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창비시선 256
박남준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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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안고 노래한다
[시를 노래하는 시 49] 박남준, 《적막》

 


- 책이름 : 적막
- 글 : 박남준
- 펴낸곳 : 창비 (2005.12.7.)
- 책값 : 8000원

 


  나무를 살포시 안으면 스스럼없이 노래가 나옵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나무 곁에 서면 됩니다. 아름다운 노래 한 가락 짓고 싶으면 나무를 심을 만한 마당이 있는 집을 마련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내 노래를 부릅니다. 나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도 나무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으면 시나브로 시가 나옵니다. 시를 쓰고 싶으면 숲속에서 살아가거나 숲 곁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고운 시 한 줄 쓰고 싶으면 천 평이든 오천 평이든 시골자락 땅뙈기를 마련해서 해마다 나무를 씨앗으로 한 톨 두 톨 심으면 됩니다. 다섯 해 지나고 열 해 지나면 빈 땅뙈기에 푸른 물결 넘실거리겠지요. 푸른 물결이 일으키는 바람을 마시면 마음속에서 저절로 시가 샘솟겠지요.


.. 한때 밭둑을 이루었을 키 작은 돌담의 경계들과 / 죽은 나무의 잔재들 저만큼에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 그 다리, 저문 하루의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며 / 발목을 적시지 않고 건넜을 앉은뱅이 다리 하나 ..  (쓰러질 수 없는 다리)


  아이를 포근히 안으면 따스한 기운 번집니다. 내 기운이 아이한테 번지고, 아이 기운이 나한테 번집니다. 포근히 안으니 따스한 기운입니다. 살며시 안으면 살가운 기운입니다. 너그러이 안으면 넉넉한 기운입니다. 즐거이 안아 활짝 웃는 기운입니다.


  아이한테 해 줄 일이란 딱 한 가지, 사랑입니다. 아이한테서 받을 것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으로 낳고 사랑으로 돌봅니다.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스레 바라보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부릅니다.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무한테 사랑스러운 눈길 보냅니다. 이윽고 나무도 나한테 사랑스러운 손길 뻗습니다. 살포시 드리우는 푸른 그늘로 나를 부릅니다. 푸른 잎사귀를 만지도록 이끕니다. 푸른 내음을 마시면서 푸른 생각 빛내도록 나를 잡아당깁니다.


  여름비 똑똑 떨어지는 유월 아침에 작은아이 안고 마당에 내려서며 후박나무 그늘로 갑니다. 후박잎에 내려앉은 빗방울 하나 또르르 굴러 내 콧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코로 킁킁 빗물 하나 들이켭니다. 내 콧속에 깃든 찌꺼기 있으면 이 빗물로 씻기를 마음속으로 빕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내 코는 늘 갑갑하고 막혔습니다. 인천이라는 도시를 떠나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일하고 지내는 동안 내 코는 언제나 답답하고 맹맹거렸습니다. 인천도 서울도 떠나 시골자락에 깃들어 살아가며 내 코가 막힌 적 없었다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바람이 내 코를 다스리고, 물이 내 몸을 간질입니다. 바람이 내 코를 틔우고, 물이 내 마음을 쓰다듬습니다.


.. 나 언젠가 쓰러져 거름으로 돌아가고 / 그 자리 흰나비 한 마리 날아오르고 ..  (나비가 날아간 자리)


  흙은 빗물을 받아 촉촉합니다. 풀은 빗물로 잎 씻으며 한결 푸릅니다. 그러면, 우리들 사람도 빗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을 때에 그예 촉촉하면서 푸른 살결 될까요. 수도물 아닌 빗물을 헤아리고, 플라스틱병에 담긴 먹는샘물 아닌 시냇물 살피면, 이 나라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몸이 안 아프고 머리가 안 어지러우며 마음이 안 힘들 수 있을까요.


  빗물을 머금는 흙은 풀과 나무를 살찌웁니다. 풀은 빗물 머금은 흙과 함께 살아가며 푸른 숨결 건사합니다. 사람은 풀을 뜯어서 먹으며 배를 채웁니다. 곧, 사람은 흙과 빗물 먹는 셈입니다. 풀 먹는 고기, 이를테면 소를 잡아서 먹는다 할 적에도 흙과 풀과 빗물을 먹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살아가며 가장 정갈하게 지켜야 할 한 가지를 꼽자면, 흙을 지켜야 합니다. 흙이 흙답고, 흙이 풀을 얼싸안으며, 흙이 나무를 북돋우고, 흙이 사람들 살림집을 이루도록 해야지 싶어요.


  흙집에서 살아야지요. 흙밥을 먹어야지요. 흙일을 해야지요. 흙노래를 부르고, 흙글을 쓰며, 흙그림을 그려야지요.


.. 아들의 밥그릇 다 비워지도록 / 아버지의 밥그릇 그대로 남네 / 제가 좀 덜어 먹을게요 / 얘야 한 번은 정이 없단다 / 한 술 두 술 세 숟갈 ..  (학생부군과의 밥상)


  비오는 유월 여름 아침은 조용합니다. 빗소리만 감돕니다. 멧새도 들새도 빗방울에 몸 적시지 않으려는 듯, 어디에선가 비를 그으며 가만히 쉬는구나 싶습니다. 밤새 신나게 노래하던 개구리도 아침에는 코코 잡니다. 개구리 잡아먹는 뱀도 잠자리에 들까요. 도룡뇽은, 가재는, 민물새우는, 미꾸라지는, 모두들 어떤 유월 여름 아침 맞이할까요.


  딱정벌레가 풀줄기를 타고 오릅니다. 거미줄에 빗방울 아롱아롱 무늬집니다. 빗속을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갑니다. 잠자리도 어딘가에서 날개를 말리겠지요. 파리와 모기도 비 안 맞는 데를 살펴 찰싹 달라붙으며 다리쉼 하겠지요.


  퍼뜩 멧새 한 마리 포롱 날아와 노래를 남깁니다. 우리 집 뒤꼍 감나무에 앉았나, 뽕나무에 앉았나, 이웃집 옻나무에 앉았나, 어느 나무에 앉았으려나.


  조그마한 새는 조그마한 나무에도 내려앉을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새는 조그마한 나무 조그마한 나뭇가지에도 가볍게 내려앉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새한테는 작은 나무가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작은 새한테는 작은 꽃과 작은 열매가 고마운 밥입니다. 작은 새한테는 작은 시골과 작은 숲이 아름다운 보금자리입니다.


.. 새떼들이 돌아오지 않는 하늘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 그 땅은 버려진 땅, 버림받은 하늘이다 / 무섭고도 끔찍하다 을숙도의 하늘에는 ..  (을숙도 그 옛날 영화)


  그리 멀지 않던 옛날, 이렇게 비 내리는 유월 여름에, 멧골짝 범은 어떤 하루를 누렸을까 떠올려 봅니다. 멧골짝 곰은, 멧골짝 여우와 늑대는, 멧골짝 토끼와 사슴과 노루는, 저마다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그려 봅니다.


  이제 이 땅에서 거의 사라지거나 죽고 만 짐승들인데, 고작 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모두들 이 땅에서 아름답게 어우러져 살아갔어요. 백쉰 해 앞서만 하더라도, 이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범이며 곰이며 여우며 늑대며 토끼며 사슴이며 노루며, 숲에 깃들어 시골사람과 시골벗 되어 살아왔어요.


  아마 그때에는 풀과 나무도 오늘날보다 가짓수 훨씬 많았겠지요. 온 마을은 풀밭이었을 테고, 나무숲이었겠지요. 고을마다 사람들 알맞춤한 숫자로 어깨동무했을 테고, 쓰레기란 하나 나올 수 없이, 흙빛 얼굴과 흙빛 손발 되어 흙빛 사랑 나누며 살았겠지요.


.. 쥐가 몸을 바꿔 거듭난 앵두 / 앵두는 쥐를 먹고 나는 앵두를 먹고 / 앵두를 먹으며 생각해봐야겠네 /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이루는 것들 ..  (쥐와 앵두가 묻기를)


  박남준 님 시집 《적막》(창비,2005)을 읽습니다. 박남준 님 시집은 나무그늘에서 읽어야 제맛이 나겠다고 느낍니다. 나무숲에 깃들어 읽어도 참맛 느끼겠구나 싶어요. 곁에 나무가 없다면, 둘레에 아파트와 시멘트와 자동차만 있다면, 마음속으로 나무를 떠올리며 읽을 때에 글맛 누리겠다고 봅니다.


  나무가 없으면 조용합니다. 나무가 없으면 새도 벌레도 나비도 개구리도 뱀도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도 못 살아요. 오늘날 도시에는 나무가 제대로 없어도 ‘여 보라구, 나무 없어도 다 잘 살잖아?’ 할는지 모르는데요, 도시에 나무가 없어도, 도시를 둘러싼 시골에 나무가 있으니, 도시사람이 목숨을 버틸 수 있어요. 도시를 둘러싼 시골에 나무가 없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그러면, 도시는 하루아침에 무시무시하게 메마른 사막 되어 모두 죽고 말아요.


  그러나, 나무가 없다고 꼭 조용하지는 않다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나무가 없으면 ‘싱그럽게 살아서 숨쉬는 소리’가 죽어버려서 조용하지만, ‘목숨 없는 기계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해요. 자동차가 시끄럽고, 가게 스피커가 시끄럽습니다. 손전화가 시끄럽고 컴퓨터가 시끄럽습니다. 기자들이 시끄럽고 학자들이 시끄러우며, 정치꾼과 공무원이 시끄럽습니다.


.. 사과나무라면 사과꽃을 피우겠네 / 감나무라면 홍시를 꽃등처럼 내달겠지 / 고운 꽃의 향기라면 바람 불러모아 구석구석 나누겠네 / 가지마다 익어간 열매들로 어느 가난한 아이의 배를 채우겠네 ..  (삼월 눈 속에 차를 마시다)


  사람들은 으레 ‘국회의원 없어야 나라가 평화롭고 살 만하다’ 하고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보탭니다. ‘국회의원에다가 공무원까지 함께 없어야, 또 경찰과 군인이 나란히 없어야, 또 의사와 판사와 변호사가 같이 없어야, 또 노동자까지 아울러 없어야 나라가 평화롭고 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1850년대에 공무원 없었어요. 1750년대에 국회의원이든 누구이든 없었어요. 1050년대에 의사도 판사도 변호사도 따로 없어도 즐겁게 살았어요. 서기 50년에 기원전 500년에, 단군이 왔다고 하는 4336년 앞서, 경찰이든 군인이든, 그리고 노동자조차 없이 모두 즐겁게 어깨동무했어요.


  참말 노동자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동을 팔아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흙 품에 안겨서 흙과 풀과 나무를 만지며 밥과 옷과 집을 짓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월급쟁이에 얽매인 굴레가 아니라, 숲에 깃들어 숲을 노래하고 사랑하면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느껴요. 도시에서는 ‘노동자’일 수밖에 없을는지 모르지만,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가꾸며 돌보면 돼요. 톱니바퀴 되는 노동자 아니라, 도시와 제도권과 경제와 정치와 학교와 스포츠 모두 훌훌 내려놓고, 내 땅에서 내 삶을 내 손으로 가꾸면서, 흙맛 햇살맛 바람맛 물맛 누리는 아름다운 하루 갈무리해야지 싶어요.


  모두 시인이 되어야지요. 모두 하느님이 되어야지요. 모두 노래꾼이 되어야지요. 모두 일꾼 되고 놀이동무 되면서 예쁜 ‘사람’으로 삶을 살찌워야지요. 4346.6.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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