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취재 (도서관일기 2013.10.1.)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으로 방송취재를 나온다. 곰팡이 핀 책꽂이를 바꾸고 니스를 바르느라 부산한 만큼, 이래저래 어지럽지만, 얼추 치워 놓는다. 작은아이가 똥을 스스로 다 가릴 줄 안 뒤로 도서관으로 함께 나와서 일할 적에 한결 수월하다. 앞으로 작은아이가 더 크면, 두 아이가 도서관에서 한창 뛰놀다가도 조용히 걸상에 앉아 그림책을 읽겠지. 그러면 이동안 아버지는 더욱 느긋하게 오래도록 도서관 책꽂이를 손질하고 청소도 하겠지.


  둘이 잡기놀이를 하더니, 어느새 조용하다. 큰아이는 만화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읽는다. 작은아이는 바퀴인형을 들고 책꽂이 사이를 누비는 기차놀이를 한다. 방송국 피디한테서 전화가 온다. 마을회관 앞에 왔단다. 마을회관 앞으로 가서 도서관으로 함께 돌아온다. 한국방송에서 〈스카우트〉라는 이름으로 푸름이들 나오는 풀그림을 찍는다고 한다. 올 한글날에 맞추어 한글과컴퓨터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 푸름이 넷이 저마다 다른 솜씨를 뽐내며 겨룬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으로 찾아온 푸름이는 열아홉 살 아이. ‘순 우리 말 가로세로 낱말풀이 게임’을 만든다고 한다.


  재미있게 만들면 되지. ‘순 우리 말’이라고 하지만, 너희가 학교를 다니며 ‘순 우리 말’을 배운 적 있을까? 없을 테지. ‘순 우리 말’ 아닌 ‘우리 말’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걸. 교과서를 들여다보자. 어디 우리 말다운 우리 말이 있디? 낱말은 낱말대로 엉터리이고, 낱말을 엮는 글월도 글월대로 엉터리이다. 낱말을 놓고 일본 한자말이니 영어이니 하고 나무라면서 다듬느라 사람들이 퍽 애쓰지만, 정작 일본 말투나 영어 번역투에서 홀가분한 사람이 아주 드물다. 국어학자도 한글학자도 전문가도 모두 똑같다. 얼마 앞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꾸짖는 책이 새로 나왔는데, 이 책을 쓰신 분도 ‘일본 말투’와 ‘영어 번역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글월을 엮을 적에 올바르며 알맞고 아름답게 한국말다운 말투가 되지 못하면서, 낱말에만 눈길을 두어서 무엇이 될까.


  말은 ‘낱말’이 아니라 ‘말’인 줄 알아야 하는데, 방송 풀그림에 나오는 이 푸름이는 이 대목을 얼마나 짚을 수 있을까.


  가로세로 낱말풀이를 만든다 할 적에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로만 만들면 쉬 벽에 부딪힌다. ‘국어사전에 없는 말’을 새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몇 가지 보기를 알려주었다.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들에서 새잡이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집에서 파리를 잡고 모기를 잡아요. 그러니까 ‘파리잡이’에 ‘모기잡이’예요. 국어사전에는 이런 낱말 안 나오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늘 이런 ‘잡이’를 한단 말이지요. ‘내 밥을 몰래 핥아 먹으려 하는 벌레를 잡는 일’이라고 문제를 내면 재미있어요. 저 하늘에 뜬 구름 보았지요? 저 구름 어때요? 무슨 빛 같아요? ‘구름빛’ 아니고는 나타낼 길이 없겠지요? 구름은 하얀 구름도 있고 잿빛 구름도 있는데, 사람들은 흔히 하얀 구름만 생각해요. 그렇겠지요? 그러면, ‘파랗게 빛나는 하늘에 하얗게 물드는 빛’이라는 문제를 낼 수 있어요. 정답은? ‘구름빛’이에요. 생각하는 힘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생각하는 힘 키우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못 맞추겠지요.”


  요새는 도시 아이가 되든 시골 아이가 되든 ‘풀’이 왜 풀인 줄 알지 못하고, ‘푸르다’라는 낱말이 왜 ‘푸르다’인 줄 알지 못한다. ‘노랗다·누렇다·파랗다·빨갛다’가 어떻게 태어난 낱말인 줄 생각하거나 깨닫는 사람도 드물다. 이런 말뿌리를 알려주어도 못 믿는 사람도 많다.


  방송국 피디가 오기 앞서 방송작가가 전화를 먼저 걸었는데,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 묻더라. 아파트인지 빌라인지 뭐 그런 걸 묻더라. 피식 웃었다. 요새는 읍내나 면소재지에도 아파트나 빌라가 서기도 하지만, 우리 집은 시골인데. 도시가 아닌데. “저희 집은 그냥 시골집입니다.” 하고 말하면서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참말 시골을 모를까? 시골은 생각한 적 없을까? 흙과 돌과 나무로 지은 시골집이 아직도 시골에 있는 줄 모를까? 바닥과 벽을 시멘트로 새로 발랐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시골마을 시골집은 뼈대와 속살은 온통 나무와 흙과 돌이다. 시골을 하나도 모르는 도시사람이 방송을 찍고 신문을 엮을 텐데, 이러다 보니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온통 도시 이야기만 흐른다. 가끔 시골로 무언가 취재하러 나오더라도 시골빛을 제대로 모르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으니 뚱딴지 같은 말을 하기 일쑤이다. 하기는. ‘쌀’과 ‘벼’를 가리는 사람은 흙일꾼 아니고는 없다 할 만하고, ‘겨’가 무엇이요 ‘짚’이 무엇인 줄 가리는 사람도 흙일꾼 아니고는 이제 없지 않겠나. 학교에서도 안 가르치고 교과서에도 안 나올 테며 수학능력시험에도 이런 이야기는 안 물을 테니까. (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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