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338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61

 


이슬을 읽는다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조용미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7.10.31. 7000원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아이들을 읽습니다. 아이들 목소리를 읽고, 아이들 낯빛을 읽으며, 아이들 움직임을 읽습니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늘 들을 읽습니다. 들내음을 읽고, 들바람을 읽으며, 들빛과 들소리와 들숨을 읽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는 사람은 기계에서 숨소리를 느낍니다. 기계를 벗이나 이웃으로 여깁니다. 바느질을 하는 사람은 바늘과 실을 한몸처럼 느낍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은 버스가 내 몸과 같고, 택시를 모는 일꾼은 택시가 내 몸하고 같아요.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와 연필이 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기가 늘 옆에 있어야 합니다. 들일 밭일 하는 사람은 호미가 언제나 가까이 있어야 해요.


  삶자리에 따라 일자리가 다릅니다. 삶터에 따라 쉼터가 다릅니다. 삶을 누리는 모습에 따라 넋과 말이 다릅니다.


.. 종이 한 장 깔지 않은 흙바닥을 이토록 매끈하게 만든 사람은 / 어떤 연장보다 빛나는 손을 가졌을 것이다 / 나는 자꾸 흙바닥을 만져본다 ..  (흙 속의 잠)


  밤새 자는 동안 집 둘레에서 흐르는 소리가 내 몸을 이룹니다. 내 집 둘레에서 자동차가 쉴새없이 오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이 소리가 머리에서 윙윙 울립니다. 내 집 둘레에서 풀벌레가 나긋나긋 노래를 하면, 이 노래가 머리에서 잔잔히 감돕니다. 공장에서 밤샘일 하고 나서 아침에 잠드는 사람은 잠결에도 기계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과 하루 내내 뒹굴며 놀고 부대끼고 돌보고 하다가 함께 곯아떨어진 사람은 잠결에도 아이들하고 노닥거립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에서 밥을 주는 사람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 바퀴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발걸음 소리도 알아차리지요. 낯익고 반가운 사람 발걸음 소리에다가 숨소리까지 알아차려요. 낯설거나 달갑잖은 사람 발걸음 소리랑 숨소리도 알아차립니다.


  아이들도 느껴요. 아이들도 어버이가 기쁜 마음인지 슬픈 마음인지 좋은 마음인지 짜증스러운 마음인지 하나하나 느껴요. 어버이가 입을 열기 앞서 어떤 말이 터져나올까 하고 알아차립니다. 어른들도 그렇지요. 아이들 움직임과 낯빛만 보고도 어떤 말을 읊을는지 알아차려요.


.. 오층석탑과 천년수 사이에 짧은 시누대 터널이 있다 천 년 묵은 나무와 천 년 묵은 탑 사이에 있는 대숲 터널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빽빽하고 어둑하다 ..  (만일암터)


  우리는 모두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입을 열지 않아도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뜨지 않아도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귀를 쫑긋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살결을 쓰다듬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느끼고 알기에 입과 귀와 눈과 살결을 거쳐 더 깊고 넓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느끼거나 알면 입이나 귀나 눈이나 살결 아니고도 한결 깊고 넓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불을 맞추지 않아 냄비가 탈 적에, 눈으로 안 보고 코로 냄새를 느끼지요. 작은 풀개구리를 손바닥에 얹을 적에, 눈으로 안 보고 살결로 풀개구리 살떨림을 느끼지요.


  즐겁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 온몸 가득 즐거움이 샘솟습니다. 내키지 않는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 온몸 그득 내키지 않아 싫고 짜증스럽고 못마땅한 기운이 솟구칩니다.


  마음을 생각할 적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마음을 살필 적에 삶이 빛납니다. 마음을 아끼고 가꿀 적에 삶이 즐겁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고, 두 다리로 마실을 다니면서 늘 마음을 살펴요. 아침과 낮과 저녁에 언제나 마음을 헤아려요. 마음이 흐뭇할 만한 곳에서 마음이 노래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요.


.. 나는 이 지상의 / 어느 먼 별에 와 있는 것일까 ..  (검은 달, 흰 달)


  조용미 님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2007)을 읽습니다. 시를 하나둘 읽다가 문득 이슬빛을 떠올립니다. 도시에서 살면서도 이슬빛을 느낄 사람은 느낍니다. 시골에서 살면서도 이슬빛을 못 느낄 사람은 못 느낍니다.


  이슬은 어디에나 있어요. 어디에나 있는 이슬을 느낄 사람으 느끼고 못 느낄 사람은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별은 똑같이 뜨고 집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별을 보려는 사람은 언제나 별을 봅니다. 도시에서 고작 별 한두 송이 본다 하더라도 별을 봐요. 시골에서 미리내랑 별똥별까지 보아야 별바라기가 아니에요. 마음으로 담을 애틋한 빛살 하나를 헤아리면 모두 별바라기입니다.


  도시에서도 들풀을 뜯는 사람은 들풀을 뜯고 들꽃을 보지요. 시골에서도 들풀을 안 뜯는 사람은 들풀을 모르고 들꽃을 지나쳐요.


  마음이 있을 때에 마음이 서로 만나요. 마음이 있을 때에 마음에 사랑을 담아요.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눈을 뜨고, 천천히 입을 열며, 시나브로 시를 씁니다.


.. 그가 깊은 산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룡뇽을 살리려고 / 생명을 내놓았다 // … //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룡뇽이 산다 /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 꼬리치레도룡뇽은 겨울잠에 들었다 ..  (도룡뇽 수를 놓다)


  삶이 드러나는 시 한 줄입니다. 삶을 말하는 시 두 줄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시 석 줄이요, 삶을 즐기는 시 넉 줄입니다.


  지율 스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있고, 지율 스님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천성산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저 천성산을 길그림책에서 찾을 수 있고, 천성산으로 몸소 찾아가서 그곳 숲을 누릴 수 있으며, 고속철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만 도룡뇽이 아닙니다. 신갈나무 떡갈나무도 신갈나무 떡갈나무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요, 송사리는 송사리예요. 사람한테는 꼬리치레도룡뇽뿐 아니라 송사리를 죽일 권리나 권한이 없어요. 사람한테는 천연기념물만 돌보라는 권리나 권한이 없어요.


  맹꽁이는 죽여도 될까요. 두꺼비 삶터를 없애도 될까요. 강아지풀 삶터나 씀바귀 밭자락을 밀어 없애도 될까요.


.. 꽃 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 내가 지금 꽃나무 앞에 이토록 오래 서 있는 까닭을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이슬을 읽어요. 깊은 밤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하는 이슬을 읽어요. 이슬을 먹고 자라는 풀잎을 읽고 풀벌레를 읽어요. 이슬을 먹고 자라는 풀잎을 맛나게 뜯어먹는 숱한 숨결을 읽어요. 이슬이 없으면 풀이 없고, 풀이 없으면 사람이 없어요.


  도시에는 풀이 거의 없지만, 도시에 없는 풀을 도시사람은 시골에서 사다 먹지요. 상추이든 배추이든 모두 풀이에요. 쌀이든 보리이든 모두 풀이지요. 돼지도 소도 닭도 모두 풀을 먹고 자랍니다. 풀이 없으면 풀벌레도 없고, 풀짐승도 없어요.


  그런데, 이 도시에는 풀을 없애고 밀어내며 짓밟으려는 사람과 교육과 제도와 정치와 경제만 있습니다. 시골에서도 풀을 아끼거나 사랑하려는 손짓이나 몸짓이나 마음짓이 없습니다. 풀이 없으면 이슬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풀을 없애면 이슬은 어디에 맺혀야 하나요.


.. 뿌옇게 비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비안개는 대숲의 한쪽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다 바람이 몰아치면 소리를 퍼뜨리며 아무렇게나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진박새가 보랏빛 꽃송이가 둥그렇게 피어 있는 수국 속을 포동포동 들락거리고 있다 ..  (두륜산 小記)


  석유도 석탄도 풀 한 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우라늄도 금도 은도 구리도 쇠도 풀 한 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사람도 풀 한 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다시 풀 한 포기가 됩니다. 풀과 나란히 나무가 자랄 적에 아름답습니다. 풀 곁에 나무가 있으면서 다 함께 이슬을 누릴 적에 즐겁습니다.


  이슬을 읽어요. 이슬을 사랑하고 이슬을 노래해요. 이슬을 마시고 이슬을 아껴요. 이슬빛 읽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슬노래 부를 수 있을 적에 바야흐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346.10.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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