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3.11.27.
 : 얼음 맞는 가을길

 


- 편지 한 통을 부치려 한다. 겨울 문턱인 터라 가장 따뜻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자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으로는 읍내마실을 해서 우체국에 갈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한겨울이라면 스스럼없이 자전거를 달릴 텐데, 외려 겨울 문턱이 조금 더 춥다고 느낀다. 이래저래 밍기적거리다가 네 시가 다 되어 비로소 길을 나서기로 한다. 아침부터 찬비가 쏟아졌기에 망설였는데, 낮이 되며 해가 나왔고, 낮에 해가 따숩다 싶어 옆지기 두꺼운 겉옷을 빨아 바깥에 말렸다. 이만 한 해님이 있으면 네 시에 우체국 다녀와도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 바람이 제법 분다. 아이들은 오늘 어떻게 할까. 어제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마실 하며 바람 옴팡지게 먹었다. 큰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이부자리로 깃들었고, 두 시간 넘게 옹크리며 잤다. 오늘도 아이들 데리고 길을 나서면 좀 추우리라 생각하며 혼자 다녀오려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함께 따라나서고 싶은 눈치이다. 너희들 대단하구나. 그래, 이렇게 대단한 숨결이 바로 아이들 숨결이지. 찬바람에 지지 않고, 아니 찬바람과 놀면서, 가을을 누리고 겨울을 맞이하는, 이런 숨결이 바로 아이들 숨결이지.

 

- 문득 아이들 데리고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제 너희 바람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아버지 혼자 우체국 다녀올게.” 하고 말한다. 아이들은 대청마루에 서서 손을 흔들어 준다. “아버지 꼭 오셔요!” 그럼 우체국만 갔다가 돌아오지 어디 가서 안 오겠니.

 

- 생각보다 바람이 드세다. 어제보다 바람이 드세다. 자전거가 휘청거린다. 그런데, 이런 바람이 불어도 나무는 꺾이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부는 결에 따라 이리 살랑 저리 설렁 살살 움직이면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건사한다. 사람들은 으레 풀만 바람 따라 눕는다고 여기지만, 나무도 바람 따라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나무 곁에 서서 나뭇줄기에 가만히 손을 대 보면 안다. 아무리 우람한 나무라 하더라도 바람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데, 무척 크게 움직인다.

 

- 우체국에 닿는다. 편지 한 통 부친다. 저울로 다니 3150원. 택배보다 비싸게 나오네. 차라리 택배 종이 붙이면, 외려 2500원으로 해 주기도 하는데. 우체국 일꾼이 슬그머니 150원을 덜어 준다. 응? 고맙습니다.

 

- 면소재지 빵집에 들러 네모빵과 둥근빵을 산다. 우리 집 아이들은 네모낳게 구운 식빵을 ‘네모빵’이라 가리키고, 둥그렇게 구운 바게트를 ‘둥근빵(동그랑빵)’이라 가리킨다. 아이들이 붙인 이런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아이도 어른도 이렇게 수수하며 재미나게 이름을 붙이면서 살아갈 때에 마음이 아름답게 빛나겠지.

 

- 집으로 돌아간다. 면소재지 벗어날 즈음 만나는 숲이 가을빛으로 흐드러진다. 다음에 바람 적게 불고 햇볕 좋은 날, 이곳에 마실 와야겠다. 마을 뒤쪽 천등산은 도시에서 몰려든 사냥꾼 때문에 갈 수 없다. 주말에도 여느 날에도 사냥꾼 총소리가 펑펑 울린다. 면소재지 조그마한 멧등성이에는 사냥꾼이 올 일 없다. 이곳 숲에서 아이들과 가을빛 누려야겠다.

 

- 면소재지 벗어나서 서호덕마을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얼음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얼음이 퍼붓는다. 서호덕마을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달리면서 아이고 아파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갑자기 퍼붓는 얼음비는 춥기보다 아프다. 웬 난데없는 얼음비람. 오려면 눈이 오지. 눈이 와서 우리 아이들 신나게 눈놀이 하도록 해 주지.

 

- 동호덕마을로 접어드니 얼음비 그치면서 해가 쨍 하고 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얼음비 쏟아내던 매지구름은 벌써 저 뒤로 물러났다. 하늘이 탁 트이다가도 흰구름이 물결치고, 다시 하늘이 탁 트이고 새삼스레 흰구름 그득 찬다.

 

- 구름 누리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름을 아이들과 함께 보면 더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이 얼음비 맞았으면 무엇을 느꼈을까 궁금하다. 어제보다 모진 바람이 불더라도 이 바람을 쐬어야 시골스러운 시골아이로 씩씩하게 자란다고 여겨야 했으려나. 바람이 드세니 길에도 마을에도 사람 그림자가 없다. 자동차도 없다. 맞바람 맞으며 낑낑거리면서 자전거를 달린다. 어제는 늦가을바람 옴팡지게 먹으며 몸이 많이 춥고 힘들더니, 오늘은 이럭저럭 괜찮다. 여러 날 잇달아 바람을 먹으면 차츰 익숙해지는 셈일까.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