적인 관계가 있다. /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 / 내 두 발은 왜 그리로 이끌려 갔던 걸까. / 그들은 왜 나를 그 자리로 불러세운 걸까 ..  (291쪽)


  사진책 《나 거기에 그들처럼》(느린걸음,2010)을 읽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그들하고 똑같이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 있고, 그들은 우리한테 이웃으로 찾아와요. 우리는 그들, 아니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은 우리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 다른 사랑을 꽃피웁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아끼며 보듬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에서 살아가는 듯하지만, 모두 똑같은 지구별에서 살아갑니다. 모두 똑같은 햇볕을 받고, 모두 똑같은 바람을 마셔요. 모두 똑같은 지구별 바다와 냇물이 베푸는 물을 마시고, 모두 똑같은 지구별 나무와 풀이 베푸는 푸른 숨결을 맞아들여요.


  체 게바라 님은 사진기를 안 들었습니다. 체 게바라 님은 낫과 연필을 들고 땀흘리느라 바빴습니다. 혁명이란 삶이고, 삶인 혁명을 이루려면 총으로는 안 될 뿐 아니라, 언제나 호미로 흙을 일구고 보듬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이야기를 차곡차곡 적어서 이웃들과 노래로 누려요. 호미로 삶을 짓고 연필로 삶을 노래합니다. 호미로 삶을 가꾸고 연필로 삶을 사랑하지요.


  박노해 님이 손에 쥔 사진기는 연필과 같은 구실을 할까요. 박노해 님이 손에 잡은 사진기는 연필과 같이 삶을 노래하거나 삶을 사랑하는 빛이 될까요. 4346.1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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