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 문학동네 시집 1
정한용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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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도시
[시를 말하는 시 28] 정한용, 《흰꽃》

 


- 책이름 : 흰꽃
- 글 : 정한용
- 펴낸곳 : 문학동네 (2006.2.20.)
- 책값 : 7500원

 


  오늘쯤 읍내에 가서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장만할까 생각하며 아침부터 짐을 꾸리고 아이들 밥을 먹이는데, 이제 막 나가려는 때에 작은아이가 응가를 눕니다. 그래, 응가 마려우면 누어야지. 네 똥 시원하게 눈 다음, 네 똥바지 말끔히 치워야지.


  작은아이 밑을 씻깁니다. 새 바지를 입히며 작은아이한테 말을 겁니다. 얘야, 똥을 누려면 누나처럼 똥걸상에 앉아서 누어야지. 이렇게 바지에 누면 너도 싫고 아버지도 힘들잖아.


  똥바지를 빨래하고 시계를 봅니다. 마을 어귀로 군내버스 지나가는 소리 들립니다. 지나가는구나. 아침 열한 시 십오 분 군내버스 뒤로는 낮 두 시에 있습니다. 열두 시에 지나가는 버스는 이 킬로미터쯤 걸어서 이웃 봉서마을로 가면 탈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이웃마을까지 걸어갈까 생각하다가 안 되겠다고 느낍니다. 오늘은 몸이 힘드니 좀 누워서 허리를 펴자고 생각합니다. 한 시 이십 분까지 허리를 펴며 쉬다가 천천히 일어나 아이들을 조금 더 먹입니다. 두 시 군내버스에 맞추어 읍내로 나갑니다.


.. 제일 먼저 잘 뻗은 여자 허리 같던 산능선이 사라지고 / 조금 지나 동아솔레시티 아파트가 사라지고 / 이젠 초고층 성채가 하늘까지 막는다 / 꽉 막힌 공부시간 사이 / 겨우 비집고 들어온 햇살 자락이 / 유리창 너머 민들레 씨앗에 얹혔다가 / 옆 팥배나무 연두 잎으로 자리를 옮긴다 ..  (유월 일기)


  작은아이도 아버지 곁에 누워서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작은아이도 누나 따라 낮잠 건너뛰었습니다. 큰아이는 군내버스에서 졸린 티를 내지만 안 잡니다. 작은아이는 눈을 껌뻑껌뻑합니다. 보라야, 아버지한테 등 기대도 돼, 하고 말을 거니, 작은아이는 아버지한테 등 철썩 기대고는 살그마니 눈을 감습니다.


  읍내에서 버스를 내립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가게로 갑니다. 국거리와 반찬거리 몇 가지를 장만합니다. 읍내에서 어디 쉴 만한 데를 찾고 싶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골 읍내에는 공원도 쉼터도 없습니다. 나무그늘 두 군데 있지만, 나무그늘 앞으로 자동차가 꾸준히 지나다닙니다. 조용하지도 않고 호젓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마음을 놓고 신나게 뛰어놀 만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시골에서 산다 할지라도, 읍내나 면내로 나오면 재미있지 않아요. 푸른 바람이나 맑은 냇물 만날 수 없거든요.


  도시는 시골보다 더 골이 아파요. 시골은 자동차가 도시보다 훨씬 적어 훨씬 조용하다 할는지 모르는데, 도시는 어디에든 자동차가 넘치고 넘쳐요. 골목길까지 자동차가 싱싱 달리고, 골목 곳곳에 자동차가 아무렇게나 서서 자리를 차지해요.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수 없는 도시이고, 가만가만 노래 즐기며 거닐 수 없는 도시예요.


.. 분명 이국어는 아니다 / 젓국내 나는 사투리 닮았다 / 손 젓거나 눈썹 치켜뜰 때 그 말과 / 찬찬히 빗줄기 훑어낼 때 그 말이 다르다 / 울림이 다르고 뜻이 다르고 향이 다르다 ..  (매헌을 만나)


  읍내 볼일 다 보고 나서 버스때를 헤아립니다. 우리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네 시 사십 분에 있습니다. 이웃 봉서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세 시 반에 있습니다. 이웃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버스는 그나마 사십 분 기다리면 탈 수 있습니다. 그래, 저 버스를 타고 집까지 걸어가야겠구나.


  아이들 먹을 여러 가지 잔뜩 채운 큰가방 멘 몸으로 여름날 이 킬로미터 걷자면 등허리 결려요. 그러나, 이웃 봉서마을부터 우리 동백마을로 걸어서 들어오는 길은 자동차가 거의 안 다녀요. 아이들이 마음껏 달리거나 걸어도 좋습니다. 멧새와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 즐겁게 듣습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온 들판을 채웁니다.


  우리 발자국 소리를 들은 올챙이들이 놀라 논마다 쑝쑝쑝 헤엄칩니다. 걸음을 멈추고 논을 들여다봅니다. 제자리걸음을 걷습니다. 다시 올챙이들 놀라 쑝쑝쑝 헤엄칩니다. 아이들은 이곳저곳에서 쑝쑝쑝 헤엄치는 올챙이 쳐다보느라 바쁩니다.


.. 반남과 앙양고등학교 사이에 나는 길을 잃고 / 물끄러미 나무를 쳐다본다. / 무엇을 찾아 여기 온 거지? ..  (삼나무에 내리는 눈)


  한참 걷다가 큰아이가 “발이 미끌미끌해요.” 하고 말합니다. “발바닥에 땀이 차서 그렇지.” 하고 얘기하니, “잠깐만 기다려요.” 하고, 이내 신을 벗고 맨발로 아스팔트길에 섭니다. 어라, 여기는 흙길 아닌 아스팔트길이잖아. 말없이 웃으며 신을 나더러 들으라고 내밉니다. 작은아이도 누나를 따라하고 싶어 낑낑거리며 신 벗겨 달라 합니다.


  두 아이는 일 킬로미터 길을 맨발로 달립니다. 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락가락하며 달립니다. 이 길이 찻길도 아스팔트길도 아닌 흙길이고 거님길이며 오솔길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길에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아이들 누구나 즐겁게 달리고 뒹굴고 구르고 뛰고 얼크러질 수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이 길에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활짝 웃으며 일하고 놀고 어깨동무하고 두레하고 밥잔치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자동차 안 지나가는 길이 호젓합니다. 자동차 안 다니는 길이 아늑합니다. 좋은 바람 살랑 붑니다. 좋은 소리 길에 넘칩니다.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릴 때에 비로소 보금자리 되고 마을 되며 삶터 되는구나 싶습니다. 어린이도 푸름이도 젊은이도 몽땅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지만, 정작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 넘치는 도시에서 사람들 웃음소리나 노랫소리 듣지 못해요.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늘 자동차 소리에 기계 소리에 손전화 소리에 텔레비전 소리에, 귀가 아프고 골이 띵합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와 어른 모두 살가운 이야기꽃 피울 겨를을 얻지 못합니다. 비싼 집값과 비싼 물건값에 허덕여요. 푸른 바람 불지 않고 고운 햇살 드리우지 못해요. 술집 옷집 찻집 밥집 그득그득 넘치는 도시이지만, 정작 흙 한 줌 찾아볼 수 없어요.


.. 흰 꽃이 피었습니다 / 보라 꽃도 덩달아 피었습니다 / 할미가 가꾼 손바닥만한 뒤 터에 / 꽃들이 화들짝 화들짝 피었습니다 ..  (도라지꽃)


  봉서마을과 동백마을 경계쯤 되는 곳에 도라지밭 있습니다. 파랗게 빛나는 도라지꽃과 하얗게 눈부신 도라지꽃이 어울립니다. 참으로 예쁘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쑥쑥 꽃대 올리고 봉오리 터뜨린 도라지는 큰아이 키만 합니다. 도라지는 땅속에 뿌리를 얼마나 깊이 박기에 이렇게 높이높이 꽃대를 올릴까요. 민들레도 유채도 갓도, 꽃을 피워 씨를 퍼뜨리려 할 적에는 꽃대를 되게 높이 올려요. 마늘도 양파도 부추도 꽃대를 올리려 하면 참 높이높이 솟습니다. 배추도 꽃대가 높지요. 모든 풀은 씩씩하게 꽃대를 올리며 환한 빛깔 흩뿌립니다.


.. 한 아이가 밥을 먹는다 / 마룻바닥에 앉아 제 몸통보다 더 큰 밥그릇을 놓고 / 제 입보다 더 큰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  (시금치)


 정한용 님 시집 《흰꽃》(문학동네,2006)을 읽습니다. 흰꽃으로 어떤 꽃 있을까 가만히 헤아립니다. 그래, 여름날 도라지꽃으로 흰꽃이 있지요. 가을 앞두고 부추풀에서 꽃대 올라 피어나는 부추꽃도 흰꽃이지요. 여름을 부르는 찔레꽃도 흰꽃이며, 봄을 부르는 딸기꽃도 흰꽃이에요. 첫여름날 눈부신 치자꽃도, 늦봄날 환한 마삭줄꽃도 흰꽃입니다.


  흰꽃은 흰빛으로 환하면서 흰넋 북돋웁니다. 노란꽃은 노란빛으로 환하면서 노란넋 살찌워요.


  꽃은 저마다 다른 빛으로 환합니다. 사람은 서로서로 다른 넋으로 사랑스럽습니다. 마을은 골골샅샅 다른 이야기로 아름답습니다. 시 한 줄이란 고운 빛 받아먹으면서 사랑스러운 마음 따사롭게 보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노래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 나무들이 건네는 소리를 들은 지 / 오래되었다 / 빗방울이 돌에 부딪혀 이름을 새기는 것도 / 이젠 낯설고 먼 일이 되었다 ..  (그건 당신 때문이야)


  도시사람들 누구나 꽃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도시에 아파트만 서지 않기를 빌어요. 애써 돈을 들여 꽃밭을 가꾸지 않아도 돼요. 그저 빈터를 두면 돼요. 그저 흙땅을 두면 돼요. 사람들 누구나 아무것 하지 않아도 빈터에 꽃씨 날아와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요. 손바닥만 한 땅뙈기 있더라도, 아니 아이들 새끼손톱만 한 땅바닥 있더라도, 풀씨는 살며시 깃들어 잎을 틔워요.


  푸른 사랑 속삭이는 도시가 된다면, 푸른 이야기 넘실거리는 시가 샘솟겠지요. 푸른 물결 가슴에 담는 도시사람 된다면, 푸른 춤과 노래 흐드러지는 시를 기쁘게 쓰겠지요. 꽃을 생각하고, 꽃을 떠올리며, 꽃을 보살필 때에, 꽃시 한 줄 곱다시 빚습니다. 4346.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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