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돋을 자리

 


  면소재지나 읍내 버스역에서도 ‘풀 돋을 자리’는 없다. 고흥을 벗어나 순천으로 가면, 또 광주로 가면, 큰도시 버스역에는 아주 ‘풀 돋을 자리’ 없다. 부산이나 서울 같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도시 버스역을 보면 빈틈 하나 없이 ‘풀 돋을 자리’ 없다.


  인천이나 수원 같은 곳에서 전철을 타면 곧잘 풀을 본다. 뜨겁고 시끄러우며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전철 틈바구니에서 푸른 잎사귀 용하게 뻗고, 하얗고 노란 꽃송이 앙증맞게 매단 풀포기를 곧잘 본다. 너무 마땅할는지 모르는데, 서울 지하철에서는 풀포기를 못 본다. 어두컴컴한 깊은 땅속 돌무더기 사이로도 씨앗을 날려 뿌리내리거나 자랄 풀포기 있을까. 앞으로 지하철이 더는 다니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지하철역 곳곳에 풀포기 돋을 수 있을까. 햇볕 한 줌 들지 못하는 깊은 땅속 시멘트덩어리 사이에 풀씨 드리울 수 있을까.


  시청이나 국회의사당이나 병원이나 아파트에도 ‘풀 돋을 자리’란 없다. 고속도로나 공항에도 ‘풀 돋을 자리’는 없다. 이제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운동장마저 흙을 갈아엎거나 내다버리면서 아스콘이나 인조잔디를 까는 만큼, 학교 운동장에서까지 ‘풀 돋을 자리’는 없다. 예전에는 대학교에도 흙운동장 있었지만, 이제 대학교 흙운동장 하나둘 사라지고 시멘트 건물이나 아스팔트 주차장으로 바뀌니, 대학교에서도 ‘풀 돋을 자리’란 없다.


  풀은 어디에서 돋아야 할까. 풀은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풀을 밀어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숨을 마실까. 풀을 싹 짓밟고 깔아뭉개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얼마나 아끼거나 보살피거나 사랑할 수 있을까. 풀바람 마시지 않고 풀밥 먹지 않으며 풀숨 쉬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노래할 수 있을까. 4346.6.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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