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놀이터
아이들이 헌책방 골마루를 휘저으면서 뛰어논다. 1층 아닌 2층에 깃든 헌책방인데, 아래층에 쿵쿵 울리겠구나 싶으면서도, 아직 많이 어리니 뛰어놀려 할밖에 없으리라 느낀다. 고작 여섯 살 세 살 아이들더러 책상맡에 얌전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으면서 책을 들여다보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짓이 되겠는가. 아니, 아홉 살 어린이한테도, 열두 살 어린이한테도 뛰지도 달리지도 놀지도 뒹굴지도 만 채 여러 시간 책상맡에서 못 움직이게 한다면 어찌 될까.
어른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어른더러 책상맡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어 보라 하자. 어른더러 책상맡에 조용히 앉아서 하루 여덟 시간 꼼짝않고 있으라 해 보자.
공부는 책상맡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문도 책상맡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공부는 몸을 써서 움직이는 삶터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학문은 몸과 마음을 기울여 살아가는 마을과 숲과 들과 바다와 멧골에서 태어난다.
책을 쓴 사람들은 온몸 부딪혀 일군 이야기를 책에 담는다. 더러, 온몸 안 부딪히고 책상맡에서 쏟아낸 글을 엮은 책도 있을 텐데, 사람들이 즐기고 반기며 사랑하는 책을 곰곰이 살피면, 글쓴이(글)나 그린이(그림)나 찍은이(사진)는 하나같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우리 누리를 누볐다고 할 만하다.
여행을 하지 않고 여행책을 쓰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온 나날이 없이 소설책을 쓰지 못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한테서 배운 나날이 있을 때에 교육책이든 육아책이든 쓸 수 있다. 숲을 누비고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본 사람이 자연그림책을 그리고 자연사진책을 내놓는다. 책상맡에서는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 처세책이나 경영책조차 책상맡에서 써내지 못하기 일쑤이다.
그러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읽을까? 책상맡에서 쓰지 않은 책을 책상맡에서 책는 모습은 아닌가? 책상맡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책을 책상맡에서 읽으며 머릿속에 지식만 담지는 않는가?
아이들이 신을 벗는다. 신을 가지런히 벗고는 맨발로 발바닥 새까매지도록 뛰어논다. 나는 아이들 몰래 신을 집어든다. 땀과 땟물 흐르는 신을 물로 헹구고 빤다. 다 헹구고 빤 신을 제자리에 살짝 갖다 둔다. 4346.8.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