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책읽기

 


  전남 고흥으로 찾아와 방송을 찍으려는 피디가 나한테 ‘반바지’ 말고 ‘긴바지’를 입을 수 없느냐고 묻는다. 방송을 찍는 동안만 긴바지를 입어 달라고 말한다. 나는 여느 때처럼 민소매를 입고 싶었지만, 민소매옷 가운데 한글 새겨진 옷은 없어 일부러 반소매옷을 입었지만, 10월 1일 가을철에도 몹시 더운 고흥에서 긴바지를 입을 수는 없다.


  반바지를 입고는 방송을 찍을 수 없을까? 내가 몸매 잘 빠진 아가씨가 아니기는 하지만, 텔레비전을 켜면 팬티와 거의 똑같은 옷을 입은 아가씨들 잔뜩 나오고, 속옷이 보일락 말락 깡똥한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러고 보면, 2004년에 국립국어원에서 한글문화학교 강사를 할 적에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으로 강의를 한 나를 국립국어원 공무원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강의 부탁이 와서 강의하러 갈 적에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으로 자전거를 달려 땀내 물씬 풍기며 찾아가면 하나같이 못마땅해 하거나 싫은 낯빛을 한다. 그러면, 이들 얼굴을 생각해서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땀이 후줄근하게 쏟는 몸으로 강의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강의를 할 환경이 되어 강의를 해야지, 겉모습을 차려서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반바지 차림을 긴바지로 바꾸어야 한다면,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리가 있는 척 가짜 다리를 붙이고, 팔이 있는 척 가짜 팔을 붙여야 하는가.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은 가짜 머리카락을 붙여야 하나.


  언젠가 고위공무원이란 분들 잔뜩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하던 날, 그분들이 하도 내 차림새를 놓고 시끌벅적하기에 “여러분, 저한테 강의를 부탁했다면 그만큼 저한테 들을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지, 제 옷차림을 비평하거나 평가하려는 뜻이 아니겠지요. 자, 모두 눈을 감아 보셔요.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만 마음을 기울여 보셔요. 제 옷차림이 보이나요? 제 수염이나 긴머리가 보이나요? 제가 타고 온 자전거가 보이나요?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무엇을 듣고 느끼시나요?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이야기에 담긴 알맹이를 헤아려야지, 겉모습 반지르르한 껍데기에 얽매이거나 홀리면 안 돼요.” 하고 말한 적 있다.


  무엇을 읽는 책인가. 왜 읽는 책인가. 디자인과 편집을 후줄근하게 하거나 엉성하게 한다면 책이 딱하다 하리라. 그런데, 디자인과 편집은 훌륭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책이라면? 이야기가 없는 책이라면?


  나는 내 차림새를 ‘좋다거나 싫다거나’ 말할 생각이 없다. 시골 흙지기는 흙을 만지면서 맨발로 일하고 옷과 몸은 온통 흙투성이에 흙내음 풍긴다. 시골 흙지기한테서 숲과 들과 풀과 시골 이야기를 듣자면, 흙내음 풍기는 시골자락에서 함께 흙을 만지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면서 아이들과 복닥이고 아이들 똥오줌 만지며 집살림 꾸리는 하루를 쪼개어 한국말 빛내는 길 찾으려 하는 아저씨한테서 이야기를 듣자면, 이러한 내 삶에 걸맞는 모습으로 찾아가서 펼치는 이야기를 들어야 옳으리라.


  디자인과 편집 훌륭한 책이지만 김치국물 묻어도 똑같은 책이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스레 책에 그림을 그려도 똑같은 책이다. 잘못해서 물을 쏟아 젖어도 똑같은 책이다. 책 알맹이는 사라지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 4346.10.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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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02 10:51   좋아요 0 | URL
참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글이네요. '자루 속에 넣은 고양이를 자루만 보고 사지 않는다', '셔츠 바람으로 나오라'고 말했던 몽테뉴가 (짐짓 열 받은 듯한 모습으로) 길게 써놓은 글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ㅎㅎ

* * *

평가의 잣대

사람들의 정신과 정신 사이에는 땅에서 하늘까지만큼 헤아릴 수 없는 층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평가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들 말고는 어느 사물이건 그 자체의 소질만으로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말 한 필을 두고, 그 힘차고 숙달된 것을 칭찬하는 것이며, 그 안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사냥개는 그의 속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지 목띠를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한 인간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것을 보아서 평가하지 않는가? 그는 따르는 사람이 많고 훌륭한 궁전을 가졌고 신용이 있고 연수입이 많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주위에 있다.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루 속에 넣은 고양이를 자루만 보고 사지 않는다. 말을 흥정할 때는 그 장비를 벗기고 맨몸을 드러내서 보며, 또는 옛날에 왕공들에게 팔려고 내놓을 때에 하듯 말을 덮어씌워 놓은 때에는 좀 필요성이 적은 부분을 덮으며, 털이 곱다든가 엉덩이가 크다든가에 현혹되지 않고, 주로 가장 유용한 부분인 다리와 눈과 발을 유의해 본다.

어째서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대는 싸잡아 묶어 놓고 평가하는가? 그는 자기 것이 아닌 부분밖에는 내보이지 않으며, 그를 진실로 평가하며 판단할 자료가 되는 부분은 감춰 두고 있다. 칼의 가치를 보아야 할 일이지 칼집은 볼 것이 못 된다. 그것을 벗기고 보면 아마도 한 푼이라도 주기가 아까워질 것이다. 그 자체로 평가해야지 그 장식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옛 사람이 아주 재미나게 말하듯 "당신은 그의 키가 어째서 커 보이는지 아시오? 당신은 그 신발의 높이를 계산에 넣으시오"라는 식이다.

받침돌은 조각이 아니다. 말놀이용 대막대는 제쳐놓고 재어 보라. 부귀와 명예는 제쳐놓고 셔츠 바람으로 나오게 하라. 그가 경쾌하고 건강하여 직무에 적합한 신체를 가졌는가? 그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이 건전하며 그 모든 부분이 유능하고 잘 하게 보이는가? 그 마음이 자기 것으로 풍부한가? 또는 남의 것으로 풍부한가? 요행으로 얻은 것은 없는가? 뽑아든 칼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있는가? 입으로건 목으로건 어디로 생명이 달아나도 꼼짝도 않는지, 마음이 침착하고 공평하고 만족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며, 이런 것으로 우리들 사이에 있는 극도로 많은 차이를 판단해야 한다.
- 몽테뉴,『수상록』 중에서

숲노래 2013-10-02 18:59   좋아요 0 | URL
옮겨 주신 글 고맙습니다.
oren 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하나둘 늘어나면서
모두들
슬기롭고 아름다운 넋 되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