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매무새

 


  고흥서 부산으로 시외버스 네 시간, 부산에서 고흥으로 다시 시외버스 네 시간, 이틀에 걸쳐 이렇게 움직이니 몸이 무척 무겁다. 엉덩이는 아프고 등허리는 결린다. 꼼짝을 못하고 앉아야 하는 시외버스에서 기지개조차 마음껏 하지 못한다. 쪽잠을 자고 쪽책을 읽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요 책을 말하는 사람이니, 이렇게 시외버스에서까지 책을 읽는다 할 만하다고 느낀다. 글을 안 쓰고 책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는 분이라면, 그야말로 책을 사랑하는 분일 테고, 아니면 마음다스리기를 훌륭히 하는 분이리라 생각한다.


  부산에서 고흥으로 돌아오는 버스길에서, 어느 젊은 가시버시가 버스 일꾼더러 “왜 텔레비전 안 켜 주세요?” 하고 묻는다. 버스 일꾼은 전라도말로 구수하게 “텔레비전? 지금 시간에 뭔 재미있는 게 한다고?” 하고 얘기하다가 “심심하다면 틀워 줘야지.” 하고 덧붙인다. 낮에 부산을 떠난 시외버스가 순천을 거쳐 저녁 즈음 벌교 지나고 고흥으로 접어들 무렵, 버스 일꾼은 “이제 야구 봐야제. 며칠 야구 못 봤더니 애가 타네.” 하고 말하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바꾼다. 처음에는 “어, 이기 아닌데.” 하고 또 “이기도 아닌데.” 한다. 아하, 야구가 나오더라도 광주를 안방으로 삼는 구단 경기가 나와야 한다는 뜻이로구나. 광주 안방 구단 어느 선수가 친 공이 죽죽 뻗다가 외야 울타리 코앞에서 잡히자, 버스 일꾼은 “아이고야!” 하고 외친다. “나가 브레이크를 끽 밟았으면 못 잡는 긴데.” 하고 덧붙인다. 버스 일꾼 바로 뒤에 앉은 아가씨와 아줌마가 깔깔 웃는다.


  네 시간 즈음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쥘 만할까. 두 시간 즈음 달리는 전철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들 만할까. 한 시간 즈음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시내버스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잡을 만할까. 자율학습과 보충수업과 학원과 과외가 잇달으며 대입시험공부로 들볶이는 푸름이들이 책을 손에 댈 만할까. 카드값과 할부금과 대출금에 목을 매다는 회사원들이 책을 손에 가까이 둘 만할까. 공무원들은, 공장 노동자들은, 국회의원이나 정치꾼은, 의사나 간호사는, 대통령이나 비서는, 장관이나 차관은, 회사 대표나 간부는, 교사나 교수는, 건물 청소부나 이주 노동자는, 저마다 책 한 권을 손에 쥘 만할까.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책을 마주하면서 삶을 읽거나 사랑을 헤아리거나 꿈을 떠올릴까.


  책을 읽는 매무새는 삶을 일구는 매무새라고 느낀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매무새는 삶을 사랑하려는 매무새라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매무새 되어 이웃을 사귀고 동무를 만나며 하루를 누릴까. 어떤 책이 이 나라 사람들 손으로 스며들까. 4346.6.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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