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사진 하나 말 하나
017. 책손이 살피는 책 - 헌책방 대양서점 2013.5.6.
책손이 책을 살핍니다. 하나둘 살핀 책 가운데 집까지 가져가서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은 책은 골라서 한쪽에 쌓습니다.
헌책방 일꾼이 책을 살핍니다. 하나하나 살핀 책 가운데 헌책방 책시렁에 꽂아 책손들이 새롭게 만나도록 할 만하다 싶은 책을 장만해서 한켠에 쌓습니다.
책손이 살핀 책은 책손이 읽을 책입니다. 헌책방 일꾼이 살핀 책은 책손이 읽을 책입니다. 책손 눈길과 헌책방 일꾼 눈길이 하나될 때에 헌책 한 권 새롭게 태어납니다.
책은 껍데기가 낡을 수 있습니다. 껍데기가 낡은 책은 껍데기가 낡을 뿐입니다. 책은 줄거리가 닳지 않습니다. 껍데기가 낡거나 닳더라도 줄거리는 닳지도 않고 낡지도 않습니다. 책에 깃든 줄거리는 책이 처음 태어날 무렵 가장 환하며 고운 빛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빛은 언제까지나 빛날 수 있고, 이 빛은 어느 때부터인가 꺾일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빛나거나 널리 빛난대서 따사로운 빛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밤하늘 뭇별 몰아내고 도시 한복판을 차지한 전깃불빛이 따사롭지는 않으니까요. 개똥벌레 불빛을 밀어내고 자가용이 번쩍번쩍 비추는 등불빛이 너그럽지는 않으니까요. 아궁이 불빛을 쫓아낸 자리에 깃든 손전화 불빛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아이들 맑은 눈빛을 내동댕이친 자리에 스며든 학력차별과 계급차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고운 손길 받아 태어난 책들이 새책방과 도서관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돌다가 헌책방으로 들어옵니다. 좋은 손길 받아 읽힌 책들이 다른 좋은 손길 기다리면서 헌책방에 놓입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는 책손은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바랍니다. 헌책방으로 책마실 떠나는 책손은 생각을 북돋우는 책을 꿈꿉니다. 책손 한 사람이 고르는 책에는 헌책방지기 마음과 손길과 눈빛과 사랑이 고스란히 스며듭니다. 4346.6.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사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