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로리 1
코야마 아이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77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 치로리 1
 코야마 아이코 글·그림
 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3.5.30.

 


  새벽 한 시에 여섯 살 큰아이가 끙끙거리면서 일어납니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마루에 놓은 오줌그릇에 앉습니다. 쪼르르 쉬를 눕니다. 다시 어기적거리며 방으로 들어옵니다. 이불을 젖힙니다. “잘 했다, 잘 했어.” 하고 말하며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씌우며 가슴을 다독입니다. 큰아이보다 일찍 잠든 작은아이도 쉬가 마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작은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겁니다. “너도 쉬 마렵지? 자, 쉬 할까?” 작은아이는 기지개를 켭니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쭉 뻗습니다. 한손으로는 머리를 받치고 한손은 허리춤에 넣어 살며시 안습니다. 왼어깨에 안긴 작은아이는 몸을 폭 맡깁니다. 마루로 나와 살짝 세우고는 바지를 내려 “자, 쉬.” 하고 말합니다. 작은아이는 이내 오줌을 주루루 눕니다. 다 누면 엉덩이를 톡톡 치며 “잘 했어.” 하고 말합니다. 바지춤을 올리고 다시 안아서 방으로 들어갑니다.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습니다.


  두 아이 오줌으로 꽉 찬 오줌그릇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마을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섬돌에 있습니다. 얘야, 여기가 네 집이니, 왜 여기에서 자니, 너는 풀숲에 가서 자렴.


  텃밭 자리에 오줌을 뿌립니다. 나는 별바라기를 하면서 쉬를 눕니다. 밤하늘 별빛이 쏟아집니다. 바람 없는 늦가을 깊은 밤이 고즈넉합니다.


- “인력거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되게 일찍 일어났네?” “네,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져서.” “나도 그런데. 왠지 다시 자려니까 아깝더라구. 일찍 일어나는 새가 복을 받아 벌레를 잡겠지 싶어서 밖으로 나와 봤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손님도 없고 헛걸음만 했나 후회하던 참이거든.” (6∼7쪽)
- “그래도 일찍 일어나길 잘했네. 덕분에 좋은 것도 보고.” (27쪽)


  물을 한 모금 입에 뭅니다. 곧바로 삼키지 않습니다. 한참 입에 머금습니다. 제아무리 차가운 물이라 하더라도 입에 물을 머금으면 곧 따스한 기운이 돕니다. 알맞게 따스한 기운이 입안에 돌면 즐겁습니다. 이럴 즈음 천천히 물을 삼킵니다. 목이 마르대서 벌컥벌컥 들이켠들 목마름이 가시지 않습니다. 한 모금씩 천천히 입안에 머금다가 천천히 삼키면 목마름이 쉬 가십니다. 빨래를 할 적에도 입에 물을 한 모금 물고는 한참 있습니다. 물을 오래도록 입에 머금으면서 이 물이 내 몸으로 스며 어떤 숨결이 되는가를 헤아립니다. 물 한 모금은 내 몸 구석구석을 읽습니다. 물 한 모금에 담긴 넋은 내 몸을 살찌웁니다.


  씨앗 한 톨 심을 적에 오래도록 입에 물어 침으로 불린 뒤 심으면 훨씬 잘 된다고 합니다. 이듬해부터는 씨앗을 이렇게 심자고 생각합니다. 넓은 땅에 씨앗을 잔뜩 심자면 입에 머금을 겨를이 없을 텐데, 다문 몇 톨이라도 이렇게 하면서 심어 본다면 사뭇 다른 빛이 흙땅에서 샘솟으리라 느낍니다. 내 몸이 씨앗 한 톨을 읽고, 씨앗 한 톨은 이 씨앗을 심어 돌볼 사람 몸을 읽습니다. 서로서로 몸과 마음을 읽습니다. 씨앗 한 톨은 죽은 목숨 아니거든요. 씨앗 한 톨도 산 목숨이거든요. 산 목숨이기에 흙땅에 살며시 묻으면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산 목숨이기에 씨앗 한 톨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새로운 열매와 씨앗이 맺습니다.


  흙을 만지는 사람이란, 늘 싱그러운 목숨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이란 목숨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목숨 하나를 흙 품에 안기도록 해서, 아름다운 꽃빛을 누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즐기려는 사람이 바로 흙지기, 다시 말하자면 농사꾼입니다.


- “‘치로리’라면 ‘아주 쪼금’이나 ‘오종종’ 뭐 그런 뜻인가?” “맞아요, 맞아!” “마담. 어차피 자네 가게니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좀더 출신이 확실한 녀석을 고용하는 게 좋지 않겠어?” “고마워요, 아저씨. 하지만 괜찮아요.” (41쪽)
- “치로리, 불꽃놀이 봤니?” “아뇨.” “나도 전혀. 아, 맞다. 자, 오늘 하루 수고 많았어, 치로리. 비록 얼음도 다 녹아버리고 미지근해졌지만.” (90쪽)

 

 


  먼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흙을 만졌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들 누구나 흙을 만졌습니다. 산 목숨을 만지고, 산 숨결을 돌보았습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따위를 만들어 자꾸 전쟁을 일으켰고, 무역을 한다면서 제 밥그릇 키우기를 벌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따위를 만드는 이들은 ‘죽은 목숨’에 매달리는 삶입니다. 산 목숨을 만지며 돌보는 삶하고는 동떨어진 길을 걸었다 할 만합니다. 산 목숨 아닌 죽은 목숨을 만지며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려 했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얼마나 ‘산 목숨’을 바라보거나 마주하는 사람이라 할 만한가요. 교사는 학교라는 일터에서 산 목숨인 아이들을 바라보거나 마주하는데, 교사 자리에 선 이들은 아이들을 어느 만큼 산 목숨으로 여기거나 생각할까요. 대입시험 기계나 부속품쯤으로 여기지는 않나요? 초등학생이라면 대입시험을 앞둔 ‘예비 기계나 부속품’으로 바라보지는 않나요? 공장 노동자는 어떻지요? 공장 노동자는 이녁이 만지는 기계가 얼마나 산 목숨이 될까요. 어떤 물건을 만들려 하는가요. 어떤 물건이 지구별에 새로 태어나도록 하는가요.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무 일이나 거룩할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 만드는 일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한 번 쓰고 버려 쓰레기가 될 물건 만드는 일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삶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송전탑을 세우려고 시골사람 괴롭히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노동자 또한 거룩하지 않습니다. 전쟁 훈련을 받느라 젊음을 바쳐야 하는 군인은 얼마나 거룩하다 할 수 있을까요. 산 목숨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일 때에 비로소 거룩하며 아름다운 일이요, 산 목숨하고 등지거나 동떨어진 채 이웃 목숨을 밟거나 들볶거나 괴롭힌다면 참으로 슬프며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느낍니다.


- “비가 그친 것 같아요.” “응? 어머나, 정말이네. 완전히 개서 고운 달님이 떴어. 얘! 지금 달구경 가지 않을래?” (118∼119쪽)

 


  코야마 아이코 님이 빚은 만화책 《치로리》(대원씨아이,2013) 첫째 권을 읽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개항기라 할 만한 때를 발판으로 삼아 찻집 한 곳 둘레에서 생기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에서는 개항기가 어떠했을까요.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서양나라 군함이 쳐들어왔다 하는데, 개항이라는 물결은 일본땅 여느 사람들한테는 어떤 빛 또는 어둠이었을까요.


  정치와 경제와 군대하고 얽힌 사람, 또 문학과 문명과 지식과 학문하고 얽힌 사람, 또 이런 이름 저런 힘 그런 돈하고 얽힌 사람, 이러구러한 사람들 아닌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들은 어떤 빛과 어둠을 누린 개항 물결일까요. 아니, 개항 물결이라고 헤아릴 만한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 “앗, 또 가시에 찔린 거야?” “네에.” “하긴 그 참억새, 이삭이 활짝 벌어져 있더라. 어디 좀 보여줘 봐.” (134쪽)


  전쟁통에도 아기는 태어납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권력자들이 일으키는데, 아기는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마을에서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들이 꽃피우는 작고 소담스러운 사랑을 물려받아 태어납니다.


  전쟁통이건 아니건 억새는 피고 집니다. 전쟁통이건 아니건 진달래와 민들레는 피고 집니다. 전쟁통이건 아니건 나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전쟁통이건 아니건 봄이 찾아오고 가을이 지나갑니다. 미사일이 날고 핵무기가 늘더라도 비가 내리고 눈이 옵니다. 전투기와 잠수함이 지구별을 더럽히더라도 낮이 오고 밤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삶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통이건 아니건 사랑을 속삭여 아름다운 새 숨결인 아기를 낳아요. 제국주의 일본에도 식민지 조선에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늘 사랑스럽게 살림을 꾸립니다. 제국주의 일본땅에도 힘없고 이름없으며 돈없는 이들이 조용히 있었고, 식민지 조선에도 권력과 돈과 이름값에 빌붙으며 이웃을 괴롭히는 이들이 시끌벅적 있었습니다. 일본 어느 바닷마을에 ‘치로리’가 있었으면, 한국 어느 시골마을에 ‘순이’가 있었습니다. 4346.10.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만화책 즐겨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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