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그림책·어린이책

 


  만화책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만화책을 모르니, 만화책을 읽으며 어떤 빛을 누리는지도 모른다. 그림책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림책을 모르니, 그림책을 읽으며 어떤 꿈을 누리는지도 모른다. 어린이책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린이책을 모르니, 어린이책을 읽으며 어떤 사랑을 누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만화책이나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아는가?


  나는 이 책들을 ‘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늘 가까이하면서 즐길 뿐이다. 김수정·이진주 만화를 즐기고 누리면서 다카하시 루미코·데즈카 오사무를 천천히 알아보면서 함께 즐긴다. 윌리엄 스타이그·바바라 쿠니를 즐기고 누리면서 이우경·강우근을 찬찬히 알아보면서 나란히 즐긴다. 이원수·권정생을 즐기고 누리면서 임길택·이오덕을 시나브로 알아보면서 다 같이 즐긴다.


  사람들은 흔히 ‘인문책’을 말하곤 하지만, 역사나 정치나 사회나 교육이나 철학이나 예술을 글감으로 삼아 학술논문이나 대학교 보고서처럼 쓰는 책이 ‘인문책’이 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학술논문은 학술논문이고, 대학교 보고서는 대학교 보고서이다. 학자들끼리 쓰는 딱딱한 ‘이중언어 한자말’로는 인문책을 쓸 수 없다. 이런 ‘이중언어 한자말’은 만화책이나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에는 하나도 안 나타난다. 오직 ‘인문책’ 이름표 붙는 책에 드러난다. 대학교나 학계에 깃을 둔 이들은 왜 ‘집에서 살림 꾸리고 아이 돌보는 여느 사람들’ 말씨로는 인문학 이야기를 펼치지 못할까. 왜 ‘지식 언어’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말’하고 끝없이 엇나가면서 자꾸자꾸 더 딱딱해지고 한국말다움이 사라져야 하는가.


  ‘인문’이란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는 ‘역사·정치·사회·교육·철학·예술’이라는 틀로 가두지 못한다. ‘종교·문화·경제’라는 틀로도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는 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에는 역사를 비롯해 경제까지 고스란히 깃든다. 학자들 논문이 인문책이라기보다, 살림꾼 가계부가 인문책이라고 느낀다. 살림꾼 가계부를 읽으면, 사회 흐름과 경제 속내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와 철학까지 예술스럽게 드러난다. 또한, 이오덕 님이 1950∼70년대에 멧골자락 조그마한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며 아이들 스스로 이녁 삶을 수수하게 글로 쓰도록 이끈 ‘어린이 글’을 읽으면, 이 짧고 수수하며 투박한 글에 모든 정치와 역사와 철학이 곱게 어우러지면서 드러난다.


  만화책이란 무엇일까. 그래, 만화책이란 만화라는 그릇을 빌어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빛’이리라. 그림책이란 무엇일까. 그래, 그림책이란 그림이라는 그릇을 빌어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꿈’이리라. 어린이책이란 무엇일까. 그래, 어린이책이란 어린이 눈높이에 글쓴이 눈높이를 맞추어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랑’이리라. 나는 오늘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만화책과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읽는다. 4346.9.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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