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3.8.28.
 : 별학산 넘기

 


- 여름이 저문다. 올 한 해 여름비 거의 없이 땡볕만 가득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더위가 차츰 식으며 가을이 다가온다. 제아무리 모진 더위라 하더라도 시원스런 바람과 함께 겨울이 식힐 테고, 제아무리 드센 추위라 하더라도 따스한 바람과 함께 봄이 어루만져 주겠지. 더위가 한풀 꺾이는구나 싶어, 모처럼 퍽 멀리까지 자전거마실을 할까 하고 생각한다.

 

- 마을마다 콩을 터느라 부산하다. 자동차 뜸한 마을이면 찻길에 길게 콩포기를 펼친다. 펼친 콩포기는 할아버지가 경운기로 밟아 털고, 할머니가 방망이를 두들기며 마무리짓는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할매 할배 곁을 지나갈 적에 큰아이가 꼬박꼬박 “할머니 안녕하셔요!” “할아버지 안녕하셔요!” 하고 외친다.

 

- 자전거를 몰며 나들이를 나오자마자 큰아이는 새근새근 잔다. 작은아이한테 자전거마실은 낮잠 누리는 마실이다. 큰아이도 제법 졸릴 텐데 졸음을 참으며 함께 잘 달린다. 도화면 서오치를 지나고, 처음 마주하는 오르막을 땀 빼며 오른다. 면소재지 언저리 길가에 심은 감나무는 키가 작다. 감을 따기 좋도록 키가 안 자라게 가지치기를 한 탓일 테지. 그런데, 감을 딸 적에는 따더라도 이 길에 그늘을 누릴 수 있도록 키가 좀 크도록 하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한다. 그늘이 없는 길은 걷기에 몹시 힘들다.

 

- 길에 그늘이 드리우자면,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야 하는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자면 찻길을 따라 전봇대가 없어야 한다. 전봇대가 있더라도, 나뭇가지를 함부로 안 자르면 된다. 나무가 높이높이 자라 전봇대 키를 껑충 넘으면 전깃줄이 나뭇가지에 걸리느니 어쩌느니 걱정할 일이 없다. 걱정해야 한다면, 전봇대와 전깃줄 때문에 나무가 아파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해야 옳다고 느낀다.

 

- 지등마을 지나고 이목동마을 가까이 닿을 무렵, 길가에서 새 주검 하나 본다. 자전거로 슥 지나치다가 빙 돌다. 새 주검한테 다가선다. 큰아이가 묻는다. “아버지 왜요?” “응, 저기 새가 죽었어.” “새가? 정말? 왜 죽었어?” “아마, 차에 치여 죽었겠지.” 자전거를 세운다. 참깨꽃 하나둘 지며 열매를 맺는 길가에서 가녀린 새 주검을 손에 쥔다. “나도 보여줘.” “제비야, 너는 다음에 꽃으로 태어나렴. 꽃으로 태어나면 너를 치여 죽일 사람은 없겠지.” 마을 어르신들은 찻길 가장자리까지 참깨를 심거나 콩을 심는다. 제비 주검을 누일 마땅한 자리가 딱히 안 보인다. 한참 여기저기 헤맨 끝에 빈 풀섶 조그마한 자리를 찾는다.

 

- 황촌마을 지난다. 여의촌마을과 강동마을 지날 무렵 우체국 일꾼을 만난다. 오토바이를 몰며 편지를 나르는 우체국 일꾼하고 큰아이하고 몇 마디 주고받는다. 샛자전거에 탄 큰아이는 누구라도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예쁜가.

 

- 남당마을 앞 너른 마당은 콩을 터는 할매와 할배로 부산하다. 바닷마을 콩밭에서 자란 콩은 바닷바람과 바닷내음 물씬 들이켰겠지. 햇볕과 바람과 빗물뿐 아니라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까지 새록새록 담았겠지.

 

- 풍남항에 닿다. 풍남초등학교 옆에 있는 영월수퍼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 아이들한테 얼음과자 하나씩 사 준다. 작은아이도 이제 낮잠에서 깬다. 잘 잤지? 이제 우리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별학산을 넘자꾸나. 우리가 이 자전거로 비봉산 기슭과 천등산 기슭과 마복산 기슭을 넘었잖아. 오늘은 별학산 기슭을 따라 넘어가 보자고.

 

- 영호마을에 닿을 즈음, 큰아이가 “아버지, 저기 바닥에 뭐야?” 하고 묻는다. “뭐? 아, 그거? 우리 집에도 많잖아. 생각 안 나?” 자전거를 세운다. “자, 내려서 들여다봐.” “뭐지?” “후박 열매야. 먹어 봐.” 멧새들 많다면 이 후박 열매 먹느라 바쁠 텐데, 마을마다 하도 농약을 쳐대니 새들이 살아날 길이 없다. 올해에는 지난해와 견줘 새를 드물게 만난다. 새가 곡식이나 씨앗을 쪼아먹는다고 하는데, 새들이 먹이가 사라지니 자꾸 쪼아먹는다. 새가 있어야 벌레와 나방도 잡아먹고, 이렇게 널브러진 후박 열매를 비롯해 숲나무 열매를 먹을 텐데, 새가 자꾸 자취를 감추며 농약에 살충제에 온통 화학약품 범벅이 된다. 새가 노래하지 않는 곳을 시골이라 할 수 있을까. 새가 날갯짓하지 않는 데를 숲이라 할 수 있을까. 새는 죄 사라지고 사람만 남는 데에서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 영호마을 어귀에 있는 우체통 빨간 빛이 도드라진다. 저 우체통은 앞으로 언제까지 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시골마을에서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할매나 할배는 몇 분이나 있을까. 요새는 편지 아닌 손전화로 안부 인사를 나눌 테니, 참말 시골마을 우체통은 머잖아 모두 사라지리라 느낀다.

 

- 저 멀리 천등마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냉정마을 어귀를 오른다. 이제부터 오르막이다. 가쁜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자전거 발판을 밟는다. 첫가을 언저리이지만 한낮 햇볕은 뜨겁다. 한여름처럼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지 않으니, 멧기슭 타고 달리는 자전거는 이렁저렁 나무그늘을 누린다. 나무그늘 없는 길을 달릴 적하고 나무그늘 있는 길 달릴 적은 사뭇 다르다. 건물이 드리우는 그늘은 그다지 안 시원하다. 나무는 조그마한 나무라 하더라도 그늘이 참 시원하다.

 

- 오리나무숲을 실컷 느끼며 별학산을 넘는다. 얘들아, 우리 셋이 이렇게 자전거를 몰아 별학산을 넘는단다. 멧길 달리는 느낌을 알겠니?

 

- 내율마을 지나고 율치다리 건넌다. 푸른 들판에 누르스름한 빛이 살몃살몃 감돈다. 가을빛은 천천히 천천히, 그야말로 천천히 온 들판으로 찬찬히 스며든다. 풍양면소재지 쪽으로 자전거를 꺾는다. 풍양중학교에 닿는다. 학교에 들러 아이들과 논다. 아이들은 너른 마당 있는 데라면 어디이든 즐겁다. 달리고 뛰고 만지고 구르면서 신나게 논다.

 

- 저녁 다섯 시에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해가 떨어지기 앞서 집으로 돌아가자. 해가 떨어지면 마당에 넌 빨래가 다시 축축해진다. 우리 얼른 돌아가자. 오던 길을 되짚는다. 별학산 기슭을 다시 넘는다. 할매 한 분 우리처럼 별학산 기슭을 넘으려 한다. 할매는 짐을 실은 작은 수레를 끈다. 할매는 이녁 젊을 적부터 이 고개를 숱하게 넘으며 살아오셨겠지요.

 

- 저녁해가 되며 별학산 기슭은 온통 나무그늘이 된다. 내리막을 그늘길로 달리며 매우 시원하다. 냉정마을과 영호마을 앞을 싱싱 달린다. 남당마을 앞에서 살짝 자전거를 멈춰 아이들한테 물을 준다. 다시 자전거를 몬다. 바닷바람을 마시고, 바닷노래를 들으면서 자전거를 차근차근 몬다. 더 빠르지도 않고 더 느리지도 않게 자전거를 달린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 하늘과 바다는 한동아리 빛깔이다. 구름 하나 없이 파란 하늘 저 끝자락부터 하얗게 물든다. 하얀 물은 이내 발그스름하게 바뀌고, 발그스름한 빛은 곧 저녁노을이 되겠지. 우리 마을도 이웃 여러 마을도 가을볕 골고루 받는다. 가을노래는 물결 따라 천천히 번지고, 바닷마을도 들마을도 멧마을도 산들산들 시원스레 감도는 바람이 어루만진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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