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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울음 ㅣ 삶의 시선 23
고영서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3월
평점 :
시와 울음
[시를 말하는 시 31] 고영서, 《기린 울음》
- 책이름 : 기린 울음
- 글 : 고영서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7.3.30.)
- 책값 : 6000원
바람이 올 때에는 바람결이 얼굴에 와닿기 앞서 먼저 소리로 알아챕니다. 풀잎과 나뭇잎 사르르 건드리면서 온통 쏴아아 뒤집는 소리를 내요. 커다란 나무도 바람결 따라 살짝 흔들리고, 나뭇가지는 나뭇가지대로 이렁저렁 춤을 추며, 풀잎은 풀잎대로 파닥파닥하면서 잎 뒤쪽 허연 곳이 드러나 반짝반짝합니다.
.. 길가에 널브러진 하찮은 풀이라도 / 고마리야, 여뀌, 강아지풀아 부를 때면 / 그것들 화안하게 흔들어 대는데 .. (공명共鳴)
바람이 오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늘 시원하네, 하고 느낍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는 시원함이라면, 겨울에는 추위를 한껏 베푸는 시원함입니다. 여름에는 바람이 불어 더위를 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겨울에는 바람이 있어 겨울다운 추위가 온 들과 숲에 드리우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여름이 있어 풀이 자라고 잎이 돋으며 온 목숨이 싱그러이 춤춥니다. 겨울이 있어 풀이 죽고 잎이 잠들며 온 목숨이 고요히 쉽니다.
새벽에 기운차게 일어나 저녁에 즐겁게 잠자리에 들듯,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해마다 찬찬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삶을 맑게 빛냅니다. 봄에는 봄빛으로 물들여요. 여름에는 여름빛으로 적셔요. 가을에는 가을빛으로 가꾸고, 겨울에는 겨울빛으로 보듬습니다.
바람은 우리한테 오늘 하루 어느 철인가를 알려줍니다. 바람빛은 우리한테 오늘 하루 어떤 삶인가를 깨우칩니다.
.. 떡갈나무 아래 잠이 들었네 / 저녁 먹고 평상에 누우면 할머니 옛이야기 따라 / 흘러가는 물소리 .. (천잠天蠶)
작은아이 아침을 먹이다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득 멈추어 바깥을 내다봅니다. 작은아이도 아버지 따라 문득 밥먹기를 멈추고 함께 바깥을 바라보았을까요. 나는 바람소리 따라 풀잎과 나뭇잎 바라보느라 작은아이 얼굴은 못 봅니다. 그저, 작은아이도 아버지 따라 마당을 내다보면서 풀잎과 나뭇잎이 한들거리는 빛을 느끼겠거니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 적에 나비는 바람을 탑니다. 바람이 불 때면 잠자리는 바람을 타요. 제비도 까마귀도 까치도 비둘기도 바람을 타요. 모든 새들은 바람을 타며 하늘을 훨훨 납니다. 바람을 타지 않고서는 날 수 없어요. 바람이 없으면 어느 새도 날갯짓 하지 못합니다.
.. 무얼 보고 나를 그리 믿어줬을까 그 할마씨 .. (오치동 할미꽃)
사람한테는 바람 없으면 숨을 못 쉬어 죽음이 찾아오겠지요. 사람들은 바람을 타고 날지는 않으나, 바람을 마시면서 숨을 쉽니다. 들숨 날숨 천천히 고르게 알맞게 날마다 꾸준히 숨을 쉽니다.
사람들이 쉬는 숨은 몸뚱이를 살리는 바람인 한편, 풀과 나무를 살리는 숨결입니다. 풀과 나무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은 풀과 나무를 살려요. 들과 숲에 사람을 비롯해 온갖 벌레와 새와 짐승이 없다면, 들과 숲은 푸른 빛깔을 건사하지 못해요. 거꾸로, 사람과 벌레와 새와 짐승도, 들과 숲이 없다면 맑은 목숨 지키지 못합니다.
바람은 사람과 숲을 잇는 고리라고 할까요. 바람은 들과 사람을 잇는 다리라고 할까요.
바람맛을 느끼면서 하루를 헤아립니다. 바람빛을 살피면서 아이들 눈빛을 바라봅니다. 바람결을 어루만지면서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겨요. 바람내음 맡으며 오늘 하루 즐겁게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 참치를 잡으러 수퍼에 간다 / 단돈 천 원이면 질리도록 먹을 수 있는 참치 / 비린내가 나지 않아 / 아이들이 더욱 좋아하는 참치 / 장바구니 가득 싣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 포만감에 젖어든 우리는 / 세일가격에 겹겹이 쌓아둔 참치를 본다 .. (참치를 찾아서)
고영서 님 시집 《기린 울음》(삶이보이는창,2007)을 읽습니다. 고영서 님은 조그마한 시집에서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울음소리는 기린이 낼까요 시인이 낼까요. 울음소리는 바람에 실려 찾아들까요, 시인 마음속에서 샘솟을까요.
사람들 누구나 슬퍼서 울지만, 사람들 누구나 기뻐서 웁니다. 슬플 때에도 울고 기쁠 적에도 울어요. 눈물은 슬플 때뿐 아니라 기쁠 때에도 나요. 웃음은 기쁠 때에도 나면서 슬플 때에도 나요.
그러면, 삶이란 웃음과 눈물이 갈마드는 하루가 되나요.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골고루 섞인 나날이 되나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있어요. 살림과 죽음이 나란히 있어요. 하늘과 땅이 마주보아요. 어둠과 빛이 어깨동무를 해요. 그런데, 두 가지는 쪼개지 못해요. 두 가지는 늘 하나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똑같이 소담스러운 사람입니다. 살림과 죽음은 동떨어지지 않아요. 하늘도 땅도 한동아리 지구별입니다. 어둠과 빛은 서로 어우러져요. 곧,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노래란, 웃음소리를 나누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 찢긴 딸아이 바지에 개나리꽃을, / 다리미에 눌어붙은 남편의 셔츠에는 / 아름드리나무를 심어놓았다 / 자전거 타다 넘어진 아들의 무릎에선 /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팔랑나비 .. (아플리케)
노래하고 싶은 삶이 이야기 되고, 이야기는 싯말 하나로 내려앉습니다. 춤추고 싶은 꿈이 사랑 되어, 사랑은 웃음과 눈물 한 자락으로 살포시 태어납니다. 울음소리 내는 사람들이 시를 읽고 시를 쓰며 시를 이야기합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