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일기 4 :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 이오덕 일기 4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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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오덕 선생님 책읽기 4] 《이오덕 일기》 4권

 


- 책이름 : 이오덕 일기 4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
- 글 : 이오덕
- 펴낸곳 : 양철북 (2013.6.24.)
- 책값 : 14000원

 


  두 아이를 재우면서 한참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잠자리에서도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좀처럼 잠이 안 들려 합니다. 이십 분 삼십 분 자장노래를 부르니, 작은아이가 먼저 사르르 잠듭니다. 이내 큰아이도 스르르 잠듭니다.


  오늘은 이문구 님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를 펼칩니다. 이문구 님 동시에서 어린이노래가 된 몇 가지를 부릅니다. 이렇게 며칠쯤 부르노라면 내 입과 귀와 마음에 익숙하게 젖어들리라 생각합니다. 따로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로 불러 주는 노래는 아닙니다. 노상 부르는 노래입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닐 적에도 부르는 노래입니다. 밥을 지으며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나중에는 큰아이도 아버지 노래를 혼자서 외워 부르고, 작은아이는 누나 노래를 흉내냅니다.


  아이들과 부를 노래란 귀엽거나 이쁘장한 말마디로 이루어진 노래가 아닙니다. 어버이부터 맑은 넋 되어 즐겁게 부를 만한 노래가 아이들이 부를 노래입니다. 아이들한테만 베푸는 어린이노래가 아닙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맑은 마음과 밝은 꿈 키우도록 북돋울 때에 어린이노래입니다. 이 어린이노래는 아이와 어른한테 싱그러운 마음빛이 되어요.


  나는 여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흔히 가르치는 어린이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여느 시설이나 기관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린이노래는 아이들 삶하고 그닥 맞닿지 않습니다. 말만 이쁘장하게 치레하는 노래이기 일쑤인 한편, 말조차 올바르지 못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한국말이곤 합니다.


  이를테면, 맨몸으로 흙땅이나 들판이나 냇물이나 숲에서 실컷 뛰노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노래가 뜻밖에 퍽 적어요. 일하거나 심부름하는 아이들 사랑스러운 모습 드러내는 노래가 참으로 드물어요. 마음속에 사랑을 심고 꿈을 키우면서 이 땅과 마을과 보금자리를 가꾸는 이야기 들려주는 노래도 참 찾아보기 힘들어요.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에 배운 어린이노래는 하나같이 재미없습니다. 틀에 박히기도 하고, 아이들한테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하는 노래가 저로서는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이런 노래를 듣던 예닐곱 살이나 일고여덟 살 무렵에도 ‘어른들은 이런 노래가 재미있어서 우리더러 이런 노래를 듣고 부르라 하나?’ 하고 궁금하게 여겼어요. 노래를 안 부르면 (학교에서) 몽둥이로 두들겨패니까 하는 수 없이 부르지만, 마음이 짠하게 움직이면서 웃음이나 울음 길어올리는 노래란 없었다고 느껴요.


- 사람이 살 집은 없다. ‘우리 집’은 없다. 우리 집에 가고 싶다. 그 옛날 살던 그 집, 하늘이 있고 별이 있고, 살아 숨 쉬는 나무들과 짐승들과 벌레들이 있고, 이웃이 있고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던 그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 데려다 주세요 …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갇히고 학살되는 도시! (1992년 1월 10일)
- 기차에서 바깥으로 내다보는 가을 들판, 가을 산천, 가을 저녁 하늘이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내가 앉은 서쪽 창을 보니 햇볕이 더운 것도 아닌데 모두 창 가리개를 내려 덮어 놓았고,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나 싶었다 … 나는 이 땅에만 살아도 자연이 너무너무 볼 것이 많고 감동할 것이 한이 없다. 내가 몇 차례 다시 살아나도 나는 이 땅을 더 보고 싶다. 이 땅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시인인가! (1992년 10월 12일)
- “참꽃들이 온 산에 피면 꽃잎을 따 먹을 수도 있고, 벼랑에 살구꽃이 피어나 아침 해에 비쳤을 때는 눈물이 날 만큼 기뻤지요. 그런 봄이 왔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걸 모르고 살지요. 언제 봄이 왔는지, 무슨 꽃이 어떻게 피었는지 관심도 없고 기쁨도 모르고, 이러니 아이들이 어떻게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겠어요.” (1994년 3월 22일)
- 옆에 앉은 신정숙이한테 구름을 보라 했더니 자꾸 딴 얘기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 자연을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 7월 26일)

 

 


  나는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오래도록 즐겨 불렀습니다. 이문구 님 동시와 권태응 님 동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도 매우 좋아합니다. 아름답게 쓴 시에 곱게 가락을 붙인 노래는 언제 불러도 즐겁습니다. 잠자리에서는 살짝 느리게 부르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 담은 노래는 살짝 밝은 빛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나물 캐러 들에 나온 순이는 나물 캐다 말고 꽃을 땁니다” 하는 이원수 님 노래는 퍽 느리면서 무거운데, 아이들 앞에서는 조금 빨리, 이러면서 환하게 부르기도 해요. 이러면 노래맛이 사뭇 달라요. 아이들을 태운 자전거를 달릴 적에는 한낮에 들길을 달리며 ‘조금 처지는’ 노래를 불러도 좋아요. 들바람이 포근히 감싸고, 구름과 햇살과 꽃내음이 따사로이 어루만집니다.


  자전거를 달리다가 허리를 곧게 펴고는 한 팔을 쭉 뻗습니다. 저 구름을 좀 보렴, 저 하늘을 좀 보렴, 저 멧등성이를 좀 보렴, 저 해오라기를 보렴, 저 들판에 볏포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치는 푸른 빛을 좀 보렴, 하고 자꾸자꾸 말을 겁니다. 샛자전거에 앉아 바람을 쐬는 큰아이는 아버지 말에 따라 구름을 보고 하늘을 보며 멧자락과 해오라기와 들판을 바라봅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들내음 맡고, 바닷가를 지나며 바닷바람 마십니다. 바람소리는 바람노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풀벌레 소리는 풀벌레노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물결소리는 물결노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비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노랫가락처럼 듣습니다. 벼락이 치는 소리는 벼락노래라 할 테지요. 제비는 제비노래를 부르고, 까치는 까치노래를 부릅니다. 바람결 따라 나부끼는 나뭇잎과 풀잎은 나무와 풀에 따라 결과 소리와 빛이 달라요. 여름철 숲을 바라보면 온통 짙은 풀빛인데, 나무마다 풀마다 빛깔이 서로 달라요. 다 다른 풀빛이 어우러져 눈부신 풀빛잔치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둘레는 온통 노래라고 할까요.


  그렇지만, 시외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간다든지,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한다든지, 이렇게 시가지라는 데로 가면 시끄럽습니다. 자동차 소리로 시끄럽고, 가게에서 튼 대중노래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푸름이와 어른 누구나 손에 쥔 전화기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시가지 사람들 읊는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어른들 다투거나 술에 절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도시에서는 노래라 할 만한 소리가 없습니다. 시골 면내나 읍내에도 노래라 할 만한 소리가 없습니다. 마음을 푸근히 적시거나 생각을 넉넉히 북돋우는 기쁜 소리가 없는 문명 아닌가 싶습니다.


- “우리가 우리 겨레 문학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데, 저쪽이고 이쪽이고 권력 잡은 사람들 눈치 보고 해서는 안 됩니다.” … 작가회의도 결국 정계에서 말하면 제도권의 야당 노릇밖에 하지 못하는 문인 단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까짓 남북회담에 참여했다는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결국 이런 단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남북 작가 회담에 참석했다는 것이 역사책에도 남고 하는 것을 가장 높은 목표로 알고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4월 25일)
- 아침 〈한겨레신문〉에, 지난번 인터뷰한 기사가 났다. 쓴 사람이 어지간히 우리 말을 다듬어 쓴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도 몇 군데 잘못 쓴 말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내가 아주 힘들여 한 말은 없다. 그래서 그 기사 내용이 별로 알맹이가 없는 글이 되었다. 그런 기사를 쓰는 사람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가짐이 아주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내가 힘들여 한 말은 “어린이한테서 배웠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가 미리 생각해서 질문하려고 한 항목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우리 말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 “교사 정신”, “교사의 반성 정신”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보다도 아이들에게 배웠다고 했다. 그걸 아주 자세하게 뚜렷한 보기를 들어 말해 주었는데, 그걸 이해 못했던 것이다. 대관절 교사 정신이니 반성 정신이니 하는 게 있는가? (1992년 10월 7일)
- 산하 출판사에는 내가 여러 사람을 소개해서 책을 내게 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인지부터 안 붙이도록 출판사에서 공작해 버렸다. 인지를 붙이는 책조차 이렇게 인세를 안 주는데, 인지 안 붙이는 책이야 말할 것도 없다 … “우리가 할 일은, 유명 인사들 모여 좌담이나 하고 강연회나 열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의 운동으로, 주민들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방송과 신문부터 바로잡는 일을 해야지요.” (1992년 12월 30일)

 

 


  시골에서는 늘 소리를, 다시 말하자면 노래를 듣습니다. 해질녘부터 온 들판에서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벌입니다. 새벽 두 시를 지나면서 차츰 수그러들어 새벽 세 시에는 거의 잦아들고, 새벽 네 시에는 똑 끊어집니다. 이때부터는 멧새가 노래하는 때입니다. 멧새는 새벽 네 시부터 새벽노래를 부릅니다. 이 사이에 밤새가 개구리하고 나란히 밤노래 들려주곤 해요.


  시골인 만큼 오늘날에는 경운기 구르는 소리가 멧새 노래와 얼크러집니다. 아니, 경운기 구르는 소리는 멧새 노래를 쫓아냅니다. 시골 할배는 경운기를 몰면서 멧새 노래를 온통 잊습니다. 경운기를 끄는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동안 스스로 멧새 노래하고 멀어집니다. 숲이 들려주는 소리가 아닌, 기계가 귀를 찢는 소리에 길듭니다.


  가만히 보면, 시골사람이 자꾸 농약을 쓰고 비료를 치며 항생제까지 뿌리는 까닭은, 기계에 길들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맨 먼저, 마이크로 쩌렁쩌렁 울리는 시끄러운 마을방송 소리에 길듭니다. 아무 때고 터지는 마을방송 소리는 아이들 낮잠을 깨우고 새벽잠을 쫓습니다. 왜 마을방송이 있어야 할까요. 마을방송은 어떤 이야기를 알릴까요. 마이크와 스피커 없던 지난날에는 마을사람이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요. 엎어지면 코 닿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귀를 찢는 마을방송을 왜 해야 할까요. 다음으로, 시골사람은 경운기와 트랙터 소리에 길듭니다. 석유 먹는 기계를 쓰면 논밭을 후다닥 갈아엎는다지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갈아엎어 더 넓은 땅에 곡식과 푸성귀를 심어서 내다 파니까, 시골살이가 나아졌을까요. 돈을 잘 벌면 시골살이가 좋은 셈일까요. 기계값과 석유값은, 또 기계를 만들고 석유를 쓰며 땅과 바람이 더러워지는 흐름은 얼마나 살필는지요.


  그리고, 도시로 떠난 딸아들이 자가용을 몰고 시골집으로 곧잘 찾아옵니다. 시골사람은 자가용 소리에 길듭니다. 무엇보다, 텔레비전 소리에 아주 길듭니다. 이제 시골에서 마을잔치 구성지게 누리는 데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북과 꽹과리와 장구와 징을 치는 마을잔치란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장구로 장단을 맞추어 일노래 부르는 조촐한 잔치는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할 만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도 사교댄스이니 스포츠댄스이니를 배워서 추지, 덩실춤을 추지 않습니다.


  소리가 사라지니, 아니 소리가 바뀌니 생각이 바뀌고 말이 바뀌며 노래가 바뀝니다. 숲소리를 밀어내고 기계소리 끌어들이니, 마음이 달라지고 사랑이 달라지며 삶이 달라집니다.


  이제 시골에서도 할매와 할배가 아이들한테 옛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는 일찌감치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옛이야기 들려줄 생각조차 안 하지만, 시골마저 옛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시골 어른은 고작 텔레비전 켜서 아무 방송이나 보여줄 뿐입니다. 도시에서라면 영어로 된 만화영화를 보여주겠지요.


- 어느 아이 말에 “생일 파티”란 말이 나오자 그 어머니가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니?” 했다.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아주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어머니의 입에서 “텔레파시”란 말이 나오고, 그 말을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어머니는 그런 말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앞서 가는 교육인 줄 여기는 듯했다. 유치원 아이들의 말 교육이 이래서 되겠는가? (1992년 7월 10일)
- “그 어린아이들이 배워야 할 말은 우리 모국어지요. 사람의 한평생에서 쓰는 말을 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에, 거의 다 익힙니다. 그때가 모국어를 익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1993년 1월 11일)
- 오늘 공청회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끼고 한심하게 생각한 것은, 발제한 내용을 요약해서 인쇄해서 돌린 그 글이 아주 요란스런 중국 글자 말체, 일본 말법으로 되어 있을뿐더러, 말하는 사람들이 말을 너무 유식한 말로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1993년 5월 15일)
- 학자들이 말해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태도가 이래서 문제다. 사전에 있으니까 사전대로 써야 한다, 표준말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써야 한다……. 현장에서 쓰는 말, 실제로 백성들이 쓰고 있는 말은 아주 무시하고, 책에 적어 놓은 것을 표준으로, 옳은 말로 보는, 이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요, 옳지 못한 태도다 … 실제로 쓰는 백성들의 말을 한사코 안 쓰겠다고 해서 쓰지도 않는 표준말로 우리 말을 묶어 놓고 싶어 하는 학자들, 이런 학자들이 얼마나 자연스런 우리 말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가. 참으로 한심하다. (1994년 9월 15일)

 

 


  우리 식구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겨, 처음에 충청북도 음성에 깃들던 무렵, 한 해가 지나도록 충청말이나 음성말을 거의 못 들었습니다. 말투는 살짝 충청말이나 음성말 같지만, 시골사람 스스로 ‘텔레비전 표준말’을 씁니다. 시골아이는 ‘학교 표준말’과 ‘교과서 표준말’을 써요. 충청도를 다시 떠나 전라남도 고흥에 깃들어 지내니, 이곳에서는 곧잘 전라말이랑 고흥말을 듣습니다. 시골말을 듣자면 이쯤 되는 시골에 깃들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린이 입에서 전라말이나 고흥말 듣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많이 늙은 할매와 할배가 아니고서는 전라말이나 고흥말을 잘 안 씁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시골말을 교사한테서 배울 수 있을까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시골말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몸가짐을 보여줄까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떠나는 시골아이는 도시에서 이녁 고장말을 잊지 않거나 알뜰히 건사하면서 시골사람다운 넋과 얼을 빛낼 수 있을까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잊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말을 잊습니다. 책과 신문과 잡지 모두 한국글로 적혔다고 하지만, 껍데기는 한글이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saranghaeyo’라 적는대서 영어가 되지 않아요. 이런 말은 영어도 한국말도 아니에요. ‘미소’나 ‘시작’이나 ‘필요’나 ‘행복’이나 ‘존재’ 같은 낱말이 한국말이 될 수 있을까요. 껍데기를 한글로 적었으니 한국말로 삼으면 될까요. ‘-의’나 ‘-적’이나 ‘그녀’가 한국말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다 나오는 말투요,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아주 쉽게 쓰는 말투이니, 이런 말투를 이냥저냥 한국말로 삼으면 될까요.


  일본이 독도를 놓고 무어라 떠들면 막바로 꾸짖는 한국사람이면서, 왜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 말투가 한국말 곳곳에 스며들거나 깃드는 슬픈 굴레는 스스로 걷거나 씻거나 털 생각을 안 할까요. 일본제국주의를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이 히노마루를 아무 데나 쓰면 온갖 거친 말로 꾸짖을 줄 알면서, 왜 한국말답지 못하게 망가진 얄궂은 말마디를 바로잡거나 일으켜세우는 데에는 땀 한 방울 안 쏟을까요.


-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야 옛날부터 다 그렇다고 보면, 백성들이 참 답답하다. 어차피 선거를 해 봐야 알겠지만, 지금 봐서는 이 백성들이 돈에 미치고 환장해서 양심을 팔고, 방송이고 신문이고 하는 것 그렇게 오랫동안 속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것을 쳐다보고 읽고 하여 그것을 믿는 꼴을 보면 에라, 이놈의 백성들은 천년을 가도 그 꼬라지로 고생해서 마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미국 놈, 일본 놈도 욕만 할 것 없다. 다 지지리도 못난 제 탓이다. (1992년 11월 18일)
- “우리 나라 사회과학이란 것이 너무 외국 사람들 이론만 소개하고 이론에만 끌려가는 것 아닌가요. 내가 보기로 이론이란 것, 관념이란 것이 현실에서 생활에서 나와야 하는데, 삶은 없고 관념만 있어서, 그 속에 모두 빠져 있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관념이고 사상이고 삶에서 나와야지요.” 그런데 이 씨는 내 말에 아주 반대가 되는 말을 했다. “우리가 아무래도 외국의 앞선 과학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려면 그렇게 안 할 수 없지요.” “외국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정도 문제지요. 우리 것은 다 버리고 남의 것만 따라가서야 뭣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 “나는 유교 정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유교는 중국서 들어온 것인데, 우리 역사와 전통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것이 우리 것이고 우리 삶의 알맹이라 보지 않아요. 도자기 같은 것, 그런 골동품을 어떻게 하자는 것 아니지요. 문제는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삶이 없어졌어요. 우리 삶이 다 없어져 가는 것이 문제지요.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서도 삶을 빼앗아 버리고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하도록 합니다.” … “삶이 무엇이냐구요? 밥 먹고 일하고 이야기하고 하는 것, 이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유치원생이고 국민학생이고 대학생이고 점수 따기로 살아갑니다. 아이들 보세요. 아침부터 밤까지 교실과 학원에 갇혀 살고 끌려다닙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무엇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반성하고 하는 것이 없어요. 삶이 없는 거지요.” … “아메리카 인디언 있지요. 그 사람들 얼굴 아직도 그대로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문화, 뭐 남은 것 가지고 있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굴 모양만 그대로 가지면 우리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네요.” (1993년 2월 18일)

 

 


  ‘죽은 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이 나라에서 말다운 말을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 부질없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죽은 말’이 되기 앞서, ‘죽은 노래’가 되었어요. ‘죽은 노래’가 되기 앞서 ‘죽은 소리’가 되었어요.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인천이든, 길거리를 걸어 보셔요. 어떤 소리를 들을 만한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소리를 서울이나 부산에서 들을 수 있나요.


  시골 읍내나 면내를 거닐어 보셔요. 시골 읍내나 면내에서는 서울이나 부산과 달리 싱그러이 펄떡펄떡 뛰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어디에서나 온통 자동차 소리입니다. 어디에서나 끝없이 손전화 소리입니다. 어디에서나 자꾸자꾸 대중가요 소리에다가, 장사하는 짐차 다니며 시끄럽게 튼 녹음기 소리입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워 바닷가로 찾아가 한참 물결노래 듣다가도, 자동차 찍찍 끌고 오는 사람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귀가 찢어집니다. 자동차 찍찍 끌고 오는 사람들은 아무 데에서나 담배를 태우고, 쓰레기도 슬쩍 버립니다.


  곰곰이 살피면,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자가용을 몰면’서 사람다움을 스스로 내버린 듯합니다. 자가용을 몰면서 ‘놀이’를 까맣게 잊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 놀이가 사라집니다.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하며 누리던 놀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몽땅 사라졌어요.


  어른들 사이에서 놀이가 사라지며, 어른들은 아이들을 닦달하기만 해요. 아이들이 1분이나 10분이나마 조용히 생각에 잠겨 꿈놀이를 하더라도 꾸짖습니다. 아이들이 빈터나 공원에서도 못 놀게 하려고 학원에 집어넣는데, 학원버스는 학교와 학원과 집 사이를 이어 줍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과 집 사이를 걸어서 다닐 말미마저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파트에 갇힙니다. 아이들 스스로 아파트에 살고 싶다 말한 적 없을 테지만, 어른들은 살림집을 으레 아파트로 얻습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뛰지 못하고 노래부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공을 던지지 못하고 구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소리지르며 뛰놀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피아노도 피리도 즐기지 못합니다. 참말,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무얼 할 수 있나요. 아파트 놀이터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숲을 누리지 못하며, 그나마 모래나 흙을 만지기도 어렵습니다.


  아이들한테 아파트란 너무 끔찍한 시멘트 감옥이에요. 아이들한테 학교 또한 너무 모진 시멘트 감옥이에요. 학원도 감옥이지요. 오락실이건 피시방이건 똑같이 감옥이에요.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어디로 가든 감옥 안마당에서 맴돌이하는 모습이 되고 말아요. 아이들 스스로 할 만한 놀이가 없고, 아이들 스스로 삶을 빛낼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요.


- 아이들을 밖에 데리고 나가 골목을 걸어 다니게도 해 보고, 시장에 데려가 구경도 시키고, 놀이터에서 모래와 흙을 만져 보게도 해야 될 터인데, 그런 공부는 안 시키고 점수 따는 공부만 방 안에서 시키려고 하니, 이런 어머니들이 자식을 다 병신으로 만든다 … 생활은 없고 책만 읽고 외우는 교육, 살아 있는 말은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도록 하고 죽은 글말, 하라고 시키는 글말만을 외우듯이 지껄이는 교육, 사람들이 이런 교육만 받았으니 이제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논리란 것을 문제 삼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은 점점 괴상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되어 간다.” (1993년 3월 14일)
- 이제 한겨레는 주주들이 바로 〈한겨레신문〉 사장과 기자들과 싸울 단계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래서 언제나 당한다. 이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피와 땀으로 이뤄 놓은 신문을 지키기 위해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 글쟁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단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역사를 우리는 살고 있다. (1993년 3월 15일)
- “일하기를 통한, 일을 해서 그것을 글로 쓰도록 하자는 것인데, 그게 어째서 할 수 없고 못 하는 것인가요? 도시 아이들 일할 것 없으면 놀이라도 시켜야지요. 또 집안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그밖에 할 일 찾으면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런데 윤구병 선생 말이 이랬다. “선생님 혼자 훤히 아시지만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걸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대구의 임성무란 사람이 자꾸 말했다. “저희들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이호철 선생님 얘기 들어요. 그걸 듣고 그대로 해도 작품은 제대로 안 나옵니다. 좀 이론을 체계를 세워서 얘기해 줘야 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참 답답합니다. 이호철 선생이 회보에 써 놓은 것, 그 숙제 내는 것, 그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무슨 행동을 하게 해서 글을 쓰게 하는 방법, 그것 보고 배울 수 없고, 무슨 원리 원칙이니 이론이니 하는 것 말해 달라니, 이론 가지고는 더 모릅니다. 그런 태도로서는 글쓰기 지도 할 수 없어요 … 삶이 뭡니까? 일이고 놀이고 활동하는 것 아닙니까? 삶을 가꾼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것뭣입니까? 헛소리한 겁니까?” (1993년 6월 5일)

 


  어른들부터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아이들도 홀가분하게 감옥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어른들부터 돈벌이에서 풀려나야, 아이들도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무를 사귀며 놀 수 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대학 졸업장도, 중·고등학교 졸업장도, 초등학교 졸업장도 덧없습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졸업장이 무슨 대수입니까. 어른들한테도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부질없습니다. 모를 심고 풀을 뜯는데,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무슨 대수랍니까.


  진보정당을 좋아해야 모를 잘 심지 않습니다. 보수정당을 좋아하니 풀을 잘 뜯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야 텃밭을 잘 일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살림이니까 나무를 못 돌보지 않습니다.


  대학교까지 마친 가방끈이 있어야 아이를 쑥쑥 낳아 똑똑하게 키울까요? 초등학교를 안 마친 가방끈이기에 아이를 제대로 못 낳고 어설프게 키울까요? 대학교까지 다니는 요즈음 아이들은 열여섯 해에 걸쳐 무엇을 배우는가요? 대학교까지 마치는 요즈음 아이들 마음밭에는 어떤 사랑씨앗이 자랄까요? 밥짓기와 집짓기와 옷짓기를 열여섯 해에 걸쳐 얼마나 배우는지요? 사랑하기와 어깨동무하기와 품앗이를 열여섯 해 동안 얼마나 슬기롭게 익히는가요?


  시골 면소재지나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습니다. 조금 깊은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으레 이런 기숙사에서 지내곤 합니다. 시골아이라 하더라도 밤별을 누리는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시골아이라 하더라도 볏모를 모르거나 벼꽃을 못 본 아이가 무척 많습니다. 벼와 보리를 가눌 줄 아는 시골아이도 드물고, 고들빼기나 씀바귀 스스로 뜯거나 캐서 먹을 줄 아는 시골아이도 드뭅니다. 치자꽃이 핀다 한들 치자꽃내음 맡는 시골아이가 드물어요. 딸기꽃을 모르고, 들딸기를 먹지 못하는 시골아이가 몹시 많아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모두 똑같아요. 참외꽃이나 오이꽃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요. 콩꽃이나 포도꽃을 본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요. 참깨꽃이 피어야 참깨 열매 맺으며, 참깨를 털어 깨소금을 얻을 수 있는 줄 아는 아이는 있기나 있을까요.


- 오늘 유치원에서 사계절 출판사 책 전시를 한다면서 그 책들을 놓아두었기에 보았더니 유치원 애들이 보는 그림책들이 죄다 번역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며 문장들이 참 말이 아니었다. 이러다간 우리 아이들이 모조리 서양 아이가 다 되겠구나 싶었다. (1994년 12월 2일)
- 따지면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국민이니까, 결국은 제 손으로 그런 집을 지어서 그 집에 깔려 죽게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사건에서 국민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존재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국민들이 깨달을 것 같지 않다. (1995년 6월 30일)
- 그래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을 선정해 놓은 것이 모두 음식점이나 거리 시장 같은 데서 하는 말을 중심으로 한 것이구나, 지식인들이 잘못 쓰는 말이 중심으로 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국어 순화를 한다는 곳에서 하고 있는 것이 이런 데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95년 8월 25일)
- 모조리 전두환 노태우한테 미루기만 하면 무슨 해결이 날 것인가? 그리고 아이들을 이 모양 이 꼴로 키우는 것이 사실은 모두가 전두환이요 노태우 같은 추악한 심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두환 노태우를 그런 꼴로 만든 것은 누구란 말인가? (1996년 7월 17일)

 


  《이오덕 일기》(양철북,2013) 넷째 권을 읽습니다. 《이오덕 일기》 넷째 권에는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와 같은 이름이 조그맣게 붙습니다. 1992년부터 1998년 사이에 쓴 일기를 그러모은 《이오덕 일기》 넷째 권입니다. 이동안 사회 흐름을 살피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이르는 기나길고 무시무시한 군사독재정권이 문을 닫습니다. 군인들 총칼도 독재자 주먹다짐도 살그마니 꼬리를 내립니다. 그러나, 군인과 독재자를 밀어낸 자리에 들어선 분은 정치권력을 지키려고 군사독재정권에서 한몫 단단히 거든 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참민주와 참평화가 깃들지 않아요. 참평등과 참삶으로 나아갈 길을 오롯이 열지 못해요.


  어찌해야 할까요. 이 슬픈 한겨레는 새삼스럽게 싸우고 버티어야 할까요. 이 나라를 떠나야 할까요. 아무도 못 찾아올 깊은 두멧자락으로 숨어야 할까요.


  길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든 씩씩하게 잘 걸어가면 됩니다. 꼭 한 갈래 길만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길은 ‘한 가지’ 마음이 될 때에 갈 수 있습니다. 바로 “나를 찾아 나 스스로 가는 길”이라고 마음을 다져야지요. 내 숨결을 찾고, 내 꿈을 찾으며, 내 사랑을 찾아서 스스로 꿋꿋하게 걸어가는 길이어야지요.


  돈을 바라거나 이름을 꾀하거나 힘을 거머쥐려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삶을 찾으려 하는 길일 때에라야 길입니다. 삶을 사랑하고, 삶을 꿈꾸려는 길일 때에 비로소 길입니다.


-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무엇을 보고 듣고 하여 어떤 지식이나 생각을 받아들였으면 반드시 그만큼 또 자기 자신을 표현해서 내보내야 하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내는 것의 수지가 될 수 있는 대로 0의 상태가 될 때 사람은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다. (1996년 3월 11일)
- 박정숙이는 그때, 그러니까 1963년이니 33년 전이다. 그때 이후 한 번도 못 만났다. 이런 얘기를 전화로 해서 웃었다. “선생님, 그때 학교 앞 마을 ○○네 집 방에 계셨잖아요. 한번은 골목을 가는데 제가 골덴 바지를 뒤에 바느질해서 떼운 것을 입고 가니까 선생님이 ‘정숙이 너 궁둥이에 해바라기꽃 핐구나’ 하신 것 생각나셔요?” “그런 일이 있었던가?” 정숙이는 키가 좀 작고 눈이 크고 눈썹이 새까만 아이였던 것 같다. (1996년 5월 9일)
- 《혼불》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이야기한 소설이라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다지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럴수록 이 소설을 많이 읽도록 해야겠구나 싶었다. (1997년 7월 14일)
- 사실 나는 오늘 새벽, 텔레비전에서 광주 사람들이 밤중에 금남로에 뛰어나와서 기뻐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던 것이다. (1997년 12월 19일)
- 우리는 어떤가? 말 잘하고 책을 많이 읽고, 국제회의에 나가 영어로 연설했다는 김대중 대통령도 일본 사무라이들이나 썼던 ‘진검 승부’란 말을 하는 판이다. 고은 같은 시인도 ‘민초’란 말을 즐겨 쓴다. 서정주 시인도 일본 말법을 시에 쓰고 있다. 이게 바로 식민지 백성들의 꼴 아니고 무엇인가? (1998년 6월 4일)

 

 


  《이오덕 일기》 넷째 권을 읽으면서, 나는 1992년부터 1998년 사이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1992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아야 하는 몸이었습니다. 1990년 중학교 3학년 적에는 그만 고등학교는 집어치우고 혼자서 제금을 내어 도시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혼자 머리를 싸매었지만 아무런 수를 찾지 못해 그대로 고등학교에 왔고, 입시생이 되면서 몸과 마음을 많이 다쳤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란 이렇게 학교 구실을 하나도 안 하면서 ‘학교’라는 이름을 버젓이 쓰는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아니,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몽둥이가 춤추고 대학입시 시험문제만 풀이하는 데로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러다 1992년 8월 28일에 헌책방이라는 곳을 알았어요. 대학입시 본고사 독일말 시험을 치르려고 혼자 애먹으면서 독일말 참고서를 사려고 헌책방에 갔어요. 학교에서는 독일말 수업을 하지 않았고, 따로 학원을 다녀야 했는데, 학원에도 수강생이 고작 여덟뿐이고 교재가 딱히 없어, 옛날 참고서를 찾아야 했어요. 옛날 참고서를 찾아 인천 배다리 여러 헌책방을 돌다가 참으로 작은 헌책방 한 곳에서 독일말 참고서를 찾았어요.


  이 헌책방에서 ‘참고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서린 책’을 보았어요. 삶을 들려주는 책을 보았어요. 사랑을 밝히는 책을 보았어요. 꿈을 노래하는 책을 보았어요. 교과서에 없고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삶을, 헌책방 책시렁에 가득한 수많은 책에서 배울 수 있었어요.


  빛이 없다고 느낀 중·고등학교 입시생 마음밭에 빛줄기 하나 스몄어요. 이 삶, 나한테 주어진 이 삶, 내 어버이가 나한테 베푼 이 삶, 한 번 즐겁게 누릴 만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앞서간 사람들 아름답고 슬기로운 이야기 담은 온갖 책을 헌책방 책시렁에서 살피면서, 내가 걸어갈 앞길을 차근차근 짚었어요. 내게 빛을 준 이 책들을 쓴 사람이 있듯이, 나도 내 뒷사람한테 빛이 될 만한 이야기를 꾸려 책을 남긴다면 아주 기쁘며 보람차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고2와 고3이라는 지옥하고 똑같은 나날이지만, 주마다 두 차례씩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빼먹고는 헌책방으로 찾아가서 너덧 시간 또는 예닐곱 시간씩 홀로 책읽기에 사로잡혔어요. 교과서도 참고서도 대학입시도 아닌, 옹글게 내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찾는 책읽기에 흠뻑 젖어들었어요.


- “너 왜 개미를 그렇게 죽이나? 이건 개미들이 사는 집이야. 개미도 집을 짓고,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이봐, 네가 밟아서 저렇게 죽고, 또 살라고 몸부림치고 하지. 개미도 사람과 같이 목숨이 있어. 그러면 안 돼.” 그 아이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그만하면 알아들었겠지, 하고 왔다. 몇 걸음 걸어오다가 돌아보니 또 그 아이가 발로 개미집을 짓밟고 짓이기고 있었다 … 개미를 짓밟는 그 아이를 내가 어떻게 바로잡겠는가? 뺨을 한 대 후려갈겨 놓고 아프다고 울고불고하면 “그 봐라. 뺨 한번 얻어맞았다고 우는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허리가 부러지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개미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하고 말해 주면 될 것인가? 안 될 것이다. 그 아이는 그다음 어디서 개미를 만나면, 전에 뺨을 얻어맞았으니 그 앙갚음으로 개미들을 더 모질게 밟아 죽일는지 모른다. (1996년 7월 9일)
- “나는 전문용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그런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온 국민이 누구나 쓰는 일상의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일상의 말을 우리 것으로 살려야 하는데 그런 것이 얼마나 많이 일본말로 오염이 되어 있는지 몰라요.” (1996년 8월 13일)
- 밤에 우노 치요란 사람이 쓴 글을 아주 재미있게, 감동하면서 읽었는데,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 사람들이 쓴 글은 한문 글자를 섞어 쓰지만 어떤 글도 모두 입으로 하는 말 그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글은 어떤 글도 입으로 하는 말 그대로 아니다. 입말과는 다른 글말이다. (1996년 10월 10일)

 


  1994년에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갔어요. 대학교에 간다면 많은 아이들이 흔히 가는 학과에는 갈 뜻이 없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한구석 밝힐 뜻있는 학과를 오래도록 찾아보았어요. 한국 역사와 문화와 문학이 여러모로 발돋움하지 못하지 않느냐 싶어, 통역과 번역을 하고 싶었어요.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갔어요.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외국어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이곳에서 네덜란드말을 배우기로 했어요. 네덜란드문학이라면 고작 《안네의 일기》 하나만 알았지만, 틀림없이 무언가 깊으며 너른 숨결이 있을 테고, 내가 조그맣게 징검돌 구실을 맡으면서 아름답게 일할 자리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들어가니, 동무들도 선배들도 공부를 하지 않아요. 대학교 도서관은 영어자격증(토익이나 토플) 따려는 사람들로 우글거려요. 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이나 오래된 신문을 들추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어요. 대학교 교수는 중·고등학교 적에나 내주던 어설픈 숙제를 과제물이나 보고서랍시고 내라 했고, 우리 학과 교수는 국민학교에서나 하던 베껴쓰기 숙제를 잔뜩 내주었어요.


  도서관에서 한풀 꺾이고, 선배와 동무들한테서 두풀 꺾이며, 교수들한테서 석풀째 꺾여요. 이러다가, 외국어대학교 가까운 곳에서 헌책방을 여러 곳 찾았어요. 아침과 낮과 저녁 사이에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고, 구내서점에서도 알바를 했어요. 도서관과 구내서점 알바를 마치면, 대학교 옆 헌책방들 찾아다니면서 고등학교에서처럼 ‘마음을 밝히는 책읽기’를 했어요. 이때까지 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말 학과에는 변변한 ‘네-네 사전’이나 ‘네-영 사전’이 없었어요. 서울에 있는 여러 헌책방을 여러 날 샅샅이 뒤져서 ‘네-네 사전’ 한 권과 ‘네-영 사전’ 한 권을 찾았고, 이윽고 ‘네-라틴 사전’까지 찾았어요. 1학년 학생이 갖춘 사전이 교수님한테 있는 사전보다 더 나았어요.


  도서관이랑 구내서점 알바, 여기에 헌책방 나들이는 꾸준히 이었어요. 대학생들 뜻없이 퍼마시는 술자리는 아주 못마땅했어요. 우격다짐으로 술을 먹이는 선배들 앞에서 ‘주는 대로’ 모조리 퍼마셨어요. 선배들 스스로 해롱거린다 싶으면 슬쩍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헌책방에 갔어요. 오줌 누러 가는 척하면서 헌책방에 가서 한 시간 즈음 책을 보고는 술자리로 돌아왔어요. 술에 전 사람들은 ‘누가 한 시간쯤 자리를 비웠는지’ 깨닫지 못해요.


  도무지 어떤 돈이 솟아나서 이렇게 술을 마시고, 이렇게 밥과 커피를 사다 마시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술 마실 돈 있으면 책 좀 사 읽으면 좋을 텐데, 같은 학과 가시내들 가운데에는 3000원짜리 커피는 사다 마셔도 1000원짜리 헌책 한 권 사서 읽으려는 아이는 없었어요. 같은 학과 머스마들 가운데에는 점500이나 점700 당구를 치려는 아이는 많아도, 두어 시간 당구 칠 돈과 겨를에 책 한 권 사서 읽으려는 아이는 없었어요.


  대학교라는 데에서 아주 외로웠어요. 배우려는 사람이 없고, 배움을 나누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슬펐어요.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려고 학교 도서관과 헌책방에서 살았어요. 전공 수업이든 교양 수업이든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책 읽는 것’보다 나은 수업이 없다고 느꼈어요. 한두 시간이면 다 읽을 책 한 권을 갖고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한다는 대학교 얼거리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어요. 이래서야 무슨 학문을 하느냐 싶더군요. 그래서 1학년 끝나고 2학년이 되어 ‘막내’에서 벗어난 뒤로 선배들 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한편, 신문배달 일을 했어요. 신문배달 일을 하니 ‘술자리 빠질 핑계’로 좋아요. 이듬날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서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술을 마시느냐고 했어요. 그래도 여러 차례 붙들렸지만, 나는 내 길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았어요.


- (유종호 교수가) 그 뒤에 윤석중, 박목월 씨의 시를 절찬한 것을 들으니 이분도 역시 시를 삶에서 떼 내어 손으로 만드는 기술로 알고 있구나 싶었다 … 결국 유 교수가 시가 될 만한 농촌의 삶이라고 한 것은 아주 별난 사건이나 거리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농촌에서 겪은 평범한 삶, 그런 삶에서야말로 우리의 정서가 듬뿍 담겨 있고 배어 있는 것을 유 교수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감자꽃’이고 ‘고추잠자리’고 하는 작품의 생활성과 그 생활 정서를 알 수 없는 것이다 … 우리 문학인들이 이렇게 자연이고 농사일이고 곡식이고 하는 것에 무지하다는 것은 놀랄 일이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전통을 말하고 정서를 말하고 우리 문화를 얘기하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1997년 5월 31일)
- “나라 사랑 마음을 갖게 하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산천, 고향을 사랑하게 되도록 아이들이 자연 속에 즐겁게 놀고 살아가는 교육을 해야 하고, 이웃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고, 우리 얼이 담겨 있는 말을 살리도록 해야 한다.” (1998년 8월 1일)
- 생태가 아주 달라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도 사람이 한 짓이다. 온통 땅에 약을 뿌려 벌레고 뭐고 먹을 것을 다 죽이고 못 먹게 해 놓았으니 땅에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까치도 해로운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까치도 벌레가 없으니 다른 것 찾아 먹는 수밖에 없지. 이래서 사람은 모든 벌레와 새와 짐승을 죽인다. 그리고 스스로 죽을 무덤을 파고 있다. 그러면서 조금도 반성할 줄 모르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1998년 11월 12일)

 


  2학년 1학기 마칠 무렵, 이런 곳에서 내 젊은 썩힐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돈과 겨를도 아까울 뿐 아니라, 내 머리가 너무 헝클어져서 바보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군입대 신체검사를 보았지요.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러니까 돈과 연줄과 권력 있는 아이들이 내 둘레에 줄을 선 탓에, 나는 군면제대상(시력이 몹시 나빠서)이었지만 4급 현역을 받았어요. 돈과 연줄과 권력으로 군면제 받은 아이들하고 군의관이 나를 보며 “미안하다.”고 말해요. 어이가 없었지만 허허 하고 웃을밖에 없어요. 그저 한 마디를 할밖에요. 군면제 받은 아이들한테는 “좆까지 마.”라 했고, 군의관한테는 “미친놈. 니가 엉터리인 줄 아니?”라 했어요.


  2학년 2학기는 등록하지 않고 군입대 서류를 냈어요. 되도록 빨리 들어가도록 해 달라 했어요. 1995년 11월 6일 날짜를 받았어요. 논산으로 갔고, 106무반동총(바츄카포) 주특기를 받아, 열여섯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갔어요. 춘천에서 이틀 밤 지내고 소양강을 배를 타고 가로질러 다시 군대 짐차를 두 차례 갈아타서 한참 달린 끝에 양구에 닿았어요. 지도로 치면 남녘땅 아닌 북녘땅인 데에서 1997년 12월 31일까지 지냈어요. 군대에서 군의문사를 세 차례 지켜보았고, 중대장하고 행정보급관한테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세 차례 있었어요. 1997년 11월에 군대 부재자투표를 했는데, 군대 부재자투표 투표함은 곽티슈상자였어요. 곽티슈상자에 넣은 부재자투표용지가 어떻게 될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용하게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뽑히더군요. 전역이 며칠 안 남았는데, 이래서야 전역을 할 수 있나 걱정스러웠어요. 아니, 김대중 씨 아닌 다른 이가, 오래된 군사독재자 정권이 대통령을 물려받았으면, 틀림없이 말년휴가 마치고 군대로 돌아간 뒤에 중대장과 행정보급관한테 끔찍하게 얻어맞았을 테고, 어쩌면 네 번째 총알이 비껴가지 않았을는지 몰라요. 곽티슈상자에 부재자투표를 했기 때문에라도 ‘제발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기’를 빌었어요. 군부대에서는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뻔히 드러났을 테니까요.


  스물여섯 달을 강원도 양구땅에서 보낸 하루하루 재빠르게 마음속으로 지나갔어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하루를 보냈고, 어떤 말을 들었고,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낱낱이 떠올랐어요. 군단·사단·연대·대대를 거쳐 ‘지오피 부식품’을 얼마나 많이 빼돌렸는지 똑똑히 보았어요. 나는 스물여섯 달 동안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은 적 없어요. 군단·사단·연대·대대에서 ‘군부대 지급품 값’을 얼마나 뻥튀기로 부풀려서 뒷주머니에 챙기는지 또렷이 보았어요. 손전화보다 안 터지는 군부대 무전기 값이 자그마치 이백만 원이에요. 청계천에서 5000원이면 사는 겨울장갑(군대에서는 ‘방한수갑’이라고 가리킨다)이 ‘군부대 지급품 명세서 단가’에는 5만 원 넘는 값으로 적혔어요. 삼양라면이 왜 부자가 되는지 군대에서 알았어요. ‘맛스타’라는 엉터리 주스를 만드는 회사도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겠지요. ‘샘터’라는 잡지는 또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을까요.


  하사관들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에서 총을 쏘아 열목어를 잡아서 먹었어요. 사단장과 군단장은 봄마다 ‘지오피 순시’를 하면서 ‘곰취 사역’을 시켰어요. 깊디깊은 두멧자락에서 저절로 돋는 곰취를 봄마다 수십 푸대 뜯어서 바쳐야 했어요. 대대에서는 중대로 오는 소포상자를 몰래 뜯어서, 안에 든 돈이나 비싼 과자를 몰래 빼돌렸어요. 부대에 건빵과 쌀 보급품 들어오면 중대장은 이녁 자가용에 두 상자와 두 푸대를 실었어요. 행정보급관은 다섯 상자와 다섯 푸대를 담았어요. 내가 이등병 적에 옆 소대 내 동기는 어떤 미친 병장이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시키더니 발로 배를 걷어차는 바람에 미끄러져서 이마가 찢어졌어요. 내가 병장을 달 무렵 스물여섯 살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 느즈막하게 군대에 끌려온 사람은 날마다 스무 살짜리 일병 고참한테 화장실에서 얻어맞아 울었어요. 그렇다고 일병 녀석을 꾸짖거나 똑같이 두들겨패면, 이 녀석은 다시금 불쌍한 스물여섯 살짜리 ‘중대장하고 나이가 같은’ 이등병 막내를 또 밤에 화장실에서 두들겨패며 괴롭힐 테니, 무어라 할 수 없었어요.


  말년휴가를 마치고 군부대로 돌아가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고 생각했어요. 1996년에 강원도 강릉이었나, 북녘에서 잠수함이 내려와 북녘 특수요원이 퍽 여럿 강원도를 밟았어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은 우리 부대 사이로도 지나갔어요. 지오피에서 내려와 도솔대대 천지오피(‘펀치볼’이라는 곳이 있는 옆 멧꼭대기 부대)에 있을 무렵인데, 다시 지오피로 끌려가서 밤샘매복을 해야 했어요. 북녘 특수요원은 우리들이 밤샘매복을 하던 자리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더군요.


  말년휴가 끝나서 멀고먼 길 거쳐 군부대로 돌아가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어요. 학자들이 입을 모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한 ‘대암산 용늪’은 우리 부대 간부들이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며 노는 자리였어요. 강원도 양구 겨울은 남녘에서 가장 춥거든요. 나는 밤근무 설 적에 온도계로 -47도까지 떨어지는 숫자를 보았어요. 그래도 용하게 전역날을 맞이했고, 전역날에도 어김없이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대대장신고를 하자니, 대대장께서는 ‘눈도 오는데 하루 쉬었다가 가지?’ 하고 웃으며 말해요. 눈은 그동안 실컷 지겹도록 봤는데 그 눈 때문에 하루를 더 머물 마음이란 없어요. 눈밭에 파묻혀 얼어죽더라도 기어서라도 이 멧꼭대기에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나중에 혼인을 해서 사내를 낳으면 어떤 학교에도 안 보내고 군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학교라는 데도 미친 한국이고, 군대라는 데도 미친 한국인데, 우리 아이가 푸르며 싱그러운 나이에 미친 사람들 사이에서 바보가 되도록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 맞춤법, 띄어쓰기 부호 따위가 말이 달라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외국 말, 외국 말법으로 말이 엉망으로 되어 가고 있는데, 그런 것 안 고친다고 말이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회의에 참석했다는 학자들 자신이 우리 말을 어느 정도 쓰고 있는지 조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통일을 한다고 하는가. (1996년 8월 8일)
- 모르니까 쉬운 말로 하자고 쓰는 것이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썼다. (1996년 12월 29일)
- 어제 〈중앙일보〉 1면 광고란에 한자교육추진회에서 정치, 경제, 교육, 학문, 종교, 군사 각계 사람 수백 명 이름으로 한문 글자를 쓰도록 하자는 성명서를 냈다. 거의 모두 보수 우익 쪽에서 돈과 권력을 잡은 사람들인데 더러 민주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신경림, 구중서 같은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어 드디어 이런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났구나 싶다. 나는 영어나 한자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믿을 수 없다. (1998년 11월 15일)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 대학교를 두 학기 더 다녔어요. 대학교를 두 학기 더 다니면서 전공수업은 하나도 안 들었어요. 부전공 과목으로 신문방송학과를 골라, 두 학기 동안 신문방송학과 모든 강의를 학점이 넘치는 채 신청해서 들었어요. 이렇게 하고 나서 아무 아쉬움 없이 대학교에 휴학계를 내고는 자퇴를 했어요. 자퇴하는 뜻을 손글씨로 대자보로 써서 도서관 앞에 붙였고, 학교신문에도 자퇴한 이야기를 실었어요. 1998년 12월부터 나는 더는 대학생이 아닐 수 있었어요. 이제부터 ‘고졸자’가 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혼자 살림을 꾸려요. 앞으로 맞이할 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는지 흐릿흐릿했지만, 졸업장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기쁨에 하루하루 웃음이 넘쳤어요. 새벽 두 시마다 신나게 일어나 자전거로 골목골목 누볐어요. 아침에는 신문을 읽고 낮부터 저녁까지 서울 시내 헌책방으로 신문배달 자전거를 이끌고 찾아가서 책을 읽었어요. 돈을 많이 벌 수도 없는 삶이지만, 돈을 쓸 일도 없는 삶이니, 날마다 노래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어요.


  사회를 보거나 정치를 보거나 교육을 보거나 문화를 보면, 어느 곳에서도 빛이 없구나 싶었는데, 나 스스로 내 삶을 찾아 내 길을 걸어가려 하니, 빛이란 바로 늘 내 가슴속에 있었더군요.


  내 빛은 잘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내 빛은 못나지 않아요. 내 빛은 언제나 내 빛이에요. 내가 꿈꾸는 대로 환하고, 내가 사랑하는 대로 따사로운 빛이 바로 내 빛이에요. 이 나라가 온통 ‘죽은 말’이 떠도는 까닭을 시나브로 깨달았어요. 사람들 스스로 ‘내 길’이 아닌 ‘톱니바퀴 되는 굴레에 갇히는 길’에 매달리니까,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쓸 줄 모르는 셈이었어요. ‘내 길’을 걷는 사람일 때에 내 마음속에서 빛을 찾아 ‘내 말’을 찾아요. ‘내 말’일 때에 ‘산 말’이에요.


  이오덕 님은 이녁 스스로 ‘산 말’을 찾으려고 하셨어요. 이오덕 님 스스로 이녁 마음속에 있는 빛을 보려고 하셨어요. 이오덕 님 마음속 빛줄기를 깨달은 뒤에는, 이 즐겁고 어여쁜 빛을 이웃사람들도 깨우치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셨고 책을 내셨어요. 책을 손에 쥐어야 책을 읽지 않고, 마음속에서 잠자는 빛을 깨워야 바야흐로 삶을 읽을 수 있어요. 4346.7.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이오덕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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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1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스스로 내 삶을 찾아 내 길을 걸어가려 하니, 빛이란 바로 늘 내 가슴속에 있었더군요.-

- 이오덕 일기 4 :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 - 귀한 느낌글,
온 마음으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3-07-10 14:21   좋아요 0 | URL
읽어 주는 분들이 고운 마음이 되기에
즐거우며 알뜰살뜰 마음밥 얻으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