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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가 잘 사는 법 - 김응 동시집
김응 지음, 박정섭 그림 / 창비 / 2012년 12월
평점 :
시를 사랑하는 시 12
동시를 왜 쓰는가
― 똥개가 잘 사는 법
김응 글,박정섭 그림
창비 펴냄,2012.12.31./8500원
‘주례사 비평’이라는 이름을 어느 분이 처음 꺼냈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이 ‘주례사 비평’이라는 이름은 으레 어른문학에서 오르내렸습니다. 어린이문학에서는 좀처럼 이 이름이 오르내리지 못했습니다. 한때 딱 한 사람, 이오덕 님 홀로 ‘주례사 비평 비판’을 했으나, 이제 어린이문학에서 ‘주례사 비평 비판’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분들은 거의 모두 ‘주례사 비평’을 하면서, 이 나라 동시문학을 깊거나 넓게 다스리는 길에 한몫 거드는 구실을 못 하거나 안 하는구나 싶습니다.
김응 님 동시집 《똥개가 잘 사는 법》(창비,2012)을 읽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들려주며 즐겁게 놀 만한 싯노래는 따로 없구나 싶어 살며시 덮습니다. 책을 덮기 앞서 책끝에 붙은 어린이문학 평론가 김제곤 님 글을 읽어 봅니다. 김제곤 님은 이 동시집을 놓고 “시인은 스스로 창안해 낸 이야기를 자신만의 속도감 있고 자연스러운 호흡에 실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시’를 만들어 내지요.” 하고 말합니다. 이 동시집이 ‘이야기시’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동시이고 어른시이고 이야기 없는 시가 있는가요? 이야기가 없이 시가 태어날 수 있나요? ‘이야기산문’이나 ‘이야기소설’이 있는가요? 이런 말마디는 문학평론 아닌 말장난 아닌지요? 모든 동시와 어른시는 이야기 아닌가요? 이야기가 없으면 시가 아닌데, ‘이야기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요?
어느 동시인이든 어른시인이든 ‘이녁 이야기를 이녁 목소리에 따라 빚’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담아 동시를 쓰거나 어른시를 쓰지요. 내 이웃은 내 이웃인 이녁 이야기를 이녁 목소리로 담아 동시를 쓰거나 어른시를 써요. 스스로 제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펼치지 못한다면 시도 문학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다도 아니고, 그저 혼잣말이라 할밖에 없어요.
어른문학이든 어린이문학이든, 문학평론을 하면서 ‘이야기시’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너무 덧없습니다. 평론가 스스로 동시 하나를 놓고 할 말이 없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김제곤 님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김응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말솜씨 또한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의 시에 쓰인 ‘한 바퀴 돌고 또 돌고’ 같은 제목도 재미있지만, 가족끼리 쓰는 호칭을 죽 나열하다가 ‘이러다 지구 한 바퀴 다 돌겠네’ 하고 눙치는 솜씨가 제법 웃음을 줍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동시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동시를 쓰듯, 다 다른 사람들은 동시 하나를 두고도 다 다르게 읽겠지요.
나는 ‘식구와 친척 일컫는 온갖 부름말’을 읊는 동시가 따분했습니다. 우리 겨레한테는 이런저런 부름말이 따로 없었어요. 촌수를 따지는 일은 양반이나 권력자가 하던 일이지, 여느 흙사람은 이런 촌수 없어요.
조금만 헤아려도 알 수 있어요. 개화기 언저리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고, 갑작스레 촌수이니 호칭이니 하면서 퍼져요. 신문사와 방송사에서는 ‘국민교육’이라고 앞세우면서 촌수이니 호칭이니 하는 ‘한자로 된 어려운 부름말’을 외우도록 시켜요. 학교에서도 이런 짓을 시키지요. 되게 어렵고 딱딱할 뿐더러, 우리 삶하고 걸맞지 않은 한자로 된 부름말인데, 이런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도록 한대서 예의나 예절이 살아나지 않아요.
한집에서 살면 아버지와 어머니 있고, 언니 오빠 누나 동생 있어요. 아저씨와 아주머니, 또는 아재와 아지매 같은 이름은 아무한테나 붙이는 부름말 아니었어요. 모두한테 이름과 아울러 무슨 할머니 무슨 아저씨 하고 불렀지요. 삼촌이니 오촌이니 칠촌이니 하고 따지지 않았어요. 더 헤아리면 누구나 알 텐데, 지난날 마을살이는 거의 다 한식구 이루는 마을이에요. 촌수를 따지는 일이 부질없어요. 곧, 한 마을이 한 집안이요, 한 사람이에요. 이러한 너비와 깊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이야기 한 자락 들려준다면, 나도 김응 님 동시가 재미있네 하고 생각할 테지만, 우리 겨레 우리 이웃 살아온 발자국 가만히 짚는 흐름은 찾아볼 수 없기에, 그닥 재미있지 않구나 싶어요.
김제곤 님은 “이런 시에서 보듯 김응의 동시는 어린이부터 어른에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응의 동시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고 감동할 수 있는 ‘품이 넓은 시’란 생각이 들어요.”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같은 말은 얼마나 알맞을까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 김응 님 동시를 들여다볼 때에, 그리 ‘마음이 잘 맞지’ 않습니다.
.. 나비와 잠자리는 / 풀잎 돗자리 펼쳐 놓고 / 도시락 까먹고 / 맘껏 떠들며 노는데 // 왜 우리는 / 잔디밭에 들어가면 안 돼요? ..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를테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짧은 동시는 언뜻 보기에 재미나 보여요. 그렇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니 살짝 서글프달까, 어딘가 얄궂달까, 참 재미없구나 싶더군요.
도시에서는 공원에 울타리 박고는 못 들어가게 하지요. 사람들이 흙땅이나 풀밭 못 밟게 해요. 그나마 풀포기 한 줌 없는 메마른 도시인 나머지,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도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 까먹는 즐거움 못 누리게 해요. 사람들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에 앉아야 해요. 아파트이건 골목집이건 다세대주택이건 빌라이건, 아무리 멋진 장판과 양탄자 깔았어도 ‘살림집조차 시멘트바닥’이에요.
가만히 보면, 나비와 잠자리는 아무런 돗자리 깔지 않아요. 나비와 잠자리는 그냥 맨몸으로 풀밭에 앉을 뿐이에요.
사람도 굳이 돗자리 안 깔아도 돼요. 맨몸 맨발로 풀밭에 앉으면 돼요. 아침에는 이슬이 내려 아직 땅이 촉촉하니 돗자리 깔 만하지만, 시골에서 논일 밭일 하는 사람 모습을 잘 보셔요. 아무도 돗자리 안 깔아요. 그냥 맨 흙바닥에 앉아서 샛밥 먹고 쉬지요. 시골에서는 논둑이고 밭둑이고 그냥 앉아요. 풀밭이고 잔디밭이고 가리지 않아요. 더 들여다보면, 지난날 시골집은 모두 흙집이요 나무집이었어요. 밖에서 들일 할 적에도 흙땅에 앉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울 적에도 ‘흙으로 지은 집 바닥’에 몸을 누였어요.
.. 그 옛날엔 할아버지도 / 여드름쟁이였대 / 먼 훗날엔 삼촌도 / 할아버지가 될 거야 .. (오이와 오이지)
김응 동시인이 말솜씨 좋게 동시를 쓰는가 안 쓰는가도 잘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한 가지 궁금해요. 김응 동시인은 동시를 왜 쓰는가요. 김응 동시인은 누구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더 많은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어느 한 아이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도시와 시골을 아울러 모든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한국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재일조선인이나 연변조선족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모든 한겨레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이웃 중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베트남이나 버마나 네팔이나 부탄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어떤 아이들이 읽을 어떤 동시를 쓰는가요.
.. “박씨 혼자 있으면 / 어떻게 커다란 박이 열리겠니?” / 할머니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 (박꽃 피는 집)
동시쓰기와 동시읽기를 하기 앞서, 동시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야지 싶어요. 동시는 어른이 써서 아이가 읽도록 하는 시라서 동시일 테지요. 어른이 써서 아이가 읽는 동시란, 아이들한테 어떤 글밥, 마음밥, 삶밥, 사랑밥, 이야기밥, 꿈밥, 믿음밥, 책밥, 말밥, 꽃밥 들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 읽을 동시를 쓰는 어른은 이녁 스스로 어떤 글을 일구고, 어떤 마음을 다스리며, 어떤 삶을 짓고, 어떤 사랑을 나누며,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어떤 꿈을 꾸며, 어떤 믿음을 펼쳐,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말을 가다듬고, 어떤 꽃을 흙땅에서 보살피는 하루를 누리는가요.
동시는 말솜씨로 쓸 수 없어요. 말솜씨로 쓰는 글이라면 동시도 못 되지만, 어른시도 못 돼요. 말솜씨는 말솜씨일 뿐, 이야기도 아니고 글도 아니에요.
기계를 잘 다룬대서 사진을 잘 찍지 않아요. 이때에는 기계질만 하는 셈이에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이에요. 사진 하나란 기계질로 만드는 작품이 아니에요. 사진 하나란, 사진기라는 연장 하나 손에 쥔 누군가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아름답게 일구며 빚는 이야기 한 자락이에요. 시골 흙일꾼이 호미라는 연장 하나로 나물을 캐고 밭을 보듬듯, 동시를 쓰는 어른은 연필 한 자루로 종이 한 쪽에 정갈한 넋 즐겁고 신나게 노래를 해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노래로 삶을 밝힐 때에 시나브로 동시 하나 태어나요.
.. 하루는 집에 와서 / 숙제를 하려는데 / 숙제가 뭐였는지 / 까먹었지 뭐야! // 그래서 그냥 놀았어 / 온종일 노니까 즐거웠지 .. (아홉 살 할머니)
온 하루 놀면 재미나요. 숙제를 해야 하면 온 하루 고단해요.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숙제를 내요. 나도 어린 나날 숙제라는 큰짐 때문에 날마다 몸살을 앓았어요. 숙제를 안 하면 안 하는 만큼 교사들은 몽둥이를 들거나 손찌검을 했고, 이로도 모자란지 골마루에 나가라 소리를 꽥 질렀고, 새 숙제를 내서 헌 숙제까지 다 해내지 않으면 이듬날 때리는 횟수와 세기는 더 무시무시하지요. 한 주쯤 숙제를 밀리고 안 하면 교무실로 불러서 온갖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교감과 교장까지 나서서 때려요.
오늘날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니고, 학교에서 어쩔 수 없이 숙제를 받겠지요. 학원에서도 숙제를 받고, 집에서도 어버이가 여러 교재와 문제집 들여놓고 숙제를 안기겠지요.
참 끔찍해요. ‘숙제’라는 말소리만 들어도 몸서리를 쳐요. 동시 〈아홉 살 할머니〉는 이런 얘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참말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아홉 살 아닌 아흔 살 할머니라도 되도록 어른들은 숙제 짐덩이를 안기며 괴롭혀요.
.. 꽃눈 속에 숨어 있던 / 하얀 나비들 / 하나둘씩 날개를 펴고 / 활짝 날개를 펴고 .. (사월)
동시란 무엇일까요. 동시는 어른이 쓰니까 어른 삶을 드러낼까요. 동시는 어린이가 읽으니까 어린이 삶을 보여줄까요.
동시를 쓰는 분이나 동시를 읽는 분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빌어요.
자, 눈을 감고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요.
동시를 쓰는 어른도 얼마 앞서까지 어린이였어요. 동시를 읽는 어린이는 바로 오늘 어린이예요. 곧, 어제 어린이로 살아온 어른이 오늘 어린이하고 만나서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일하고 어울리고 누리는 하루를 글로 담을 때에 동시예요. 어른이 억지스레 어린이 눈높이로 ‘낮춘’대서 동시가 되지 않아요. 재미난 말솜씨 보여준대서 동시가 될 수 없어요. 뭔가 남다르거나 새롭다 싶은 이야기를 섞는대서 동시라는 이름 붙일 수 없어요.
말솜씨는 말솜씨일 뿐이에요. 꾸민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일 뿐이에요.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김제곤 님은 김응 님 동시를 읽고 나서 “시인이란 모름지기 변신 마술의 대가입니다.” 하고 말하지만, 시인은 몸을 바꾸는(변신) 사람도 아니고, 마술 부리는 사람도 아니에요. 시인은 그저 삶을 누리는 사람이에요. 삶을 사랑으로 누리지요. 삶을 즐겁게 누리지요. 삶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이웃이랑 동무하고 어깨를 겯지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동시도 어른시도 못 써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진도 못 찍고 그림도 못 그리며 노래나 춤도 못 해요. 삶을 누리니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요.
멋들어지게 불러야 노래가 아니에요. 전문가수가 되어야 노래가 아니에요.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즐거움과 사랑을 환하게 담아 목소리 뽑으니 노래가 돼요. 마음 깊이 피어나는 기쁨과 꿈을 맑게 엮어 글줄에 실으니 동시도 되고 어른시도 돼요. 전문시인이 되어야 시를 쓰지 않지요. 전문사진가 되어야 사진 찍지 않아요. 전문화가 되어야 그림 그리지 않아요.
어린이마음 되어 쓰기에 동시는 아니에요. 어른도 어린이도 딴 목숨 아니에요. 어린이는 곧 어른으로 자라고, 어른은 어린이로 살아낸 숨결을 언제나 가슴속으로 품은 목숨이에요. 어른이 쓰는 동시란, 다른 누구보다도 어른 스스로 읽고 즐기는 동시예요. 어른인 내가 어린이로 살던 나한테 베푸는 글이 바로 동시예요.
김응 님 세 번째 동시집이 나온다면, 이러한 대목 슬기롭게 돌아보면서 말빛 일굴 수 있기를 빌어요. 한 가지 덧붙이면, “하나둘씩 날개를 펴고”는 알맞지 않아요. “하나둘 날개를 펴고”나 “하나씩 둘씩 날개를 펴고”로 적어야 올발라요. 하나 더 말하자면 “꽃눈 속에 숨어 있던”이 아닌 “꽃눈 속에 숨은”으로 적어야 올발라요.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동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