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래고 -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시읽는 가족 2
이옥용 동시집, 최정인 그림 / 푸른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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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19

 


이 아이들은 무엇을 꿈꿀까
― 고래와 래고
 이옥용 글,최정인 그림
 푸른책들 펴냄,2008.7.30./8800원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손전화 기계를 사 줍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손전화 기계를 붙잡고 지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손전화 기계 붙잡고 늘어져 지내는 모습’을 글로도 쓰고 시로도 씁니다. 이런 모습을 걱정하거나 나무라기도 하지만, 그냥 손전화 기계를 사 주고는 더는 어찌하지 않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예전에 ‘게임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이들한테 사 주었습니다. 더 앞서는 ‘플라스틱 장난감’이나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을 깊이 살피지 않고 아이들한테 사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게임기에 흠뻑 빠져 지내는 모습’을 나무라거나 걱정하는 글이나 시를 씁니다. 또,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 갖고 노는 모습을 근심하거나 슬퍼하는 글이나 시를 쓰지요.


  곰곰이 돌이켜보면, 어른 스스로 ‘어른이 아이한테 못된 장난감 사 준 잘못’을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돌아보는 글이나 시는 거의 없어요. 아이들이 그런 ‘못된 장난감’ 또는 ‘총이나 칼’을 만들어서 갖고 놀지 않아요. 어른들이 돈을 벌려고 장삿속으로 이런 장난감 만들어서 팔지요. 게다가 어른들은 장난감 총과 칼만 만들지 않고, 참말 사람 죽이는 총과 칼까지 만들어서 전쟁을 일으켜요.


.. 엄마한테 호두과자 세 개를 / 싸 달라고 했다. / 봉지를 열어 보니 다섯 톨이 들어 있었다 ..  (나랑 다르네)


  우리 어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학입시 지옥’을 만듭니다. 뜻있는 어버이나 뜻없는 어버이나 그냥 아이들을 학교에 넣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동안 ‘대학입시 지옥’에서 허덕이도록 몰아붙입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참사람 되는 이야기를 배우지 못해요. 학교에서 아이들은 대학입시 잘 치를 수 있도록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문제를 달달 외웁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대학입시 지옥’을 만들어 ‘시험문제풀이’만 시킬 뿐 아니라, 학교를 벗어난 뒤에는 학원을 뺑뺑이처럼 돌려요. 아이들이 놀 겨를을 안 줍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어른들은 ‘학교와 학원 문제’를 글로 쓰고 시로 읊습니다.


.. 학교에서 숙제가 그림자로 따라왔다. / 집에 오니 영어 학원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 피아노 학원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 글짓기 학원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 바둑 학원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 나는 그림자를 가위로 똑똑 잘라 옷장에 걸어두었다 ..  (그림자)


  이옥용 님 동시집 《고래와 래고》(푸른책들,2008)에 나오는 〈그림자〉라는 동시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맞닥뜨린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살짝 우스꽝스럽게 나무랍니다. 참 잘 쓴 동시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학원 수렁’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학원은 누가 만들고, 학원에는 누가 보낼까요.


  아이들한테 끔찍하게 많은 숙제를 내주는 사람은 바로 어른이에요. 집에서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려는 이는 바로 어른이에요. 피아노 학원이든 글짓기 학원이든, 모두 어른이 만들고 어른이 아이들을 닦달해요. 그렇지만, 막상 이 동시 〈그림자〉에서도 ‘대학입시 지옥’을 만든 어른 그림자는 나오지 않아요. ‘입시 공부에만 얽매인 학교’를 만든 어른 그림자가 나오지 않지요. ‘학원 뺑뺑이’ 시키는 어른 그림자도 없어요. 집에서까지 ‘영어 닦달’을 하는 어른 그림자 또한 찾을 길 없어요.


  동시 작품 하나는 예쁘지만, 이 동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참모습까지는 밝히지 못해요. 아이들이 놓인 모습을 잘 살피면서 슬기롭게 동시 옷을 입혔지만, 이 동시를 읽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헤쳐 나갈 빛줄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고작, ‘그림자 잘라서 소포로 내다 버린다’는 것 하나밖에 없어요. 아이들은 살아날 길도 살아갈 길도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이 놓인 교육 현실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이 이런 끔찍한 곳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다’고 이 동시가 잘 나타낸다 할 만하지만, 이 동시는 ‘아이들이 왜 끔찍한 교육 현실에 놓였고, 이 교육 현실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고치거나 없애서 아이들이 싱그럽게 꿈꾸며 살아가면 좋은가’ 하는 대목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문학작품으로는 빈틈없이 훌륭하지만, 문학을 하는 더 깊은 속내까지는 들어가지 못해요. 문학이란, 현실만 보여준대서 문학이 되지 않아요. 현실이 이루어진 틀을 살피고 꿰뚫을 뿐 아니라, 이 현실에서 참거짓을 밝혀, 문학작품 읽을 사람(동시에서는 독자인 어린이가 될 테지요)들이 스스로 슬기로움을 깨우쳐 씩씩하게 살아갈 기운을 차리도록 할 때에 문학이 제몫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완성도가 높대서 문학이라 할 수 없어요. 작품 완성도도 높아야 하겠지만, 작품 완성도가 조금 덜 하더라도, 알맹이가 될 이야기를 알맞고 바르며 참답게 다룰 수 있어야 문학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 엄마가 사 온 호두 봉지에 / 북한산 호두란 말이 적혀 있다. / 뭐가 다를까? /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김정일도 없고 미사일도 없다. / 똑같은 호두였다 ..  (북한산 호두)


  〈북한산 호두〉도 문학작품으로는 참 잘 썼습니다. 남녘과 북녘이 가로놓인 아픔과 어긋남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이 동시에서 ‘아이 눈길’은 “김정일과 미사일”을 떠올렸을까요? 왜 이 동시에서 ‘아이 눈길’은 북녘에서 살아가는 ‘남녘에 있는 나와 같은 아이(동시 작품에서 화자인 나)’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북녘에 있을 숲과 북녘 시골에서 딴 호두나무 열매를 떠올리지 못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쩔 수 없지요. 어른들이 만든 텔레비전에서는 어른들이 만든 소식, 그러니까 ‘북녘 김정일과 미사일’ 이야기만을 쏟아내니, 이 시에 나오는 ‘아이 눈길’은 ‘북녘에 있을 내 동무’ 생각이 아닌 다른 데로 갈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이 만드는 텔레비전에는 ‘북녘 어린이’라든지 ‘북녘 여느 수수한 시골’ 이야기가 흐르지 않아요. 남녘 아이들은 북녘 동무들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만나지 못하고, 생각조차 못하지요. 이 동시에서도 북녘 삶과 사람과 사랑을 떠올리지 못하는 흐름으로 가고 말아요. “똑같은 호두였다” 하고 끝맺는 깨달음을 한결 따사롭거나 한껏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엮는다면, 아마, 문학작품 완성도로도 더 뛰어났으리라 보고, 이 문학작품 하나로 베푸는 아름다움과 깊이도 훨씬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아기 하마가 홍수에 밀려 / 우리 집에 오면 / 따끈한 코코아를 먹인 뒤 / 좋은 친구를 찾아 주고 싶다 ..  (이렇게 하고 싶다)


  《고래와 래고》라는 동시집 내놓은 이옥용 님은 생각날개를 두루 펼칩니다. 한국에는 없는 아기 하마도 떠올려 동시를 씁니다. 아무래도 동물원에 있는 짐승일 테고, 그림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짐승일 테지요. 그리고, 이 동시는 도시에서 동물원과 그림책과 텔레비전을 가까이한 어린이 눈높이로 썼구나 싶습니다.


  시골 아이들도 ‘아기 하마’를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시골 아이들이라면 ‘아기 멧돼지’나 ‘아기 노루’처럼, 그래도 시골 둘레에서 더러 만나는 들짐승들 이야기로 동시를 풀어내는 결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는 ‘아기 토끼’나 ‘아기 다람쥐’를 들 수도 있겠지요.


  생각날개를 펼치는 일은 자유요, 어떤 짐승을 생각하더라도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동시를 쓴 분은 우리 숲, 곧 우리 자연, 그러니까 우리 시골과 들판과 멧골과 바다와 냇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구나 싶기도 해요. 〈꼬마 수선화〉라는 동시를 읽으면서 이런 대목을 느껴요.


.. 목련과 후박나무, 은행나무는 / 코가 간질간질했다. / 눈을 깜박였다. //  저 아래 땅바닥에 / 예쁜 머리핀 같은 게 있네. / 나비가 벌써 왔나? / 별이 낮에 떨어졌나? // 꼬마 수선화 세 송이잖아! ..  (꼬마 수선화)


  목련과 후박나무와 은행나무를 나란히 든다고 해서 잘못될 일은 없습니다. 어느 시골에는 이렇게 세 가지 나무를 나란히 마당에 심어서 돌보는 작은 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박나무는 아무 시골에나 자라지 않아요. 소금기 묻은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자라는 후박나무입니다. 어찌저찌 서울 같은 데에서도 후박나무 몇 그루 옮겨심어 살릴 수 있다 할 텐데, 어찌저찌 서울에서도 살리는 후박나무란 숲살이하고 어울리지 않아요. 후박나무로서도 몹시 힘들겠지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바닷가 마을, 또 울릉섬과 제주섬 아니라면 후박나무를 보기란 퍽 힘들어요. 동백나무도 그렇지요.


  그닥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예쁜 나무 이름’이라 세 가지를 나란히 들었을까요. 글쓴이가 좋아하는 나무라서 세 가지를 들었을까요.


  그런데, ‘꼬마 수선화’가 땅바닥에서 자란다는 대목은 좀 아리송합니다. 조그마한 수선화도 틀림없이 있습니다만, 수선화는 꽃대를 제법 높이 올려서 꽃망울 터뜨립니다. 땅바닥에 붙듯 피어나지 않아요. 민들레라면 땅바닥에 붙어서 꽃을 피워요(민들레 가운데에도 꽃대 높이 올리는 꽃이 있어, 이럴 때에는 좀 다릅니다). 제비꽃도 땅바닥에 붙듯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민들레와 제비꽃은 ‘앉은뱅이꽃’이라고도 해요. 앉은뱅이처럼 땅바닥과 가까이 맞붙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선화는 앉은뱅이꽃처럼 땅바닥과 맞붙은 채 피었을까요? 누군가 수선화 꽃대를 부러뜨려서 그만 앉은뱅이꽃이 되었을까요? 게다가 수선화 꽃송이는 작지 않아요. 제법 커요. 봄날 피어나는 꽃 가운데 수선화는 꽃송이가 무척 큰 축에 듭니다. 수선화 꽃송이는 ‘머리핀 크기’만큼 작지 않습니다. 아니, 커다란 머리핀 크기라면 비슷하달 수 있지만, 수선화 꽃송이는 퍽 크다 할 만해요.


  수선화 꽃송이를 나비처럼, 별처럼, 곱게 바라보는 눈길이 싱그럽습니다. 그렇지만, 자연과 숲과 꽃과 풀과 시골을 올바르게 살피지 않고 ‘생각날개만 곱게 꾸미는’ 일은,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 동시를 읽을 아이들한테 어떻게 스며들까 하고 어른들은 깊이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생각날개는 자유라 하더라도, 동시를 읽을 아이들을 찬찬히 생각할 노릇입니다. 생각날개를 자유롭게 펼치려 한다면, 아이들이 놓인 삶도, 오늘날 이 나라 시골과 도시 얼거리도, 숲과 들과 멧골이 어우러진 모습도, 더 깊고 넓게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오늘날 이 나라 아이들은 무엇을 꿈꿀까요. 오늘날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터를 만들어서 보여주는가요. 이 나라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떤 생각날개 펼치면서 아름답게 꿈꾸는 길을 여는가요.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워 학교나 학원을 보낸대서 아이들이 즐거울까요. 아이들이 서로서로 어울려 뛰놀 빈터와 놀이터와 쉼터 하나 없이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이 나라 아이들은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요. 텔레비전 아닌 마을에서 이웃과 들짐승을 느끼거나 사귀도록 아무것 못하는 어른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생각날개 펼칠 자리는 거의 다 없애 버린 채, 가벼운 말놀이로 예쁘장한 모습만 겉으로 보여주도록 꾀하는 어른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4346.7.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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