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 지식은 내 친구 5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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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56

 


사진은 ‘잘’ 찍어야 하는가
―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사진·글,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2013.2.20./1만 원

 


  사진은 ‘잘’ 찍어야 하는가 궁금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할 적에 ‘잘’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잘’과 ‘잘못’은 누가 따지며, 어떤 잣대로 따지고, 어떤 틀거리로 따져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대학교에 사진학과 있고, 곳곳에서 사진강좌 엽니다. 모두들 사진을 이야기하고 사진찍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학교에서건 강좌에서건 으레 ‘사진 잘 찍기’ 쪽으로 기울어지곤 합니다. ‘사진찍기’아닌 ‘사진 잘 찍기’로 치우칩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글을 가르치는 학교나 강좌에서 ‘글쓰기’ 아닌 ‘글 잘 쓰기’를 가르치는지 생각합니다.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나 강좌에서 ‘그림그리기’ 아닌 ‘그림 잘 그리기’를 가르치는지 생각합니다.


  노래를 가르치는 곳, 춤을 가르치는 곳, 도자기 빚기를 가르치는 곳, 아이 돌보는 삶 가르치는 곳, 밥과 반찬 하는 살림살이 가르치는 곳, 자동차면허 따도록 가르치는 곳, 자전거 타기 처음 가르치는 어버이, …… 모두들 무엇을 가르칠까요. ‘잘 하도록’ 가르치나요, 다른 대목을 가르치나요.


.. 한번은 순록을 찾으러 강 근처 언덕에 올라간 적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알래스카 북극권의 끝없는 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잿빛 덩어리가 느릿느릿 움직였지요. 같이 있던 일행이 “그리즐리(곰)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야생 곰을 처음 본 순간이었습니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드넓은 풍경 속의 한 점으로 보일 뿐이었는데도 엄청난 힘이 느껴졌습니다 …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에게 동물이란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  (4쪽)


  사진잔치 열린 곳에 가서 “참 잘 찍었다” 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면, 사진잔치 마련한 사람은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할 만한지, 사진을 읽는 분이 사진을 “잘 읽었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잘’ 찍기는 하되, ‘이야기’를 찍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좋거나 빛나는 사진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시를 읽거나 소설을 읽거나 산문을 읽는 이들이 ‘잘’ 쓴 글을 읽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잘 쓴 시’를 읽으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잘 쓴 시’ 흉내를 내면서 ‘시 잘 쓰기’를 하면 즐거울까요?


  그림을 ‘잘 그려야’ 그림맛이 날는지 궁금합니다. 서울 홍대 언저리에 미술학원 수두룩하게 많고, 미술학원 앞에는 ‘잘 그린’ 작품을 내놓아 아이들을 부릅니다. 아이들한테 ‘그림 잘 그리기’를 가르쳐서 홍대이니 다른 미술대학이니 들어가도록 북돋우는데, 이런 ‘잘 그린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좋거나 빛나거나 훌륭한지 궁금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학원이나 미술대학에서 아이들한테 ‘그림 잘 그리기’만 가르치는 오늘날 흐름으로 어떤 아름다운 그림 태어나는지 궁금해요. 이야기는 없이, 곧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그럴듯한 ‘잘 그린 그림’으로 사람들 가슴을 얼마나 사로잡을 만한지 궁금합니다. 아니, 그림을 그린 사람 스스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즐거움 누리면서 그림을 그렸나요?

 

 


.. 빙하가 무너져 내린 곳의 바닷물이 높이 솟구치더니 집채만 한 파도가 내 쪽으로 몰려왔습니다. 순간 나는 몹시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  (17쪽)


  한국에서 사진기 없는 사람 없다 할 만큼, 사진기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내로라 할 만한 사진작가는 손꼽기 쉽지 않습니다. 다들 값비싸거나 값나가는 사진기를 갖출 만한 돈은 있고, 넉넉한 돈으로 넉넉한 사진장비 그러모으지만, ‘사진 잘 찍기’에 휘둘리느라, 정작 ‘내 삶 내 사진으로 나 스스로 찍기’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든다고 해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잘 찍은 사진이라서 작품이 되지 않아요.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작품은 ‘이야기 있는 사진’일 때에 작품이라는 이름이 붙어요.


  한국에서 사진잔치 열거나 사진책 내놓는 사진작가 제법 많습니다. 나라밖에서 사진잔치도 열고, 나라밖 사진잡지에 작품을 싣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진 이곳저곳 들여다볼 때에, 가슴 후벼파도록 찡 울리는 작품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첨단을 달린다든지 유행에 앞선다든지 새로운 실험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이야기는 억지로 쥐어짜거나 만든다고 해서 태어나지 않아요. 어떤 주제를 또렷이 드러내려고 손질을 하거나 포토샵 프로그램 만진다고 해서 ‘사진’이 되거나 ‘작품’이 되지 않아요. 빅토르 위고 님이 쓴 글에 생명력 넘치는 까닭을 읽어야 해요. 정약용 님이 쓴 글이 수백 해 흐르도록 되읽히는 까닭을 읽어야 해요. 아무리 지구별에서 미국이 큰힘 뽐내어도 한국사람이 한글로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담아내는 까닭을 읽어야 해요.


  한국에서 사진길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걸어온 분들이 사진강의를 마련하고 사진이론 펼치며 사진책 내놓습니다. 그렇지만, ‘사진 원로’라 일컫는 분들 말씀 가운데 가슴 깊이 아로새길 만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곤 합니다. 참말 아리송합니다.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 아득히 먼 옛날 산에 내려 쌓인 눈이 빙하가 되고, 그 빙하를 녹여 내가 마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바닷가로 밀려온 빙하 조각들은 곧 밀물에 쓸려 다시 바다로 돌아가겠지요. 그리고 녹아서 바닷물이 되겠지요 ..  (19쪽)


  빨래를 잘 하는 법은 없습니다. 밥을 잘 하는 법은 없습니다. 걸레질이나 비질 잘 하는 법은 없습니다. 집을 잘 짓는 법이라든지, 바느질 잘 하는 법이라든지, 호미질 잘 하는 법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다른 어느 갈래에서도 없는 ‘잘’이라 하는 대목을, 사진밭에서 자꾸 들춥니다. 사진작가 스스로 ‘잘 찍기’라는 수렁에 빠집니다. 사진비평가 스스로 ‘잘 찍기’라는 그물에 걸립니다. 사진기 장만해서 사진모임 즐기려는 여느 사람들조차 ‘잘 찍기’라는 올가미에 사로잡힙니다.


  얼짱각도란 없습니다. 얼짱각도란 바보 되는 사진틀입니다. 제아무리 얼짱각도로 꾸며서 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싱그럽게 짓는 웃음꽃 묻어나는 ‘잘 못 찍은’ 사진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얼짱각도 사진에는 어떤 이야기도 꿈도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싱그럽게 짓는 웃음꽃을 놓치지 않고 즐겁게 사진 하나로 담으면, 살짝 흔들렸든 빛이 덜 맞았든 한쪽으로 기울어졌든 다 괜찮습니다. 즐겁고 재미나며 아름다운 이야기 한 자락 담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싱그럽게 짓는 웃음꽃 담은 사진 한 장은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 ‘이야기 피어나는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렘브란트 님이라든지 벨라스케스 님이라든지, 이런 그림쟁이가 빚은 그림은 ‘잘 그린 그림’ 아닌 ‘이야기 있는 그림’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 빚는 그림’이고 ‘이야기 넘치는 그림’입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도록 이끄는 그림이에요.


  사진에서도 이와 같을 때에 아름답다고 말해요. 사진 한 장 보면 볼수록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 북돋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사진이라고 말합니다. 벽에 붙이든 지갑에 넣든, 꺼내어 들추든 날마다 마주하든, 들여다볼 적마다 마음 깊이 사랑스러운 꿈 한 자락 피어나도록 이끄는 이야기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고 ‘작품’입니다.

 

 


..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다표범들이 잠든 틈을 타서 천천히 카약을 몰고 다다갔습니다. 이따금 어미 바다표범이 눈을 뜨고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어미 바다표범은 마음을 놓고 다시 잠에 빠집니다.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노를 한 번 더 저었더니, 너무 가까워져 카메라 초점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새근새근 잠든 어미와 새끼를 깨울까 봐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  (20쪽)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과 글로 엮은 사진책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논장,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는 아이들이 읽을 만한 판으로 엮었습니다.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입니다. 어린이가 함께 읽으면서 사진을 생각하거나 꿈꾸도록 이끄는 사진책입니다. 아주 쉽고, 부드러우며, 따사롭습니다. 사진이란 이렇게 쉽다고 이야기하고, 사진이란 이처럼 부드럽다고 이야기하며, 사진이란 이토록 따사롭다고 이야기합니다.


.. 눈이 녹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작은 꽃들이 한꺼번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 생명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요 … 눈이 녹은 곳으로 텐트를 옮겼는데, 흙냄새가 무척 좋았습니다 … 긴 겨울이 끝나자, 모두 햇빛에게 고마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  (27, 28쪽)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을 들여다보고, 호시노 미치오 님 글을 읽습니다. 사진에서도 글에서도, 참말 “햇빛에게 고마워 하는” 느낌 감돕니다. 참 즐겁구나 싶은 사진이며 글입니다. 참 재미있고 따사롭구나 싶은 이야기입니다.


  곰곰이 돌아보셔요. 호시노 미치오 님은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알래스카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몸으로 알래스카를 누비고, 마음으로 알래스카를 사랑하며, 사진으로 알래스카를 담고 싶습니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세 흐름입니다. 몸으로 실컷 껴안습니다. 마음으로 듬뿍 들이마십니다. 사진으로 기꺼이 담습니다.


.. 카메라가 얼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잤습니다.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밤, 북쪽 하늘에 한 줄기 파르스름한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 신비로운 빛은 점점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오로라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았습니다. 어찌나 격렬하게 움직이던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로라의 춤이 펼쳐지는 밤하늘은 쥐 죽은 듯 고요합니다. 지금 이 광대한 알래스카 산맥에 있는 것은 오직 나뿐입니다. 홀로 드넓은 극장 무대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따뜻하게 데워 놓은 카메라로 사진을 잔뜩 찍었습니다 ..  (37쪽)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를 교재로 쓴다면, 사진길에 첫발 내디딜 젊은이들 가슴에 아름다운 사랑 깃들도록 이끌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진평론 하는 분들이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를 틈틈이 알리고 얘기하면, 사진삶 돌아보려는 사람들 마음에 좋은 꿈 심도록 북돋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은 잘 찍어야 하지 않고, 잘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즐겁게 찍을 노릇이요, 사진은 즐겁게 가르칠 노릇입니다. 사진을 즐겁게 읽으면서, 사진책 또한 즐겁게 장만해서 꾸준히 들여다볼 노릇이에요.


  즐거울 때에 삶이 빛나듯, 즐거울 때에 사진이 빛나요. 사랑할 때에 삶이 아름답듯, 사랑할 때에 사진이 아름답지요. 꿈꿀 때에 삶이 좋은 결로 흐르듯, 꿈꿀 때에 사진이 좋은 결로 태어납니다.


  삶이 사진을 빚습니다. 삶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을 사랑할 때에 사진기 쥔 손이 해맑고 푸릅니다. 4346.5.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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