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노야 문학과지성 시인선 95
곽재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1월
평점 :
절판


시와 사랑
[시를 말하는 시 24] 곽재구, 《서울 세노야》

 


- 책이름 : 서울 세노야
- 글 : 곽재구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0.11.20.)
- 책값 : 4000원

 


  서로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이 몽글몽글 샘솟으면서 고운 말이 터져나옵니다. 고운 말 한 마디 터져나오면서 새로운 고운 말이 마주 터져나옵니다. 곧, 이야기가 됩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이 모여 이야기가 되면서 시나브로 노래가 흐릅니다. 노래는 이윽고 싯말 한 가지로 거듭납니다.


.. 대전차 장애물 징검다리처럼 코스모스 꽃길 위에 놓였습니다 ..  (화진포)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을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사랑합니다.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름을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사랑합니다. 해를 바라보는 사람은, 흙을 바라보는 사람은, 개구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제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숲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저마다 이녁이 좋아하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노래하면서 사랑합니다.


  꽃 둘레에서 꽃을 노래하면서 글 한 자락 쓰는 사람들은 꽃글을 써요. 꽃내음 물씬 나는 꽃노래 흐릅니다. 자동차에 둘러싸여 자동차가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예 자동차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자동차 소리와 냄새와 빛깔을 둘레에 퍼뜨립니다.


  굳이 어떤 정치꾼을 손가락질해야 하지 않아요. 아름다운 사람을 환하게 웃으며 섬기면 돼요. 그러면 저절로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야기할 때에 우리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깨달아요. 애써 어떤 나쁜 사람 나무라야 하지 않아요. 아름다운 숲에 깃들어 아름다운 살림 조용히 일구면 돼요. 아름다운 길을 서로 이야기하노라면, 저마다 스스로 찾아나설 즐겁고 좋은 삶을 알아차려요.


.. 마을 이름 고와서 나그네 발걸음 붙드는데 / 외지인이면 무조건 땅 사러 온 줄만 알아 ..  (15쪽)


  삶은 사랑으로 이룹니다. 삶은 혁명으로도 개혁으로도 변혁으로도 이루지 않습니다. 책은 사랑으로 씁니다. 책은 혁명으로도 개혁으로도 변혁으로도 쓰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교육혁명 이루어 무언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낡은 옛 틀에 사로잡힌 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돌보거나 가르치자면 오직 사랑 한 가지를 마음에 품어야 해요. 짝꿍을 사랑하거나 옆지기를 사랑할 적에도 똑같아요.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려는 몸가짐일 때에 비로소 사랑을 나눕니다.


  돈을 많이 번대서 사랑을 잘 하지 않아요. 돈을 많이 벌어야 아이들을 잘 가르치거나 보살피지 않아요. 짝꿍이나 옆지기는 값비싼 바깥밥 사먹거나 값비싼 목걸이나 팔찌나 반지를 꿸 때에 즐겁거나 사랑스럽다 느끼지 않아요. 포근하며 따사롭고 넉넉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즐겁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은 값비싼 장난감 있어야 즐겁게 놀지 않아요. 아이들은 포근하며 따사롭고 넉넉한 기운 감도는 보금자리에서 어버이와 까르르 웃고 뒹굴 때에 즐겁게 놉니다.


  살아가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시를 쓰는 마음은 사랑을 쓰는 마음입니다. 시를 읽는 마음은 사랑을 읽는 마음입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 육만 엥이란다 /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타고 /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 /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 엥이란다 /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 신선하게 퍼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 니빠나 모노 데스네 니빠나 모노 데스네 / 가스불에 은어 소금구이 살살 혀 굴리면서 ..  (유곡나루)


  곽재구 님 시집 《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1990)를 읽습니다. 정태춘 님이 가락을 엮은 시 〈유곡나루〉를 새삼스레 천천히 되읽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고, 노래로도 읊습니다. 곽재구 님은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려고 이러한 시를 썼을까요. 정태춘 님은 무언가를 나무라려고 이 시에 가락을 입혔을까요.


  1980년대에 일본 관광객이 ‘단돈 육만 엔’으로 섬진강 물놀이를 옆에 색시 끼고 즐겼다고 한다면, 2000년대 한국 관광객은 아시아 여러 나라로 ‘단돈 얼마’ 들고 색시놀이 누리려고 떠납니다. 일본 관광객은 섬진강 유곡나루에서 놀아났다면, 한국 관광객은 ‘아시아 여러 나라 섬진강 유곡나루 같은 곳’에서 마구잡이로 놀아납니다.


  노닥거리는 짓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노닥거리는 짓은 한국에서도 보여줍니다. 술집에서 밥집에서 시골마을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노닥거립니다. 밤이 지나간 서울 한복판은 온통 쓰레기밭입니다. 밤새 노닥거린 사람들이 뱉고 버리고 흘리고 쏟은 쓰레기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도시사람은 주말을 맞이해 물과 바람 좋다는 시골로 자가용 몰고 싱싱 나가서 온갖 쓰레기를 시골마을에 뿌리고는 도시로 붕붕 돌아갑니다.


.. 6월이면 해남 땅에 노오란 창포꽃 핀다고 말했더니 / 스물아홉 그 아낙네 귀밑볼이 붉어졌습니다 ..  (만보에서)


  사랑이 있을 때에 시를 씁니다. 사랑을 품는 삶일 때에 시가 샘솟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넋일 때에 시를 나눕니다.


  사랑이 없을 때에도 억지로 시를 쥐어짜낼는지 모르나, 이러한 시는 껍데기로는 ‘시’라고 이름을 붙이더라도, 사랑이 아니기에 시가 되지 못합니다. 억지로 쥐어짜낸대서 사랑이 되지 않아요. 억지로 이름을 갖다 붙인대서 사랑일 수 없어요. 입으로 백 번 천 번 외친다고 해서 사랑이라 하지 않아요.


  조용히 샘솟을 때에 사랑입니다. 시나브로 번질 때에 사랑입니다.


  시끌벅적한 마음으로는 시를 쓰지 못합니다. 시끌벅적한 마음일 때에는 시가 아닌 외침이겠지요. 시가 아닌 울부짖음이나 울음이나 피울음이겠지요. 시가 아닌 아픔이나 눈물이나 설움이겠지요. 시가 아닌 쓰라림이거나 생채기이거나 응어리이겠지요.


  사람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기를 빌어요. 도시사람도 시골사람도 시를 쓸 수 있기를 빌어요. 옛날에는 누구나 시를 썼어요. 일노래가 바로 시였고, 시가 바로 일노래였어요. 남이 가르쳐서 부른 일노래가 아닌, 스스로 지어서 부른 일노래였어요. 삶을 사랑하면서 일노래 한 가락 지어서 불렀어요. 사랑하는 삶을 누리면서 일노래 두 가락 지어서 나누었어요.


..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이 세상 모든 / 탱크와 이념과 철조망을 거둔다면 / 그것조차 또 이념이 된다 ..  (광주에서 시 한 편 쓰기)


  새벽 지난 아침나절에 멧새가 노래합니다. 배고파서 지저귄달 수 있지만, 멧새 새벽노래와 아침노래와 낮노래와 저녁노래와 밤노래를 가만히 들어 보면, 이 노래는 그예 노래요, 삶이자, 사랑이로구나 싶어요. 아이들이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웃고 떠들며 뒹구는 소리를 하나하나 들어 보아도, 모두 노래이면서, 삶이고, 사랑이네 싶어요. 그래서 아이들 말마디는 언제나 시가 됩니다. 아이들 짤막짤막 말마디는 언제나 노래이면서 시이고 사랑입니다. 4346.6.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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