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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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269

 


착하게 어깨동무하고 싶다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바리타 글
 킴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길찾기 펴냄, 2013.7.10. 14000원

 


  2013년 여름, 전남 고흥에는 비가 거의 안 내렸습니다. 여름이 저물고 가을로 접어든 뒤로도 비는 좀처럼 안 내렸습니다. 구월이 저물고 시월로 넘어서려는 길목이 되니, 비로소 빗줄기가 듣습니다. 빗방울이 고흥 들과 숲과 마을 촉촉히 적시기 앞서 자전거마실을 하다가, 자전거마실 마칠 무렵 비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니, 아이들도 맨몸으로 비를 맞습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맨몸에 맨발로 마당을 뛰고 달리면서 비를 맞으며 놉니다. 한창 달리고 뛰다가 우뚝 멈추어서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젖힙니다. 옳거니, 빗물먹기를 하는구나.


  아이한테 빗물먹기를 가르치거나 보여준 적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느껴 이렇게 빗물먹기를 즐깁니다. 손을 뻗어 비를 받고, 두 팔을 벌리며 비를 맞습니다. 얘야, 시원하지? 그래, 풀도 나무도 흙도 모두 이 비를 시원하게 기다린단다. 풀과 나무는 바로 이 빗물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큰단다. 가문 날에 사람들이 아무리 물을 대거나 뿌리더라도 풀과 나무는 무럭무럭 크지 못해. 사람들이 따로 챙겨서 주는 물로는 풀과 나무 모두 목마름만 가실 뿐이야. 이렇게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져야 비로소 풀과 나무는 실컷 빗물을 들이켜면서 씩씩하게 큰단다.


-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랬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분 안에 있었으므로. 나는 언제나 아버지 안에 있었다.’ (7쪽)
-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자살했다고. 그리고 또한, 그분의 추락이 몇 초밖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90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9쪽)

 


  풀과 나무는 빗물을 먹으며 자랍니다. 드넓은 논에서 자라는 나락도 빗물을 먹으며 자랍니다. 논에 수도물 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 가물면 수도물이라도 주려 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먼먼 옛날부터 논이고 밭이고 모두 빗물로 돌봅니다.


  비가 와야 골짜기에 물이 넘칩니다. 비가 와야 땅밑물도 우물물도 한결 싱그럽습니다. 비가 와야 냇물이 조르랑조르랑 노래하면서 흐릅니다. 멧짐승과 들짐승도 비가 올 적에 숨을 쉽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문화와 문명은 빗물을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교통 걱정부터 합니다. 비가 와야 숲과 들이 살고, 내와 바다가 맑게 빛나는데, 비가 어떤 숨결인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학교에서 빗물을 옳게 가르치는 법이 없습니다. 빗물이 무엇이요 빗물이 무엇을 살찌우는가 하는 이야기는 대학입시에 안 나옵니다. 대학교 학자는 알까요? 대통령은 알까요? 시장이나 군수는 알까요? 의사나 간호사는 알까요?


  알맞게 내리는 비는 흙을 알맞게 적십니다. 알맞게 젖은 흙은 알맞게 숨쉽니다. 알맞게 숨쉬며 기름진 흙에서 푸성귀와 풀이 나란히 자랍니다. 배추도 무도, 씀바귀도 쑥도, 같은 흙에서 같은 빗물과 바람을 마시면서 자랍니다.


  사람들은 논에서 나락만 거두고, 밭에서 몇 가지 푸성귀만 키우는데, 논밭 아닌 들에서 숱한 나물을 얻는 삶을 오랜 옛날부터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락과 푸성귀 몇 가지로는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쌀밥과 김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쌀밥과 김치를 먹더라도, 들에서 스스로 돋고 스스로 꽃피워 씨를 맺는 ‘들풀’인 ‘나물’을 함께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이 마을에서는 내게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대화로 하려 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 나는 머지않아 도시와 시골이 어떤 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도 허리는 늘 아팠기 때문이다.’ (20∼21쪽)
- ‘군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청소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군에 어울리지 않으며, 이곳에 들어온 게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군대가 너희들을 이렇게 진정한 사나이로 만들어 놓았다! 네놈들의 여자친구는 너희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데리고 오도록!” (40쪽)

 

 


  요즈음 사람들이 아는 ‘나물’은 몇 가지쯤 될까요. 그러니까, 요즈음 사람들이 아는 ‘풀’은 몇 가지나 있을까요.


  나물이란 풀입니다. 사람이 먹는 풀을 가리켜 ‘나물’이라고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 몸을 망가뜨리거나 다치게 하는 풀은 따로 없습니다. 들짐승과 숲짐승 몸을 무너뜨리거나 아프게 하는 풀 또한 따로 없습니다.


  소나 염소나 토끼를 들이나 숲에 풀어 놓으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소나 염소나 토끼가 ‘가리며 안 먹는’ 풀은 없습니다. ‘덜 좋아하거나 즐기는’ 풀은 있되, 모든 풀을 샅샅이 촘촘히 꼼꼼히 먹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백초 효소’를 말하기는 하는데, 예부터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온갖 풀을 몽땅’ 먹었어요.


  풀마다 맛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풀마다 다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 시골사람이 스스로 먼먼 옛날부터 붙여 가리킨 풀이름을 가만히 떠올려요. 흔히 일컫는 ‘독풀’이란 몸 어딘가 아픈 사람한테 쓰는 ‘약풀’입니다. 곧, 이런 ‘독풀·약풀’은 몸이 안 아픈 사람이 먹을 까닭이 없어요. 그렇지만, 여느 풀을 뜯으며 이런 풀 몇 가지 조금씩 섞어서 함께 먹으면 몸을 미리 다스리는 셈이 됩니다.

  풀맛을 잊을 때에 밥맛을 잊습니다. 풀마다 다른 맛과 내음과 이야기를 잃을 적에 삶맛을 잃습니다. 들과 숲에서 자라는 풀을 몽땅 베어 없애거나 농약을 뿌려 태워 죽이면,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길로 나아가는 셈입니다.


- “땅 때문에 싸우고, 사상 때문에 싸우고, 시골에서도 싸우고, 도시에서도. 전 잘 모르겠어요. 혁명보다는 착한 화합이 좋아요.” (42쪽)
- ‘나는 군용 차량의 연료를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보다 절실히 보급이 필요한 이들은 따로 있었다.’ (73쪽)

 


  안토니오 알바리타 님이 쓴 글에 킴 님이 그림을 붙인 만화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길찾기,2013)을 읽습니다. 1900년대에서 2000년대로 접어드는 에스파냐(스페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입니다. ‘가난을 수수하게 누리며 어깨동무하던 시골사람’이 아닌 ‘가난에 찌들려 이웃 땅뙈기를 악착같이 빼앗으려 애쓴 시골사람’ 집안에서 태어나, 전쟁과 독재와 기회주의와 정치·관료·종교주의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삶빛을 차츰 잃는 사람이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대청마루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빗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서 아이들 재우고 나서 만화책을 읽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빚은 낱말이 ‘어깨동무’입니다. 옛날부터 가멸찬 이들은 어깨동무를 하지 않았어요. 가멸찬 살림이니 혼자 지내도 어려울 일 없습니다. 모자라거나 없거나 힘겨운 사람들이 서로 돕고 아끼면서 저절로 ‘어깨동무’가 태어났습니다.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은 모두 가난한 시골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일군 땀방울입니다.


  그런데, 정치·관료·종교주의는 이들 가난한 시골사람이 어깨동무를 못 하도록 가로막습니다. 가난한 시골사람을 들볶으며 전쟁과 독재가 불거집니다. 들볶이고 시달린 가녀린 시골사람은 가난에 지치고 스러지면서 악착스레 슬픈 다툼을 벌입니다.


- “시체를 토레로 묘지로 가져가. 그곳에는 나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고 있지. 짐칸을 그쪽으로 갖다 대면, 시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그 구덩이에 쌓이고 쌓인다고! 내가 그곳을 떠날 때가 되면 시체로 구덩이가 거의 다 메워지지. 이 일을 그 후레자식들은 ‘쓰레기 수거’라고 부르는 거야. 나는 두려워. 후회되고,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내가 하고 있는 이 짓을 말이야.” ‘삼촌은 더 이상 저녁모임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분의 고백 이후 우리도 말이 없어졌다.’ (46쪽)
- ‘바르셀로나는 휴가병들의 도시였다. 군인들은 전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약간의 즐길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자들과 기회주의적인 자들도 있었다. 마리아노 씨는 그들에게 서슴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60쪽)

 

 


  바보스러운 악착스러움은 도시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새치기를 하고 훔치기를 합니다. 돈을 더 벌려고 사람들은 도시에서 서로 툭탁거리며 다툽니다. 싸우고 등지고 따돌립니다.


  왜 도시에서는 어깨동무가 이루어지지 못할까요. 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깨동무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품앗이도 두레도, 왜 도시사람 스스로 일구면서 빛내려 하지 않는가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면허증은 아무것이 아닙니다. 혼자서만 뽐낼 어떤 종이조각이 아닌, 함께 살아갈 길을 찾으면서 열 노릇입니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즐거이 가르칠 노릇이요, 모자란 사람한테는 즐거이 나누어 줄 노릇이며, 힘든 사람한테는 즐거이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를 할 노릇입니다.


- ‘봄이 왔다. 덕분에 먹거리가 조금 개선됐다. 몇몇 사람들은 (수용소)캠프에서의 비참한 삶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군에서는 남성·여성, 그리고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위생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사실은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뿌리뽑기 위해서였다.’ (79쪽)
- “지식인들은 멋들어지게 글은 쓰면서, 정작 행동해야 할 땐 꽁무니를 뺀단 말야. 나는 그러지 않았어. 그들처럼 책상이나 대중 뒤에 숨지 않고 앞장서서 싸웠지. 수용소에서 지식인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어. 농촌 노동에 나간 것도 하루 빨리 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어.” (86쪽)

 


  만화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책이름부터 ‘아나키스트’를 밝히지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착한 화합(42쪽)”을 바랍니다.


  ‘화합(和合)’은 ‘화목하게 어울림’을 가리키고, ‘화목(和睦)’은 ‘서로 뜻이 맞고 살가움’을 가리킵니다. 한국말로 풀어내자면 “착한 어깨동무”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먹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고, 함께 꿈꾸는 삶일 때에 비로소 “착한 어깨동무”입니다. 몇몇 사람만 혼자 차지하는 일자리 아닌, 서로 나누어 함께 하는 일자리입니다. 몇몇 사람만 잔뜩 움켜쥐는 돈 아닌, 서로 나누어 함께 쓰는 돈입니다.


- ‘변절한 사람은 루시오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135쪽)

 


  햇볕은 온누리를 골골샅샅 따사롭고 환하게 보듬습니다. 빗물은 온누리를 골골샅샅 싱그럽고 시원하게 적십니다. 바람은 온누리를 골골샅샅 밝고 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햇볕과 같고 빗물과 같으며 바람과 같은 사랑이어야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햇볕과 빗물과 바람 같은 삶을 누려야 즐겁습니다.


  시골사람은 흙과 풀과 나무를 다 함께 살리고 살찌우는 길을 걸어야겠지요. 도시사람은 수많은 이웃과 동무를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길을 걸어야겠지요.


  양로원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복지시설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행정기관이나 정치기구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운동장이나 경기장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관광지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도 늙은이도 마을에서 사랑받으며 삶을 누릴 때에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마을에서 사람들 누구나 잔치를 벌이며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에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전문 지식 한두 가지만 파고들어 학위를 거머쥘 노릇이 아니라, 마을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흙과 숲과 들과 내를 푸르게 돌보는 길을 걸어갈 때에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양로원 건물 꼭대기에 훌쩍 뛰어내려 스스로 새가 된 늙은 할배는 흙으로 돌아가 아름답고 즐거운 새누리를 환하게 웃고 씩씩하게 땀흘리며 일구리라 생각합니다. 4346.9.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만화책 즐겨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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