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르주 뒤크로 지음,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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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6

 


구경꾼과 마을지기 사이
―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조르주 뒤크로 글
 루이 마랭 사진
 최미경 옮김
 눈빛 펴냄, 2001.7.30.

 


  구경꾼은 구경을 합니다. 마을사람은 마을을 보살핍니다. 구경꾼은 얼핏 구경하다가 지나갑니다. 마을사람은 마을에서 살아가며 마을빛을 가꿉니다. 구경꾼이 사진을 찍을 적에는 구경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마을사람이 마을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마을에서 감도는 마을빛이 새롭게 환합니다. 구경꾼이 구경하며 글을 쓰면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다른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듯이 읽습니다. 마을사람이 마을살이를 글로 쓰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마을사람을 살가운 이웃으로 느끼며 서로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구경하느냐, 아니면 마을에서 마을사람으로서, 또 마을지기로서 살아가느냐 하는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삶이 엇갈립니다.


  구경한대서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저 구경할 뿐이에요. 살아가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예 살아갈 뿐입니다. 구경하면서 하루가 스쳐서 지나갑니다. 살아가면서 하루를 한결 깊고 넓게 들여다봅니다.


.. 남산을 거쳐 한양에 도착하는 사람은 나뭇가지 사이로 초가지붕으로 잔뜩 덮인 큰 마을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굴뚝 연기에 휩싸인 이 초가가 가득한 마을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끝없이 늘어선 초가들과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웅장한 성문들을 보게 되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어진다. 여기가 바로 한양이며, 한양은 마치 겉보기가 볼품없는 농촌의 아낙 같아 보인다. 초가들은 꾸밈이 없어 보이며, 무척 가난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처량하지는 않다. 아주 맑고 은은한 햇빛이 이 가난해 보이는 정경을 포근하게 감싸안는다 …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중국식 청기와를 얹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일부 양반에게나 가능한 사치이며, 대다수의 경우는 짚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 조선의 가옥에는 반드시 뜰이 있게 마련이다. 자유롭게 바람을 쐴 수 있는 이 작은 뜰마저 없었더라면, 집안을 지키며 거의 노예와 같이 사는 아낙네들의 삶은 너무나 처량했을 것이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져 있고, 패랭이꽃이라도 한 뿌리 심어져 있는 햇살이 잘 드는 이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약간의 공간을 두게 된다 ..  (67∼68, 69쪽)


  한국사람이 한국을 더 잘 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을 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 나라를 알뜰히 아끼거나 살가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한국을 제대로 모르기 마련이에요. 참답게 사랑하고 착하게 아끼는 눈길과 손길로 이 나라를 제대로 빛내는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나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인천사람도 되고 고흥사람도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태어난 곳도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나로서는 인천에서도 마을지기로 지내고 싶으면서 고흥에서도 마을지기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느 곳에 머물든 그 마을에서 꿈과 사랑을 속삭이고 싶습니다.


  구경꾼으로 있으면 재미없습니다. 냇물 너머 불구경을 하는 삶이란 재미없어요. 불을 끄든 불을 쬐든 해야지요. 아픈 이웃이 옆에 있는데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슬픈 벗이 곁에서 우는데 못 본 척할 수 없어요.


  이웃한테 손을 내밉니다. 동무를 살포시 안습니다. 내 이웃도 내가 어려울 적에 손을 내밉니다. 내 동무도 내가 아플 적에 살포시 안아 줍니다. 나는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내 이웃과 동무는 나를 사랑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할 적에 비로소 마음을 읽습니다. 마음을 읽을 적에 속내를 헤아리고, 속내를 헤아리면서 서로서로 잘 알고 활짝 웃는 벗님이요 옆지기가 됩니다.


.. 일본인들이 아무리 그들의 겉옷인 하오리를 조선인들에게 자랑해도 소용이 없다. 한민족은 항상 눈을 맞은 듯한, 건조한 기후에 쉽게 때를 타는 그들의 아름다운 의관을 고수하고 있다. 고국을 떠나 아무리 먼 나라로 이주해도 한민족은 항상 흰옷차림을 하고 있다. 헤이룽 강가에 채소밭이라도 하나 보이고, 밀가루라도 뒤집어 쓴 듯이 흰옷을 입은 농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조선인이다 ..  (78쪽)


  조르주 뒤크로 님이 글을 쓰고, 루이 마랭 님이 사진을 찍은 인문책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눈빛,2001)을 세 차례 읽었습니다. 글이 살갑고 사진이 따스해서 여러 차례 되읽었습니다. 책을 세 권 장만했고, 두 권은 내 책꽂이에 건사했으며, 한 권은 동무한테 선물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르주 뒤크로 님이나 루이 마랭 님이 이 나라 한국을 구경꾼으로 스쳐 지나치지 않았다고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머나먼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한국땅에 발을 디딜 때부터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눈빛’이었어요.


.. 조선의 문인들은 한자를 배우며, 고전을 본따 한시를 짓는다. 그렇지만 조선의 서민들은 이런 중국식 한시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서민에게는 그들의 문자인 한글로 쓰인, 삶의 애환과 꿈을 노래하는 가락과 시가가 있기 때문이다 ..  (105쪽)


  글을 쓰는 마음은 사랑을 하는 마음입니다. 사진을 찍는 마음은 사랑을 하는 마음입니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사랑을 하는 마음이 될 뿐입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이는 글을 못 쓰고 사진을 못 찍어요.


  생각해 보셔요.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이를 못 낳습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이를 돌보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아닌데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는 채 아이하고 활짝 웃고 노래하며 놀 수 있을까요.


  삶을 이루는 바탕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삶바탕을 다스리면서 이 자리에 이야기씨앗 뿌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야기꽃은 이내 이야기열매 되어요. 이 이야기열매는 무르익어 어느덧 꿈으로 자랍니다.


.. 양반의 신분·학식·고관의 직은 모두 일치된 것이다. 서민들에게 양반은 주인이며, 돈을 엿보는 눈초리를 의미한다. 세금과 부역은 이 나라에서 아주 무겁다. 때때로 고관들은 황제에게 일정한 수의 호랑이 가죽을 상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냥꾼들에게 사냥 명령이 떨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고관이 마을을 지나다 새로 지붕을 이은 집을 눈여겨본다. 그러면 그 지붕을 새로 한 사람은 돈을 바쳐야 한다. 이런 가차없는 징세제도 때문에 차라리 백성들은 빈둥거리며 노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시베리아에라도 가게 되면 한두 푼 저축을 한다. 만약에 정부가 덜 가혹하게 군다면 백성들은 덜 게으를 것이다. 그렇게 무섭게 백성에게서 뺏은 돈은 황제의 기분풀이, 환영행사, 만찬, 불꽃놀이, 성대한 외출, 코끼리 구입, 한양의 백성들을 위한 쌀배급, 군대의 월급 등으로 쓰인다 ..  (119쪽)


  학문으로 다가서면 학문이 돼요. 철학으로 다가가면 철학이 돼요. 교육으로 마주하면 교육이 되지요. 학문이나 철학이나 교육이 나쁘거나 모자라거나 어수룩하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삶도 사랑도 이야기도 꿈도 없이, 학문이나 철학이나 교육이 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학문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살갑지 못한 교육은 어떤 빛이 될까요. 아름답지 않은 철학은 우리 삶에 어떤 이야기로 스며들까요.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은 인문책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돌아본 사람들이 갈무리해서 내놓은 인문책입니다.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왕조에 짓눌려 애틋한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짓눌린 채 살더라도 웃음과 노래와 춤과 꿈과 사랑을 곱게 건사합니다.


  제국주의자도 임금도 밥을 먹어요. 밥을 안 먹으면 제국주의자도 임금도 굶어죽습니다. 친일부역자도 밥을 안 먹으면 죽어요. 그러니까, 이들 권력자는 제아무리 사람(백성)들을 짓누르거나 짓밟더라도 죽이지 못합니다. 권력자가 스스로 흙을 일구어 나락을 거두겠습니까? 권력자가 스스로 나무를 돌보며 능금알을 따겠습니까? 권력자가 배를 뭇고 노를 저어 바다에서 고기를 낚겠습니까? 권력자는 권력을 거머쥐었을 뿐 아무것도 스스로 못 해요. 권력자는 옷을 기울 줄 모릅니다. 권력자는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권력자는 아이를 돌볼 줄 모르고, 권력자는 아이한테 삶도 사랑도 꿈도 물려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시골사람은 짓눌린 몸으로도 빙그레 웃으면서 흙을 만져요. 시골사람은 이녁이 먹을 밥을 손수 지어서 먹을 뿐 아니라, 권력자한테까지 나눠 줘요. 다만,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는데, 빼앗기더라도 아쉬워 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세금’을 내세워 빼앗지 않으면 저들은 굶어죽으니까요.


.. 한양의 사대문 밖 들판은 아름답다. 여기저기 언덕이 보이며, 습곡이 많고, 고요해 보이는 막힌 계곡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오래된 밤나무 밑으로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들판은 모두 논인데 나무숲, 항상 살랑거리는 빼어난 큰 버드나무 등이 있는 곳은 그대로 두었다. 돌로 된 길은 채전·뽕밭·자두나무·살구나무 들이 있는 곳을 피해 구불거리며, 움직이는 흰옷과 소를 끌고 가는 농부들,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우물로 가는 아낙네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햇빛이 맑고 바람이 가볍게 이는 이렇게 평온한 나라에 사는 조선인들은 행복하다 ..  (130쪽)


  배부른 부자가 불쌍하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한테서 빼앗는 부자라고 해서 너그럽거나 넉넉하지 않습니다. 거머쥔 재산은 많지만, 이 재산을 또 다른 누구한테 빼앗길까 봐, 그러니까 부자가 가난한 이한테서 돈을 가로채거나 빼앗았듯이, 어떤 다른 부자가 이녁 재산을 가로채거나 빼앗을까 봐 끙끙 앓아요. 잔뜩 거머쥐고 많이 챙겼어도 배부르지 못해요. 많이 먹고 잔뜩 먹지만 너그럽지도 느긋하지도 못해요. 외려 더 바쁘고 빠듯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답답하고 갑갑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다 할 만합니다. 손에 쥔 것은 풀포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숨 마시고 냇물빛 먹으며 싱그럽게 살아가요. 멧새와 놀고 풀벌레와 노래합니다. 흙빛이 되고 하늘빛이 되며 풀빛이 됩니다. 가난한 여느 조선 시골사람들은 너그럽게 웃고 넉넉하게 노래할 줄 알던 아름다운 우리 어버이들입니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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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1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다운 나라에 대한 정다운 글이네요.
행복은 재물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으니, 가진 재물의 양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겠죠.
얼마큼 갖는냐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가 제일 중요하겠죠.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

숲노래 2013-11-1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이 글이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데
pek0501 님이 좋게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 스스로 이 느낌글을 좋아하는 한편,
이 책이 참 좋아요.

나중에 이 책 꼭 읽어 보셔요.
이렇게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반가우며 예쁜지...
참 아름답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