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3.11.18.
 : 늦가을바람, 뱀, 재채기

 


- 서재도서관 큰봉투를 하나 만들었다. 〈시민사회신문〉이라는 곳에 ‘숲사람 이야기’라는 꼭지로 한 쪽을 통째로 채우는 글을 쓰는데, 이 글을 도서관 지킴이한테 보내려면 큰봉투가 있어야 한다. 도서관 이름과 주소를 박아 봉투를 만든다. 봉투 한 장에 86원 꼴이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봉투질을 하고, 아이들 밥을 먹인 뒤, 늦가을 찬바람 휭휭 부는 날씨에 가장 따스하다 싶은 열두 시 반 무렵 길을 나선다. 막상 길을 나서려 할 즈음 갑자기 빗방울 듣는다. 웬일이니. 아침에는 해가 나더니 웬 빗방울이니. 그런데 10분쯤 빗방울 듣다가 뚝 그치고 하늘이 멀쩡하게 갠다. 또 웬일이니.

 

- 바람이 드세다. 큰아이가 뜻밖에 “자전거 안 타고 집에 있을래.” 하고 말한다. 이러면서 “아버지, 보라하고 가서 과자 사 와요.” 하고 말한다. 쳇. 그럴 수 없지. “벼리야, 너 안 가려면 너는 과자 사 와도 먹으면 안 돼. 보라만 가니까. 아직 겨울도 아닌데 이만 한 바람 때문에 자전거 안 탄다고 하면 어쩌니. 겨울에는 자전거 어떻게 타려고 그러니.” 큰아이한테 두꺼운 겉옷 입힌다. 장갑을 끼운다. 수레에 앉은 작은아이한테는 내 두툼한 겉옷으로 감싸 준다. 바람이 싱싱 불어 추우니, 큰아이는 마을 어귀까지 달리겠다고 한다. 그래, 추울 때에는 달려야지. 큰아이는 조금 달려서 몸을 달군 뒤 샛자전거에 탄다. 작은아이는 마을 어귀부터 고개를 푹 떨구고 잠든다. 바람이 불건 어쩌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새근새근 잘 잔다.

 

- 며칠 사이에 바람이 달라졌다. 이레쯤 앞서부터 바닷바람에서 뭍바람으로 바뀌는구나 싶더니, 오늘은 그예 뭍바람이다. 면소재지 가는 길에는 이럭저럭 뒤에서 바람이 분다 할 만하지만, 우체국 들러 돌아오는 길에는 고스란히 앞바람 맞아야겠구나 싶다. 샛자전거에 탄 큰아이는 조용하다. 많이 추운 듯하다.

 

- 우체국에 들르고 가게에 들른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 맞바람이 거세다. 자전거 발판 구르기 벅차다. 큰아이는 몸을 폭 숙인다. 바람이 제법 찬가 보다. 서호덕마을 지나 동호덕마을 가는 길목에 뱀 한 마리 본다. 어라, 넌 왜 아직 겨울잠 안 자고 예서 뭐 하나. 자전거를 세운다. “아버지, 뭐야?” “응, 뱀이야.” “뱀, 뱀 무섭잖아?” “뱀이 뭐가 무서워. 뱀이 우리를 무서워 하지.” “그래?” “자, 자, 뱀아, 너 여기 있으면 차에 치여 죽어. 얼른 저 길 가장자리로 가라.” 자전거 앞바퀴로 슬슬 민다. 뱀은 가기 싫어하는 눈치이다. 한창 따뜻하게 몸을 덥히려는데 성가시다는 눈치로구나. 이런, 녀석아. 너희들 뱀이 이렇게 늦가을에 몸을 덥히다가 자동차 바퀴에 엄청나게 밟혀 죽는 줄 모르니? 자전거 앞바퀴로 살살 밀어 길 가장자리로 보내는데, 저 앞에서 자동차 한 대 달려오는 모습 보인다. 저런. 조금 더 밀면 되는데, 자동차 거의 안 다니는 길에 웬 자동차지? 저 자동차는 굳이 이 길을 달릴 까닭 없이 큰길로 다니면 되는데, 왜 마을길로 애써 돌아서 오느라 성가시게 하나.

 

- 자전거를 옆 찻길로 얼른 돌린다. 자전거를 세운다. 자동차 지나간다. “아버지, 어떻게 해?”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그냥 잘 지나갈 테니 걱정하지 마.” 저 앞에서 자동차 오는 모습을 보고는, 자동차 바퀴 사이에서 뱀이 안 밟힐 만하다 싶은 데까지만 밀었다. 자동차 지나간 뒤 억새 한 포기 끊는다. 갑작스런 찬바람 때문에 꽁꽁 언 뱀을 억새풀로 슬슬 민다. “얘야, 얘야, 아무리 고흥이 따뜻한 곳이라도 너 겨울잠 안 자면 뭘 먹고 살려 그러니. 몸 따뜻하게 덥혔으면 얼른 구멍 파고 들어가서 겨울잠 자라.” 이동안 작은아이가 잠에서 깬다. 잘 잤니? 자전거가 굴러야 자는데, 아버지가 뱀 살린다며 자전거 세워서 잠에서 깼니?

 

-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빈들과 억새꽃이 흐드러진다. 자전거를 살짝 세우고 아이들과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을 바라보고 누렇게 시든 들판을 본다. “벼리야, 저 구름 무엇처럼 생겼니?” “음, 고양이처럼.” “고양이? 그래, 그러면 고양이구름으로 하자.” 앞에서는 맞바람 드세지만,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낑낑대며 자전거를 달려 집에 닿는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자전거를 겨우 달렸다. 태풍 오는 날 달리는 자전거 못지않게 힘을 쏟았다. 자전거를 집 벽에 붙이고, 덮개를 씌운다. 짐을 집안으로 들인다. 대문을 닫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또 빗줄기 듣는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새파랗게 열린 하늘에 흰구름 흐르더니 또 비가 오네. 그래도 아이들 집에 잘 들어오고 나서 쏟아지니 고맙다. 저 차디찬 비를 아이들이 맞았으면 고뿔에 걸릴 수도 있겠다.

 

- 아이들은 아이 추워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만, 이내 겉옷 훌훌 던지고 양말을 벗는다. 춥다며? 춥다면서 겉옷과 양말 벗어던지고 뛰어논다. 이와 달리 나는 재채기가 끊이지 않는다. 찬바람을 너무 마신 듯하다. 봄과 가을에는 날마다 들빛과 숲빛이 달라지기에, 아이들하고 이 시골빛을 누리고 싶은데, 가을은 찬바람이 날마다 더 드세게 바뀌니 바깥마실 만만하지 않다. 이튿날에도 소포를 더 부쳐야 할 텐데, 이튿날 바람은 어떠할까 모르겠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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