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박경희 그림 / 비룡소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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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7

 


평론이 할 일
―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민음사 펴냄,1992.10.20./7000원

 


  아름다움을 그릴 때에 문학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쁘장한 빛깔이나 무늬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비싼 보석이나 옷차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사랑스레 나누는 웃음과 눈물입니다. 아름다움은 살가이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모습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슬퍼서 울지만 씩씩하게 일어서며 새 길 꿋꿋하게 걸어가는 여느 사람들 하루가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환한 노래를 불러 따사로운 마음 나누는 사람들 삶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이 아름다움이요, 너그러운 눈길이 아름다움입니다. 나뭇가지 뭉텅뭉텅 자르고 이리저리 휘도록 억지로 만든 가녀린 소나무는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이렇게 괴로운 나무는 그만 비싼 값에 사고팔리는 상품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운 숨결 되도록 태어난 나무인데, 바보스러운 사람들 손을 타면서 아픈 생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아픈 생채기를 보듬는 누군가 있으면, 새삼스레 아름다움으로 거듭납니다. 권력을 노리거나 이름값에 사로잡히거나 돈에 휘둘리는 슬픈 사람들을 살살 타일러 착하면서 참다운 길로 접어들도록 이끄는 누군가 있으면, 이 또한 아름다움이에요.


..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때 그 어린이들은 우리의 새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몸을 튼튼히 하면서 정직한 마음들을 가꾸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시절, 전쟁까지 겪으면서도 꺾이거나 절망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가꾸어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훌륭한 나라를 이룩한 어른들이 되었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이 노래를 배우고 즐겁게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 나라는 언제나 싱싱한 새라나이며, 이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는 서로 돕고 정직하게 자라면서 싸움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지켜 가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하고 훌륭한 노래를 지으신 분도 육석중 선생입니다 ..  (16쪽)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면 평론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줄 때에도 평론이 됩니다. 어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에 따라 재거나 따진다고 해서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동심천사주의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니 이상주의도 아닙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이지, 문학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그림이나 사진이나 노래나 춤을 바라볼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물감으로 그리거나 연필로 그리거나 크레파스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입니다. 붓으로 그리거나 먹으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이에요. 목탄이나 숯으로 그려도 그림이며, 모래밭에 나뭇가지로 그려도 그림이지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모두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자락 실어서 보여줍니다. 곧,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적에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겉이나 틀, 한자말로 하자면 형식으로는 문학 꼴이나 그림 꼴이나 사진 꼴을 갖추었어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문학이 될 수 없고,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평론이라면,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힐 때에만 문학평론입니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을 놓고 재거나 따지면 연구논문이에요. 이런 글은 학술논문입니다. 이런 글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연구논문은 연구논문이지 평론이 아닙니다. 학술논문은 학술논문일 뿐, 문학평론이 되지 않아요.


  문학평론으로 주고받을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문학을 읽으면서, ‘문학 즐김이’로서 어떻게 문학을 즐기면서 내 삶에 어떠한 새 이야기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면 됩니다.


.. 동요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활발하게 발표되었으나, 5·16 이후에는 자유시로서 동시가 왕성하게 발표되었고, 동요시는 20년 동안 푹 쭈그러들었습니다. 새로운 동요시의 발표가 없으니 좋은 새 동요 가사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동시는 세련되었으나 어린이들이 쉽게 즐기기엔 무리한 점이 많았고, 새로 불리는 동요 가사들의 대부분은 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  (62쪽)


  칭찬을 하는 글은 칭찬글입니다. 추켜세우는 글은 추켜세움글입니다. 기리는 글은 기림글입니다.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은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문학작품을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껴, 이렇게 좋은 문학작품 내놓은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겠지요,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글은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이에요. 이런 글을 쓰면서 섣불리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돼요.


  평론이란 아주 다른 글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은 차갑게 쓰는 글이 아닙니다. 아무나 못 쓰는 글도 아니면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이 평론입니다. 칭찬에도 추켜세움에도 기림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쓸 수 있을 때에 평론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우며 어떤 이야기인가를 밝히는 한편, 내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과 새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드러내는 글에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칭찬이나 추켜세움이나 기림이 끼어들지 못하겠지요.


  평론글은 수수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수수한 자리에서 샘솟거든요. 평론글은 투박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즐거이 나누는 이야기란 서로 투박하게 주고받는 말씨에서 자라거든요.


.. 대개 시인은 시를 쓸 때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아껴서 나타냅니다. 깊고 큰 생각이라도 될수록 적은 수의 말로 나타내어야 좋은 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시어에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담게 됩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까닭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어렵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담는 일, 그것이 시를 빚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뜻을 담은 말이라면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나 표어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율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74∼75쪽)


  최지훈 님이 한국 동시 작가 이야기를 적은 책 《동시란 무엇인가》(민음사,199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최지훈 님은 1977년에 문덕수·이재철 추천으로 아동문학평론가로 되었다 하며,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1986∼1988년 사이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열다섯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윤석중, 권오순, 신현득, 이오덕, 유경환, 김종상, 박경용, 석용원, 김녹촌, 문삼석, 최춘해, 김구연, 공재동, 전원범, 정두리, 이렇게 열다섯 사람입니다.


  열다섯 사람을 이야기하며 붙인 글이름을 보면, ‘노래 할아버지 윤석중 선생’, ‘통일을 기원하는 만년소녀의 기도’, ‘동요시의 즐거움’, ‘평화를 갈구하는 시정신’, ‘인간을 살리는 자연’, ‘땀에 젖은 무명치마’, ‘어른은 모르는 불빛과 빛깔’, ‘썩어야 다시 사는 생명’, ‘바닷마을, 산마을’, ‘이슬의 노래’, ‘생명의 젖줄, 흙의 노래’, ‘사랑과 그리움’, ‘별, 풀잎, 이슬 그리고 새’, ‘꿈의 공을 차라’, ‘물음표 시인의 정결한 행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동시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자꾸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맙니다. 이 책을 평론책이라 할 만한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 작품인가를 떠나, 〈새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고, 학교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지만, 나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무엇이 좋은지 알 노릇이 없는데, 어느 어린이라 하더라도 잠꾸러기가 될 턱이 없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아이들 가운데 잠꾸러기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놀고,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나서 놉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이 많아 바쁘면, 아이들은 퍽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 일손을 거듭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어버이 곁에서 도우면서 살아요. 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새나라의 어린이〉 같은 동요나 동시가 거짓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어린이)한테 어른이 들려줄 말이란 고작 이뿐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퐁당 퐁당 돌을 던져라’ 하는 동요를 어른들이 부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부르지만, 도시에는 냇물이 없는데 이런 노래 불러서 뭐 하자는 뜻인지 알 수 없었어요. 냇물에서 누나가 나물을 씻는다니,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노랫말만 이쁘장하게 붙인 셈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우리(어린이)를 얕잡거나 낮추어 본다 하더라도 이렇게 바보스레 얕잡거나 낮추어도 되는가 궁금했어요.


  내가 즐기던 동요로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가 있어요. 두 가지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도 도시 아이였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을 이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다만, 어릴 적에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를 쓴 사람 이름을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동요를 쓴 사람 이름을 제대로 알았으며, 이 동요를 쓴 사람 작품도 어른이 된 뒤에 처음으로 읽었어요.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하는 동요도 재미나게 부르면 깜찍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두 번 세 번 부르면 머리가 아파요.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그저 이쁘장한 말만 죽 늘어놓으려 하니,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이런 동요 불러 주지 않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런 동요 불러 준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동요는 ‘동심천사주의’조차 아니라고 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철부지나 인형으로 삼는 슬픈 어른들 허수아비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지 싶어요.


  어린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나는 아이들한테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입힌 〈햇볕〉 같은 작품을 날마다 여러 차례 부릅니다. “햇볕은 고와요,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하는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느끼고 사랑과 생각과 꿈을 읽습니다. 그렇구나, 햇볕이 이렇게 고운 손길로 나무와 풀을 살리고 꽃과 열매를 맺으니, 사람들도 아름답게 삶을 누리는구나, 사람들은 서로서로 햇볕 같은 마음씨로 어깨동무할 때에 즐겁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원수 님 동시 〈겨울 물오리〉도 아이들한테 날마다 들려주는 동요이자 동시입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랫말에서 삶을 느끼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오리들은 한겨울에도 얼음장에서 노는구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오리뿐 아니라 다른 짐승들은 어떻게 지내지, 또 풀과 나무는 겨울을 어떻게 나고, 씨앗은 새봄을 어떻게 기다리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요. 아이들한테 이 동요와 동시를 들려주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자꾸자꾸 틔웁니다.


..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 … 박경용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일반 자유시도 쓰고 시조도 열심히 발표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도 만만치 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어린이를 위한 시조, 이른바 동시조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조 운동을 열심히 펼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  (127쪽)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에서 이원수 동시를 미처 못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윤동주와 백석, 권태응과 권정생 동시를 아직 못 다루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최지훈 님은 시와 동시를 아이들한테 어떻게 밝히려 하는지 좀 궁금합니다.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75쪽)” 하고 말하는데, 율격이란 무엇일까요. 율격이라 하는 틀(형식)이 없으면 시도 동시도 동요도 될 수 없을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빚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율격은 어떤 틀을 보여줄까요. 아쉽게도,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갖출 율격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히지 않습니다. 3·4조나 4·4조나 7·5조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고, 이러한 율격은 한국말 빛깔과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율격을 곰곰이 살피면, 율격은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빚습니다. 낱말 숫자가 4·5나 4·6으로 이루어졌어도, 읽는 사람으로서는 4·4나 3·4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어요. 율격은 글잣수가 아니에요. 율격은 마음으로 그리는 가락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글잣수로는 율격을 따지지 못해요.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찬찬히 가락에 맞추면서 율격을 누립니다.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율격은 처음부터 따질 까닭이 없기도 하고, 율격은 작가와 독자가 얼마든지 새롭게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 작가들이 동요를 널리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름다운 가락을 입히면 아름다운 동시이면서 동요가 돼요. 이런 모습은 백창우 님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율격이나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아름다운 동요 가락을 짓지 않아요. 동시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느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가락으로 옷을 입히니 아름다운 동요가 됩니다.


  평론이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는 글이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주는 글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어요. 동요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가락을 입혀서 밝히면서 태어나는 열매입니다. 아름다움을 그린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를 가락을 입혀서 보여주기에 동요가 태어납니다.


  모든 실마리는 아름다움과 이야기에 있어요. 아름다움을 밝히고 이야기를 찾자는 뜻에서 쓰는 글인 평론입니다. 아름다움인지 아닌지 밝히지 못한 채 칭찬만 한다면 평론이 아닌 칭찬글입니다. 칭찬만 하는 글이란 문단을 이리저리 줄세우기 하듯 쪼갭니다.


  최지훈 님은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127쪽)”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최지훈 님은 ‘동시 수준’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높은 동시 수준’이란 무엇인지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이 나라 동시 눈높이가 올라갈까요? 동시 눈높이는 왜 높이 올라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누리면서 어른들은 이 나라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아름답게 일구는 몫 즐거이 맡으면 될 노릇 아닐까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동시라는 그릇으로 나누어 주려는 어른일까요? 동시 평론을 할 적에는 아이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볼 뿐 아니라, 슬기롭게 살펴보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똑똑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지옥이 고스란히 있고, 사회차별과 분단과 불평등이 언제나 드러나는 이 나라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기운을 내야 하는가를 함께 밝힐 때에 비로소 문학도 되고 평론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이는 설움에만 젖어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새 세계를 열어야 할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무리 기림을 받고 격려를 받아도 부족합니다. 어린이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날기도 하고, 꽃과 같이 아름다움도 창조하고, 창공 높은 곳에 이상으로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254쪽)


  ‘미래의 인간’과 ‘희망’과 ‘설움’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새 세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지훈 님이 《동시란 무엇인가》를 쓴 때는 1986∼1988년입니다. 이무렵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요? 이무렵 한국에서 동시를 쓴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려 했는지요?


  최지훈 님은 책 머리말 첫 줄에서 “나는 여의도 광장 같은 데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활발하게 도는 아이들을 보면 참 건강하고 씩씩하게 보여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5쪽).” 하고 말합니다. 뛰노는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튼튼하고 씩씩해 보일 테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여의도 광장 같은 데 빼고 어디에서 이렇게 놀 수 있나요?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몇 군데 광장 빼놓고 어디에서 홀가분하게 뛰노는가요? 아니,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제대로 뛰놀 겨를조차 없이 학원과 입시에 어린 나이부터 휘둘리지 않나요? 시골 아이들도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사는 길이 아니라 도시로 내몰리거나 떠나게끔 등떠밀리지 않나요?


  어린이문학평론이라 하는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어린이문학과 평론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평론하는 글은 사회와 나라와 교육과 문화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빚을 때에 즐겁게 나눌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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