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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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35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이종묵·안대희 글,이한구 사진
 북스코프 펴냄,2011.8.26./18000원

 


  작가가 글을 쓰는 곳은 작가 스스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가난한 이웃들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면, 가난한 이웃들 살아가는 동네에서 똑같이 가난하게 하루하루 살림을 꾸립니다. 삶에서 저절로 글이 태어납니다.


  연예인 이야기를 쓰고 싶으면, 연예인과 같이 지내거나 연예인처럼 살아야겠지요. 운동선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운동선수와 같이 운동하거나 운동선수 곁을 늘 맴돌아야겠지요.


  공장 노동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면, 공장에서 일해야 합니다. 시골 할매 할배 이야기를 쓸 생각이면, 시골에서 할매 할배하고 어울려 흙을 만져야 합니다.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리는 이야기를 쓸 마음이라면, 아이를 낳아 돌보거나 아이들 둘레에서 아이들 생각하는 결을 언제나 살피면서, 즐겁게 함께 놀고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 바쁜 일상에 휘둘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도 얻지 못하다가 유배를 와서야 산수를 즐기는 호사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 절망의 나락에 있는 이들을 위안한 것은 자연과 문학이었다 ..  (6쪽)


  독자가 글을 읽는 곳은 독자 스스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글이나 이야기로만 가난한 이웃들 삶을 만난다면, 독자 가슴에는 아무것도 샘솟지 않습니다. 글이나 이야기에 담긴 이웃들 삶을 내 삶과 같이 느끼는 곳에서 마주해야, 비로소 책읽기가 이루어집니다.


  글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도 같은 곳에 있어야 해요.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삶일 때에는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글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가 아니라면, 짧은 글로든 두꺼운 책으로든, 어느 하나 가슴으로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신문글이건 문학글이건, 독자 스스로 삶이 하나될 때에 제대로 알아듣습니다. 서로 하나되는 삶이 아니라면, 짤막한 편지조차 무슨 뜻인지 읽어내지 못해요.


  사진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겉보기로 멋들어지거나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을 본대서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아름답구나’ 하고 말한다지만, 참말 아름다움을 느껴서 아름답구나 하고 말한다고는 여길 수 없어요. 삶이 있을 때에 사진을 찍고, 삶이 있기에 비로소 사진을 읽습니다. 삶을 일구기에 사진을 찍으며, 삶이 있는 만큼 차근차근 사진을 읽어요.


.. 바다도 아름답고 백사장도 물론 아름답지만 나로도는 나무가 가장 아름답다. 우리 나라에서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 해도 과하지 않으리라 … 마음의 평화를 얻은 최익현은 흑산도로 들어가 몇 달씩 머물다 돌아왔다. 흑산도에서는 천촌리에 일신당이라는 현판을 단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쳐 생계의 수단 겸 삶의 위안으로 삼았다 ..  (97, 240쪽)


  공무원이란, 심부름꾼입니다. 공무원이란, 행정을 맡는 일꾼이 아닌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 공무원은 동사무소나 면사무소나 이런저런 공공기관 이름 붙은 건물에 깃든 채 서류를 만지작거립니다. 공무원 스스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이리하여 ‘민생’하고 동떨어진 정책과 개발이 자꾸 이루어집니다. 공무원 스스로 가난한 골목동네 주민으로 지내지 않으니, 골목동네 재개발을 언제나 ‘막개발’ 되도록 아무렇게나 꾸리고, 사람들이 쓰는 민원서류 양식이 까다롭지요.


  정치를 한다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이와 같아요. 정치꾼들은 언제나 입술에 ‘민생’이라는 낱말을 달고 지내지만, 정치꾼 스스로 ‘여느 사람들 삶’을 누리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만원버스나 지옥철을 타는 정치꾼이 없습니다. 오토바이 싱싱 달리고 자동차 멋대로 선 고단한 거님길 아슬아슬하게 걸어다니면서 일터를 오가는 정치꾼이 없습니다. 자가용 아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정치꾼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요. 그런데, 정치꾼만 이렇게 살지 않아요. 초·중·고등학교 교사도 으레 자가용 출퇴근을 합니다. 대학교수도 흔히 자가용 출퇴근을 해요.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나 두 다리로 일터를 오가는 교사와 교수가 나날이 줄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나란히 천천히 걸어서 하루를 열고 삶을 생각하는 교사와 교수는 몇 사람쯤 있을까요.


  더 생각하면,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 이 밥이 되기까지 흙을 일구고 돌보며 아낀 흙일꾼 삶이나 넋이나 꿈을 돌아보는 도시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판사나 의사는 시골 흙일꾼을 얼마나 생각할까요. 버스나 택시 일꾼은 시골 할매와 할배를 얼마나 생각할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시골 논밭이랑 숲이랑 멧골이랑 바다를 얼마나 생각하며 하루를 보낼까요. 이 나라 아버지들은 이 나라 어머니들 삶을 얼마나 이녁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읽으려고 할까요.


.. 조관빈은 나로도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유배객을 돌봐 주는 이가 없어서 밥을 거르기 일쑤였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서른이 넘도록 밥을 굶은 적이 없다가 늘 배에서 우레처럼 요란한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였다. 주린 배를 안고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시를 쓰고 꽃을 가꾸는 일뿐이었다 ..  (106쪽)


  이종묵·안대희 님 글과 이한구 님 사진이 어우러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북스코프,2011)를 읽습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관리나 학자로 지내다가 임금님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외딴 섬마을로 가야 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오늘날에도 고흥이나 강진이나 해남이나 통영이나 거제는 서울하고 참 멀다 할 만하지요. 고속도로 많고 자가용 넘치지만,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은 서울과 같은 큰도시하고 많이 멉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창 이름을 드날리거나 어떤 권력을 누리던 이들로서,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기 힘들다 느끼며 섬마을에서 지내야 한다 했을 때에, 참 외롭고 슬프며 힘들다 여겼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서울에서도 살고 시골에서도 살아요.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밥을 먹고 옷을 입어요. 서울사람이라면, 또 서울에서 지내는 관리나 학자나 임금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흙을 안 만지고 물도 안 만지겠지요. 남이 해 주는 밥을 먹고, 남이 실을 짜고 베틀을 밟아 천을 엮어 바느질로 깁은 옷을 얻어서 입겠지요. 어느 임금이나 학자도 이녁 옷을 스스로 지어서 입지 않아요. 어느 임금이나 관리도 이녁 집을 스스로 지어서 살지 않아요.


  다시 말하자면, 관리나 학자는 서울에서 이럭저럭 자리 하나 얻어 관직을 누리거나 학문하는 글을 쓴다 할 적에는 ‘밥도 옷도 집도’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모든 자리 빼앗기거나 잃어 깊디깊은 두멧시골로 떠나야 한다면, 이때부터 ‘밥이랑 옷이랑 집이랑’ 모조리 스스로 건사하면서 살아야 해요.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할 적에는 보금자리와 마을과 삶터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제부터 시나브로 풀을 느끼고 꽃을 알아채며 나무를 깨닫습니다. 서울에서 지낼 적에는 눈여겨볼 수 없던 풀과 꽃과 나무가, 시골에서 지내면서 하나씩 둘씩 마음 깊이 스며들어요. 사람이 살아가며 누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어떻게 이루는가 생각합니다. 사람다운 푸른 숨결이 어떠한가 생각합니다.


  어디를 바라보는 삶인가요. 무엇을 생각하는 사랑인가요. 서울에 계신 분들한테 전남 고흥이나 경남 통영은 ‘두멧시골’ 또는 ‘외딴섬’입니다. 거꾸로, 전남 고흥이나 경남 통영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서울은 ‘풀도 꽃도 나무도 마주하지 못하고, 숲이나 바다나 멧골 모두 누리기 어려운’ 어딘가 얄궂거나 뒤틀린 곳입니다. 숲이 없는데 어인 사람이 이토록 많은 서울일까요. 바다가 없는데 어인 자동차는 이토록 넘치는 서울일까요. 멧골이 없는데 어인 아파트와 건물이 이토록 춤추는 서울일까요.


  어떤 옛사람이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 하고 말했지만, 사람은 나면 시골로 보내어 시골숨 마시는 착한 넋 되도록 할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서울도 이제는 숲이 늘고 찻길 줄면서, 수돗물 아닌 시냇물 흐르고 자동차 배기가스 아닌 맑은 구름이 흐르는 시골자락 기운이 깃들어야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에, 서울에서 살며 문학을 하는 이들이 살가운 문학 이루겠지요. 이럴 때에, 서울에서 정치를 하거나 행정을 맡는다는 이들이 살가운 이웃사랑 나누겠지요. 4346.6.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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