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20. 어머니가 가르치는 말
― ‘어머니젖’ 먹고 ‘어머니말’ 쓴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고루 받으며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보지 못해요. 오직 어머니가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몸속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며 자라는 아이는 모든 말을 듣습니다. 어머니 몸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듣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크기요 숨결인 채 어머니 몸속에서 귀를 쫑긋 기울입니다. ‘나(몸속 숨결)’를 낳으려는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랑을 나누며 얼마나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먹는 밥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먹는 밥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마시는 바람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마시는 바람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바라보는 모습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예부터, 아이를 밴 어버이는 아무 데에서나 살지 않게끔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가장 아름다운 밥을 먹도록 이끌었습니다. 공장 굴뚝이 무시무시하거나, 자동차 물결이 어지럽거나, 흙땅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데에서 몸속 숨결을 돌보도록 하던 옛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함부로 낳지도 않았어요. 숲이 싱그러이 마을을 보듬는 시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를 낳도록 한 옛사람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바르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터전에서 슬기롭게 배우기를 바라는 어머니라면, 아무 곳에서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게 살 만한 마을을 찾고, 더없이 깨끗하게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바람을 들이킬 자리를 찾습니다. 어버이가 느끼기에 가장 아름답다 싶은 곳에 오순도순 지낼 만한 보금자리를 일구어요.


  오늘날에는 이 같은 ‘보금자리’를 가꾸려 하기보다는, 아이가 커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에 척척 붙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학군’을 찾는 흐름입니다. 이 또한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라면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 되겠으나, 어버이와 아이는 날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살짝 궁금해요. 어버이와 아이는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볼까요? 더 낫다 하는 학군을 찾는 어버이는 이녁과 아이 모두한테 안 즐겁고 안 아름다우며 안 사랑스러운 삶으로 뒷걸음질 하는 셈 아닐까요?

 

  성평등이 많이 이루어진 요즈음이라 하지만, 요즈음에도 집일을 나누어 맡는 아버지가 몹시 드뭅니다. 아기가 태어난 뒤, 어머니와 함께 육아휴직을 해서 갓난쟁이를 함께 돌보려는 아버지란 아주 드뭅니다. 집식구 먹여살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있되, 갓난쟁이가 ‘어머니 손길과 사랑’뿐 아니라 ‘아버지 손길과 사랑’을 나란히 받으면서 자랄 적에 싱그럽고 튼튼하며 아름다이 자라는 줄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머니 혼자 낳을 수 없는 아이이듯, 어머니 혼자 돌보거나 키울 수 없는 아이입니다.

 

  지난날에는 가부장제도 굳세게 있는 바람에, 퍽 오래도록 ‘아이키우기’를 어머니가 도맡았습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옛조선이나 고구려나 백제 적에는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고려 적까지도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조선으로 넘어오며 사내는 부엌에 얼씬조차 못하게 하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치는 모든 몫을 어머니가 맡았지 싶어요. 아이가 커서 글을 익힐 무렵이면 아버지가 나서서 무언가 가르치기도 했을 테지만, 갓난쟁이 적부터 열 살 언저리까지 오직 어머니 혼자 아이를 돌보며 ‘말을 가르친’ 우리 사회였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지난날 어머니는 어떤 삶을 누리며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삶을 보여주었을까요. 다 함께 생각해 봐요. 지난날에는 가시내가 서당에 다니기 몹시 어려웠고,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가시내한테 섣불리 글을 안 가르쳤어요. 한문은 더더구나 안 가르쳤지요. 양반 집안이나 임금 집안이나 사대부 집안이 아닌, 흙을 일구는 여느 집안에서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한문을 몰랐습니다. 고구려나 고려나 조선 적에는 ‘흙을 일구는 사람(농사꾼)’이 99%는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문은 모르는 채’ 살았고, 거의 모든 한겨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겨레말(한국말, 우리 말)만 쓰면서 살림을 꾸리고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도맡아 돌볼 적에는 한문이 아닌 겨레말로 돌보며 ‘말을 가르쳤’겠지요.


  지식인이나 임금님 가운데 한글(훈민정음)로 책을 써서 널리 남긴 이는 매우 드물지만, 겨레말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밑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글로 남은 한글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 머리와 마음과 몸에는 ‘기나긴 나날 한겨레가 이은 말삶’이 배었어요.


  부엌일을 하고 밭일을 하며 논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장작을 패고 군불을 때며 길쌈과 물레질과 베틀질과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빨래를 하고 다리미질을 하며 방아질과 절구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온갖 집안 손질 다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하루 내내 새벽부터 밤까지 쉴 겨를 없이 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늘 일에 치이며 허리 펼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에 시달리는 어머니들 누구나 언제나 노래를 부릅니다. 이른바 ‘일노래(노동요)’입니다. 저녁에 바느질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무릎맡에 누이고는 조곤조곤 ‘이야기(옛이야기, 전래동화)’를 들려줍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바로 이런 어머니들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들으면서 자란 어머니가 낳은 숨결입니다.


  현대 물질문명 사회라 하는 2000년대예요. 인터넷과 컴퓨터가 발돋움한 요즈음이에요. 수많은 기계가 있고, 텔레비전과 손전화가 춤추어요. 더 새로운 물질과 문명은 겨레말(한국말)로 나타내거나 가리키지 않아요. 거의 다 영어로 가리키거나 한자말로 옮겨요.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까지 영어노래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언제나 어머니한테서 가장 맑고 아름다우며 따사로운 말을 듣습니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어쩌면, 갓난쟁이한테 “아이 러브 유.” 하고 말할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머니들 누구나 아이 볼을 어루만지며 “사랑해.“ 하고 말합니다. ‘맘마’와 ‘엄마’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가장 쉽고 정갈하며 재미난 겨레말을 하나씩 둘씩 알려줍니다. 아이들은 밥, 옷, 집, 아버지, 동무, 동생, 오빠, 누나, 하늘, 물, 숟가락, 그릇, 마루, 흙, 풀, 나무, 꽃, 바람, 낮, 밤, 아침, 저녁, 노래, 얼굴, 손, 발, ……과 같이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겨레말을 차근차근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이 말들이 바탕이 되어 아이들은 말문을 트고 마음문을 열며 생각문을 펼칩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나 똑같아요.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말을 살찌우며 북돋우는 책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4346.10.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