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으려는가
겉말을 하는 책이 있고, 속말을 하는 책이 있다. 겉말을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누구라도 이 책에서도 아름다운 넋이나 꿈이나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다. 책쓴이 스스로 비록 겉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더라도, 읽는이 스스로 속넋과 속꿈과 속사랑 헤아리려는 매무새라면, 얼마든지 아름답게 읽을 수 있다. 거꾸로, 속말을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책쓴이가 들려주는 속넋과 속꿈과 속사랑을 못 받아먹는 사람이 많기도 하다. 왜냐하면 읽는이 스스로 겉넋에 매인 채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책 하나 코앞에 놓았어도 어떠한 마음밥도 못 얻는다.
곰곰이 따지면, ‘읽을 만한 책을 제대로 못 골랐’대서, 읽는이 스스로 마음밥을 못 얻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어떠한 책을 골라서 손에 쥐더라도 이녁 마음밭 살찌우는 밑거름 되는 이야기를 만나거나 깨우친다. 이런 책을 고르거나 저런 책을 쥐어야 하지 않다. 읽는이 스스로 어떤 마음가짐인가부터 슬기롭게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읽는이 스스로 늘 눈을 밝히고 마음을 밝히면서 사랑을 밝힐 노릇이다. 이러는 동안 천천히, 그러니까 시나브로, ‘어느 책을 읽어도 마음을 살찌울 수 있기’는 하더라도, ‘겉말 아닌 속말 들려주는 책으로 읽는이 마음밭 살찌우는 길을 걸어간다’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속말을 들려주려고 책을 쓰는 사람 가운데 살림돈 넉넉하게 다스리는 사람이 퍽 적다. 책에 담을 속말을 알뜰살뜰 빚느라 다른 데에는 거의 마음을 안 쏟기 일쑤이다. 아니, 마음을 쏟을 수 없으리라. 책쓴이 스스로 이녁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글·그림·사진이 무엇인 줄 깨달았으니, 이 길로 씩씩하게 걸어갈 뿐, 샛길로 빠질 수 없으리라. 한길을 걸어가니 뒷길을 갈 까닭 없다. 한길을 걸어가기에, 숲길로도 접어들고 들길로도 접어든다. 하늘길이나 바닷길이나 가리지 않는다. 오솔길도 좋고 골목길도 좋다. 그저, 뒷길로는 안 갈 뿐이다.
겉말을 하는 책이란, 뒷길로 가는 책이겠다고 느낀다. 뒷길로 간대서 꼭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지름길이나 에움길이라면 재미있는 길이 될 테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언제까지 뒷길을 갈 수 있을까. 책을 쓰는 어른으로서 한때 뒷길을 간다 하더라도, ‘어른인 이녁이 아이를 낳아서 살아간다’고 하면, ‘이녁 아이한테도 뒷길로 가는 삶’을 물려줄 만하겠는가.
책은 늘 오늘 읽는다. 오늘 읽을 책을 장만해서 오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노자이건 루소이건 소쿠리이건, 이들 이야기 읽는 사람들은 옛날 옛적 이야기 아닌 오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읽는다. 헌책방에서 사들여 읽건 도서관에서 빌려 읽건 새책방에서 장만해 읽건, 모두 읽는이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로 스며드는 책이 된다. 그러니까, 오늘 이곳에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어떤 책을 읽으려 하는가. 어느 책을 읽더라도 읽는이 스스로 매무새 슬기로이 다스리면 모두 마음밥이 되니까, 겉말이건 속말이건 굳이 안 가리고 책을 집어들어도 되는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고운 이웃과 예쁜 아이들한테 물려줄 책들을 우리 집에 어떻게 갖추려고 하는가. 내가 읽은 책은 ‘나 혼자 읽는 책’이 아니다. 내가 장만해서 읽은 책은 먼 뒷날 다른 누군가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새롭게 만나 읽을 책이 된다. 먼 뒷날 살아갈 우리 이웃과 아이들은 앞으로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만날 때에 즐겁고 흐뭇하며 아름답게 삶을 일굴 만할까.
어제 오늘 앞날은 모두 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내가 오늘 읽는 책 하나는 앞으로 이 땅 아이들이 새롭게 만나서 읽을 책 된다. 나는 오늘 어떤 책을 읽으려 하는가. 우리들은 오늘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스스로 아름다운가. 4346.4.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