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 삶이 길이 되고 꿈이 땀이 된 고졸 청년들의 이유 있는 선택
박영희 지음 / 살림Friends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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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 도시로 보내는 대학교
―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박영희 글
 살림출판사 펴냄,2012.11.16./12000원

 


  더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대학에 간대서 대수롭지 않고, 대학에 안 간대서 대단하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다녀야 똑똑하지 않으며, 대학교를 안 다녔으니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사람은 됨됨이로 따집니다. 됨됨이가 착한가 참다운가 고운가를 따집니다. 겉모습이나 얼굴이나 몸매가 어떠한가를 놓고 사람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껍데기로 사람을 재거나 따지는 흐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려 하고, 저마다 스스로 높이려 합니다. 이웃이 어느 대목에서 아름다운가 하고 살피려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이렇게 더 예쁘고 저렇게 더 멋지다고 뽐내려 합니다.


  생각해 봐요. 우리는 누구도 거울 볼 까닭 없어요. 우리는 누구도 머리 생김새나 모양을 예쁘게 보이려고 애쓸 까닭 없어요. 치마가 더 짧아야 하거나 길어야 하지 않아요. 양복을 입어야 하거나 벗어야 하지 않아요. 상표 드러나는 옷을 입거나 벗어야 하지 않아요. 자가용을 타거나 버려야 하지 않아요.


  거울을 볼수록 ‘성형미인 사회’가 됩니다. 옷차림에 마음을 쓸수록 ‘나와 네가 이루는 사회를 겉치레 수렁’으로 내몹니다. 혼인신고서 있어야 부부이지 않아요. 출생신고서 있어야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졸업증명서 있으니까 학문을 잘 한다거나 머리에 든 지식 많지 않아요. 자격증 있으니 어떤 일 잘 하지 않아요.


  면허가 생기고 자격이 나타나면서 계급이 생기고 신분이 나타나요. 어떤 면허가 있어야 머리를 깎을 수 있거나 자동차를 몰 수 있도록 하니까, 계급이 생깁니다. 어떤 자격이 있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거나 호봉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니까, 신분이 나타납니다. 졸업장 사회란 면허증 사회요, 자격증 사회입니다. 학벌 사회란 계급 사회요, 신분 사회입니다.


.. 왜 대한민국 학생들은 재학 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살로 그 답안지를 내는 걸까? 이 문제에 어른들은 아무런 지은 죄도 없는 것일까 …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대학교 진학이 의무교육처럼 되어 버린 걸까. 고등학교 졸업만으로는 정말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것일까 ..  (6∼7쪽)


  우리 사회 어른들은 아이들을 대학교로 보내려 애씁니다. 우리 사회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을 대학교로 안 보내려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대학교에 앞서, 제도권학교에 안 보내려 하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몫 스스로 맡으려 하는 어른은 훨씬 적습니다. 우리 사회 어른들은 저마다 일자리 지켜야 한다 말하면서, 아이 가르치는 몫을 학교한테 떠넘깁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앞날 만들도록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스스로 꿈을 품지 못해요.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학교는 꿈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곳 아니에요. 학교는 직업 가르치거나 배우는 곳이요, 그나마 직업훈련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곳도 아니라, 어떤 직장에서 입사시험 치를 때에 내놓을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내주는 곳이 학교입니다.


  대학교 보내려 하는 고등학교입니다. 고등학교 보내려 하는 중학교입니다. 중학교 보내려 하는 초등학교예요. 초등학교 보내려 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이지요. 그러니,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부터 아이들이 다닐 까닭 없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저희 나이에 맞게 삶을 배우거나 놀이를 즐기지 못해요. 오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앞서 ‘머리에 쌓을 지식’ 주워섬기는 데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입니다.


  초등학교도 이와 같아요. 중학교에 보낼 아이들한테 더 많은 지식을 주워섬기도록 하는 데가 초등학교예요. 나이에 맞게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꿈꾸며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는 초등학교가 아니지요. 온갖 시험과 체험학습과 영어교육에 푹 빠진 초등학교입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아예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아요. 다른 것은 하나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한테 참사랑 가르치는 학교 있나요. 중학생과 고등학생한테 ‘독립된 생활 스스로 일구도’록, 그러니까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에다가 아이돌보기와 살림하기를 골고루 가르치는 데 있나요?


.. 혜영 씨가 공부에 기겁을 한 것은 오빠를 지켜보면서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빠의 귀가는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저렇게까지 공부를 해서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열다섯 살 소녀의 눈에는 그것이 ‘미친 짓’처럼 보였다 … “조선소에서 일할 때 대학을 갓 졸업한 관리자가 있었는데, 상대방 나이에 상관없이 아주 막 대했어요. 잘리고 싶지 않거든 똑바로 하라며 엄포를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요. 정말 화가 나는 건 거의 일방적으로 현장 근무자들을 깔아뭉개고도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는 늘 이런 식이었어요. 아니꼽거든 공부해서 출세하라는.” ..  (17, 185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수록 바보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졸업장과 자격증을 한 가지라도 더 따면 딸수록 바보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생각해 보면 쉬 알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목수 가운데 대학교 나온 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학교에서는 집짓기 안 가르칠 뿐 아니라, 못 가르쳐요. 남대문도 동대문도 ‘학교 안 나온 목수’가 지었어요. 목수가 다룬 나무는 ‘학교 안 다닌 나무꾼’이 베었어요. 산림학이나 임학 배운 학자가 벤 나무가 아니에요. 숲 해설가나 숲 전문가가 고른 나무를 베어서 옛 건물이나 절집 짓지 않았어요.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친 사람들 가운데 ‘학교 다닌 사람’ 아무도 없어요. 모내기를 하고 가을걷이 하는 흙일꾼 가운데 ‘학교 다니며 흙일 배운 사람’ 아무도 없어요. 고기잡이를 대학교 나와야 하지 않아요. 낚싯대를 대학교 나와야 만들지 않아요.


  호미질, 낫질, 삽질, 괭이질, 써레질, 갈퀴질, 키질, 절구질, 방아질 들을 대학교에서 어느 한 가지도 못 가르쳐요. 아니, 하다못해 바느질조차 대학교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어디에서 가르치나요. 뜨개질이라도 가르치는 학교가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아이들 자장노래 한 가락 못 가르쳐요.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신나게 즐기는 놀이 한 가지 못 가르쳐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그림책 읽는 매무새’ 가르치지 못해요. 더군다나, 학교에서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올바르게 쓰는 몸가짐’ 못 가르쳐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라면 한 냄비 끓이는 법도 못 배우고, 두부 썰기나 무 썰기조차 못 배웁니다.


..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 인문계 학생들이 실업계들 온다며 후다닥 자리를 뜨곤 했죠. 실업계가 무슨 벌레도 아니고, 기분이 좀 드럽긴 했습니다.” … “인간의 기억이 무섭긴 했어요. 다른 교사들은 결석을 해도 충고 몇 번에서 그쳤는데 유독 그 교사만 저를 눈물 나게 팼거든요. 그것도 주먹으로요. 차라리 매나 몽둥이로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교사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조폭처럼 두들겨팼습니다.” ..  (28, 79쪽)


  박영희 님이 쓴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살림출판사,2012)를 읽습니다. 대학교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을 읽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아쉽다면 아쉽다 할 대목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거나 물 만지며 살아가는 ‘시골아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들 도시에서 일자리 찾아 도시에서 보금자리 마련하려는 ‘도시아이’만 보입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이들을 도시에서 가르쳐 도시에 남도록’ 하는 학교만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아이들을 도시로 나가도록 가르쳐 시골을 떠나도록’ 하는 학교만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 가운데 ‘굳이 도시에만 남지 말고 시골로도 가서 네 꿈을 펼치고 네 사랑을 나누어라’ 하고 가르치는 데는 거의 안 보여요. 시골에 있는 학교 가운데 ‘너희가 시골에서 태어난 보람을 기쁘게 누리며, 시골 빛내는 아름다운 젊은 일꾼 되어라’ 하고 가르치는 데는 거의 찾을 길 없어요.


.. “2학년 1학기는 담임에게 얻어맞은 기억이 전부일 정도로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반 친구들 다 가는 수학여행 빠진다며 때리고, 시험 때면 성적 처졌다고 때리고.” … 유치원 교사를 파견하는 업체? 당장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아낸 동효 씨는 다음날 그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 역시 학력에서 손을 내저었다. “최종 학력이 고졸이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더군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어요.” ..  (174, 209쪽)


  모든 사람 도시로 보내는 대학교입니다. 대학교가 말썽거리가 된다면, 다른 어느 대목보다, 대학교는 사람을 온통 도시로만 보내기에 말썽거리라고 느낍니다.


  사람을 온통 도시로만 보내니, 도시에는 사람이 철철 넘치고 시골은 사람이 텅텅 빕니다. 사람이 철철 넘치는 도시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서로 ‘사람 값어치’를 못합니다. 회사나 공장에서는 사람을 알뜰히 여기지 않고 톱니바퀴로 여깁니다. 소모품이나 부속품처럼 여겨, 한 사람 그만두어도 얼마든지 새로 일할 사람 많다고 거들먹거립니다. 도시에서 회사 일꾼이나 공장 일꾼 된 이들은 어느새 톱니바퀴 되어서 ‘나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내 밥그릇’ 잃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잡습니다. 이러는 동안, 도시에서 일자리 찾은 나도 괴롭고, 도시에서 일자리 아직 못 찾은 남도 괴롭습니다. 모두 괴롭습니다.


  사람을 죄 도시로 보내도록 꾸리는 제도권 교육과 사회는 사람 스스로 사람을 바보로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그러니까,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라는 책은 대학교에 안 간 젊은이 몇 사람 만난다고 해서 뾰족한 풀이법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래, 대학교 안 가고도 씩씩하게 일자리 찾은 젊은이 몇 사람 있네, 하는 데에서 이야기 끝납니다. 이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면 좋을는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면 아름다울는지, 어른과 아이 모두 어떤 꿈을 꾸며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같은 대목은 조금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골에서 살아가자면 대학 졸업장 부질없습니다. 마늘밭에서 마늘을 뽑는데, 팔힘과 허리힘 있어야지, 졸업장은 아무것 아닙니다. 논에 모를 심고 피를 뽑을 때에 자격증 있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허리에 힘이 있고 팔에 힘이 있어야 모심기를 하지요.


  쌀을 일고 불려서 밥을 지을 때에 졸업장으로 밥짓지 않아요. 밥상 차리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 씻기고 입히는 데에 졸업장 있거나 말거나 아무것 아니에요. 오직 사랑 있어야 밥상 차리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 보살핍니다.


  도시에서 일자리 찾는 아이들한테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같은 책은 ‘졸업장 없는 채 얼마나 뼈빠지게 힘쓰며 애써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제도권 학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모질게 다루거나 들볶는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읽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꿈과 사랑이 아직 없습니다. ‘대학교에 가지 않아’도 아름답게 살아갈 아이들은, 고등학교나 중학교 안 가도 아름답게 살아가요. 그러니까, 아름답게 살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모습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괴롭히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건드려야 옳아요.


  푸념과 한숨으로는 아무것 달라지지 않아요. 비아냥과 손가락질로는 제도권 톱니바퀴는 그저 단단하게 버틸 뿐입니다.


  도시 아닌 시골에서 살아갈 길을 말할 수 있기를 빌어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랑스러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찾으면서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대학교 가지 않고도 아름답게 살아가는 젊은이처럼, 대학교 다니고 마친 뒤에 아름답게 살아가는 젊은이 있어요. 우리는 이제 ‘대학교’는 그만 말해야지 싶어요. 우리가 말할 대목은 오직 하나, ‘아름다움’이에요.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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