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씨
백만 송이 장미나 튤립이 한꺼번에 피어난다는 꽃잔치가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꽃잔치 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꽃만 끝없이 심어 피어나게 하는 모습은 살짝 섬찟하다. 꽃송이 자라는 흙땅에는 틀림없이 다른 풀씨 날아와 앉을 텐데, 다른 풀꽃은 현호색이 되건 은방울꽃이 되건 둥글레꽃이 되건 꽃잔디가 되건 유채꽃이 되건 모조리 뽑힐 테니까.
가을날 시골 들판 바라보면 노랗게 빛나는 나락이 물결친다. 참 예쁜 빛이로구나 싶으면서, 노란 물결 나락만 가득한 모습이 얼마나 싱그러울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본다. 나락을 뺀 다른 곡식이나 풀포기는 논에 깃들지 못하게 하니까.
봄날 봄논 바라본다. 수많은 풀포기 자라면서 온갖 풀꽃이 피어난다. 냉이도 나고 씀바귀도 나며 질경이도 난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이나 코딱지나물꽃도 나란히 피고, 유채꽃이랑 갓꽃도 피며, 자운영꽃에다가 꽃마리나 꽃다지도 얼크러진다. 민들레도 피고 갈퀴나물도 꽃을 피운다. 그렇지만 이들 들꽃은 모조리 갈아엎여야 한다. 오직 하나 나락만 모판으로 키워서 척척 꽂아야 한단다.
감자밭에 콩이 함께 자라도 된다. 고추밭에 옥수수 나란히 자라도 된다. 무밭에 배추 같이 자라도 되고, 쑥이랑 할미꽃 어울려 자라도 된다. 모두 사랑스러운 씨앗이요 풀이며 꽃이다. 저마다 아름다운 씨앗이고 풀포기이자 꽃송이라고 느낀다.
백만 권이 팔리는 책 있고, 십만 권이 팔리는 책 있다. 만 권이나 천 권 팔리는 책이 있고, 때로는 처음부터 백 권이나 쉰 권만 찍는 책이 있다. 백만 권 팔리는 책이 더 아름답거나, 딱 쉰 권 찍는 책이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만 권 팔리기에 흔한 책이 될 수 없고, 백 권 찍은 책이라 훌륭한 책이 될 수 없다. 다만, 가슴속으로 깊이 이야기밭 일구는 씨앗이 되는 책이라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훌륭하고, 살가우며, 멋스러우리라 느낀다.
꼭 한 사람 알아보더라도 좋다. 책 하나 알아보는 사람 손길은 이녁 마음밭에 생각씨앗 하나 심는 몸짓 되고, 이 몸짓은 자라고 자라서 차츰차츰 고운 사랑 널리 나누는 웃음꽃 되리라 본다. 책씨를 심는 책지기일 테지. 책씨를 뿌리는 책지기라 할 테지. 책방 일꾼도 책지기요, 책손도 책지기이다. 저마다 다 다른 빛깔로 책지기 되어 책씨를 심는다. 책씨는 한 톨 흙에 깃들 수 있고, 백 톨이나 천 톨이나 만 톨쯤 흙에 깃들 수 있다. 나는 책꽃 하나 만나 책씨 하나 심는 책지기로서 오늘 하루를 누린다.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