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뜨거운 것들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54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
― 이미 뜨거운 것들
 최영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3.3.29. 1만 원

 


  아이들이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납니다. 어쩜 이리 일찍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어제 여덟 시가 안 되어 잠들었으니 이때에 일어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저녁 열 시에 잠들었으면 아침 일곱 시 즈음 일어났을는지 몰라요. 그나저나 아이들이 참 잠이 적습니다. 느긋하게 자고 실컷 자며 오래오래 자면서 튼튼하게 클 수 있을 텐데, 동이 트면 아이들도 해와 함께 기지개를 켜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들 아버지도 새벽 일찍 일어납니다. 아이들 아버지 또한 늦게 잠들어도 일찍 일어납니다. 아버지인 나부터 일찍 일어나는 만큼 아이들한테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인 나부터 늦잠을 잔다면 아이들이 다른 모습 보여주는구나 하고 놀랄 만하지만, 아버지 삶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모습이니 물끄러미 지켜볼 뿐입니다.


.. 5천만의 국민을 감히 사랑한다고 / 떠드는 자들. // 사랑을 말하며 / 너는 숨도 쉬지 않니 ..  (정치인)


  자는 아이들 곁에 앉거나 서거나 누워 쉬잖고 부채질을 합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위가 길고 짙습니다. 비가 뿌리는 곳은 모질게 퍼붓고, 비가 안 오는 곳은 목이 타도록 안 옵니다.


  지난날에도 이런 날씨가 있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지난날에는 이 나라에 비가 오면 남이고 북이고 비가 왔을 테고, 비가 안 오면 남이고 북이고 비가 안 왔을 테지요. 모두 같은 날씨였어요. 그런데 나날이 날씨가 뒤틀려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날씨가 뒤범벅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막개발이 이루어지는 만큼 날씨가 뒤틀립니다. 삽질을 함부로 하고, 시멘트를 아무렇게나 퍼부으면서 날씨가 뒤범벅입니다. 물이 마른다 하면서도 골프장 짓기는 멈추지 않아요. 물이 마르더라도 땅밑에서 물을 엄청나게 뽑아올려요. 도시에는 댐이 없고, 도시에는 냇물도 없으며, 도시에는 논밭 또한 없는데, 도시사람은 물을 엄청나게 씁니다. 장마이건 가뭄이건 도시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물을 씁니다. 논이 타고 들이 말라도 도시사람은 이녁 더위를 식히려고 물을 펑펑 써요.


  올여름은 이럭저럭 지나간다 하더라도 이듬해에는, 다음 새해에는, 또 찾아올 다다음 새해에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도 이렇게 끔찍하거나 모진 여름을 맞이하면서 물벼락을 맞거나 가뭄에 시달리는 일을 되풀이해야 할까요. 여름만 지나면 모든 일은 아무렇지 않나요.


.. 대학은 그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 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 /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 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 / 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 / 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 / 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 / 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 /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 / 집 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 ..  (한국의 정치인)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따사롭다 싶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걱정스럽다 싶은 눈길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대학입시를 생각하는 눈썰미로 바라보기도 할 테고, 학교에서 어떤 시험성적을 거두느냐 하는 대목을 바라보기도 할 테지요.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 어린 나날을 누립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를 거치고 젊은이 되어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른이 될 때에 짝을 사랑스레 맺어 아이를 곱게 낳습니다. 곧, 아기와 어린이와 푸름이로 지낼 적에 맑은 사랑 듬뿍 먹으며 자라야 튼튼하며 야무진 어른이 됩니다. 아기와 어린이와 푸름이로 지내면서 입시교육에만 길들거나 물들면 튼튼하지도 못하고 야무지지도 못한 ‘나이만 꽉 찬’ 어른이 됩니다.


  아름다운 마을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림을 꾸릴 적에 태어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다면 마을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림을 아름답게 꾸리지 않으면 마을살이가 아름답지 못해요.


  아름다움은 먼 데에 없어요. 아름다움은 늘 내 마음속에 있어요. 누군가는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언제나 꺼내어 환하게 나누고, 누군가는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채지 않으며 살아가요. 그러니까, 어른이라 한다면,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그야말로 아름답게 보듬거나 돌보거나 살찌우는 사람일 때에 어른입니다.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라서 아름답게 사랑을 속삭이도록 이끄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 내 욕망이 절반은 / 백화점이 해결해준다 ..  (백화점 가는 길)


  시골집에서 면소재지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구름을 바라봅니다. 자전거를 세웁니다. 한여름 구름이 아주 아름답기에 아이들을 불러 구름을 보라고 얘기합니다. 함께 자전거를 달리는 아이들은 구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천천히 익는 나락을 바라봅니다.


  시골 들길을 달리며 들내음을 맡습니다. 봄에는 봄들에서 피어나는 내음을 맡고, 여름에는 여름들에서 피어나는 내음을 맡습니다. 가을에는 가을들에서 피어나는 내음을 맡지요. 겨울에는 나락을 베어내어 조용한 겨울들 내음을 맡아요.


  여름볕이 후끈후끈하지만 들바람이 불어 제법 시원합니다. 큰아이를 자전거에서 내리라 하고는 이삭이 패려는 벼를 가까이에서 보도록 부릅니다. 벼마다 꽃대가 올라 아주 조그마한 벼꽃이 핍니다. 이 꽃대에서 벼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테고, 열매가 굵고 단단하게 자라겠지요.

  벼꽃내음이 풍기는 들길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가을이 찾아오는 소리와 냄새를 맞아들입니다. 아직 더위가 폭폭 찌니까 한여름이라 할 텐데, 온몸을 포근하며 고소하게 감도는 여름들 맑은 냄새를 맡으면서 즐겁게 웃습니다.


.. 화려한 꽃다발은 저리 치우고 // 섞이지 않는 / 하나의 향기로 너는 다가와라 ..  (꽃집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시골사람 숫자는 1퍼센트가 채 안 된다 할 만합니다. 99퍼센트 남짓 도시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어린이와 젊은이는 거의 모두 도시로 갑니다. 앞으로 도시사람은 더 늘어나고 시골사람은 훨씬 줄어들리라 느낍니다.


  아마 오늘날 도시 어린이나 시골 어린이 모두 들내음 거의 못 맡으며 살아가리라 봅니다. 시골에 남아서 시골사람 되려는 시골 어린이라면 들내음 실컷 맡으면서 들일을 거들 테지만, 도시로 가려는 시골 어린이라면 들내음이 풍기건 말건 마음을 안 기울이리라 느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도시 어린이라면 들내음을 맡을 길이 없어요.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아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내음을 안 맡거나 몰라요. 아예 생각조차 안 할는지 몰라요. 여름에는 덥다고 말하고, 겨울에는 춥다고 말하기만 할 뿐, 날씨란 무엇인지를 조금도 생각조차 안 할는지 몰라요.


  곁에 없으니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니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으니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니 어깨동무할 수 없어요. 책을 읽으면 조금이나마 느낄까요? 항공방제를 비롯한 농약 때문에 시골이 얼마나 아픈지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나마 느낄까요? 도시를 가득 채우는 아파트와 자가용이 도시를 얼마나 망가뜨리는가를 조금이나마 느낄까요? 누군가 통계와 자료를 대면 이런 대목을 조금이라도 느낄까요?


.. 죽여라! / 죽여! / 우… 아… 아… 어서 쏴! // 총알받이 소대장이었던 아버지는 /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났건만, / 밤이 되면 총을 들고 기억과 사투를 벌였다 // “아버지, 간밤에 몇 명이나 죽였어요?” / 싱글거리며 묻는 딸에게 /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잠꼬대)


  최영미 님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2013)을 읽습니다. 여름은 진작부터 덥습니다. 도시문명은 진작부터 도시만 헤아리지만, 도시조차도 제대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곧, 도시문명은 사람이 아닌 기계만 헤아립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늘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늘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바쁜 쳇바퀴에 얽매이는 사람은 늘 바쁜 쳇바퀴에 얽매입니다. 푸른 숨결 마시는 사람은 늘 푸른 숨결을 마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맞아들여 하루하루 일굽니다.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삶을 밝히며 하루하루 보냅니다. 그렇지만, 막상 생각부터 알뜰살뜰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도, 어떤 돈을 벌려 하는가를 따지는 사람이 적어요. 어떤 돈을 얼마나 벌고 어느 자리에 쓰면서 이녁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을 때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훨씬 적어요.


  군인은 사람을 죽일 때에 즐거울까요? 군인이 하는 ‘나라 지키기’란 무엇일까요? 군인이 바라보는 ‘적군’이란 누구일까요?


  교사는 아이를 가르칠 때에 즐거울까요? 교사가 하는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교사는 어떤 교과서를 손에 쥐어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나요?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사인가요, 대학입시 잘 해서 더 큰 도시에서 더 많은 돈 벌어들일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라고 채찍질하는 교사인가요?


.. 상도터널 입구에 / 노란 개나리 // 시멘트 벽을 빠져나오니 또 개나리 / 캄캄한 동굴을 지나, 처음, 보는 // 처음 보이는 꽃.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  (상도터널)


  꽃은 늘 핍니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아 꽃이 피거나 지는 모습을 하나도 안 알아챌 뿐입니다. 구름은 늘 흐릅니다. 사람들이 살펴보지 않아 구름이 끼거나 걷힌 모습을 하나도 안 느낄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해가 뜹니다. 바람이 가라앉고 해가 집니다. 새가 노래하고 벌레가 납니다. 지렁이가 숨쉬고 나비가 번데기에서 깨어납니다.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다가 봄에 깨어나고, 제비는 가을이 찾아오면 태평양 너른 바다를 가로질로 따뜻한 나라로 날아갑니다.


  느끼려는 사람은 바람도 해도 새도 벌레도 느낍니다. 생각하려는 사람은 지렁이도 나비도 개구리도 제비도 생각합니다. 느끼려는 사람은 이웃을 느끼고 동무를 느낍니다. 생각하려는 사람은 두레와 어깨동무를 생각합니다. 느끼려는 사람은 사회와 문화와 교육을 느낍니다. 생각하려는 사람은 날씨와 숲과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 서울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리지만 /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고 ..  (동서울종합터미널 1)


  가슴속에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어느 먼 나라에서 찾아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속에서 꿈이 자라납니다. 대통령이 선물하거나 국회의원이 베푸는 꿈이 아닙니다. 꽃송이마다 사랑이 감돌고, 풀잎마다 꿈이 어립니다. 아침마다 새 하루가 밝으면서 새 이야기가 솟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마음을 열어 소리를 듣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가슴을 열어 냄새를 맡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생각을 열어 이야기를 듣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사랑을 열어 꿈을 펼칩니다. 4346.8.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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