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걷는 고흥 들길 (13.3.30.)
고흥 길타래 7―제비고을 고흥 삶터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시골 아이들은 아주 마땅히 들길을 걷거나 달렸고, 숲길을 오르내리며 풀과 나무하고 사귀었습니다. 서른 해나 마흔 해쯤 앞서는 시골마을마다 아이들 북적거렸을 테고, 스무 해쯤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시골마을에 아이들 웬만큼 복닥거렸겠지요. 1970년대 어느 통계를 보면 포두면에 있는 첨도라는 섬에 국민학생이 백 명 넘었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제 포두면 첨도는 온통 빈집이 되고, 시골마을 사랑하는 두 분이 새집 짓고 살아갈 뿐, 아이들 목소리나 노랫소리 들을 수 없습니다.


  섬 아닌 뭍에서도 아이들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집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순천이나 광주, 때로는 수원이나 인천이나 부산이나 서울로 보내는 어버이가 제법 많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에 도시로 보내는 어버이가 꽤 많으며, 고등학교를 마치면 거의 모두 도시로 나갑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흥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거나 물을 만지는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길 없어요. 대학교를 가야 하기에 도시에 가거나, 공장이나 회사에서 일자리 잡으려고 도시로 가요.


  시골마을 고흥을 떠나 도시로 간 아이들은 명절날 아니라면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예순 살 넘어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면 ‘귀촌’이나 ‘귀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올는지 모르지만, 예순이나 일흔 되어도 도시에서 그대로 뿌리박는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마을 일구는 가장 튼튼한 밑힘은 젊은이와 푸름이인데, 정작 고흥 시골마을에서는 시골 아이가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일에는 눈길을 안 두어요. 대학교를 보내는 데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도시에 있는 공장이나 공공기관에 일자리 얻도록 꾀하는 데에 지나치게 마음이 사로잡힙니다.

 

 


  우리 집 두 아이와 조용한 들길을 걷습니다. 이 마을에도 저 마을에도 아이들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면소재지 언저리까지 가면 아이들 모습이 있지만, 면소재지 아이들이라 해서 들놀이를 하거나 숲놀이를 하지는 않아요. 면소재지 편의점에서 놀거나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먹을 뿐입니다. 면소재지 한켠 어린이집 놀이터에서 조금 뒹굴다가 집으로 돌아가 손전화기 만지거나 텔레비전을 볼 뿐이에요.


  삼월이 저물 무렵부터 들판에 자운영 꽃물 번집니다.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는 자운영이 고랑마다 고개를 내밉니다. 자운영 꽃물 번지기 앞서 유채꽃 노랗게 피어났으니, 이제 사월 한복판 즈음 되면, 들판마다 유채빛과 자운영빛 흐드러지며 예쁜 꽃무지개 생기겠지요.


  볕 잘 드는 돌울타리 한켠에서 딸기꽃 하얗게 핍니다. 자운영꽃 필 무렵, 들딸기와 멧딸기도 하나둘 하얗게 꽃을 피워요. 멧골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꽃을 피우고, 앵두나무도 발그스름한 빛 살짝 감도는 하얀 꽃 터뜨립니다. 매화꽃 질 즈음 피어나는 앵두꽃잔치 곁에 서면 온몸에 앵두꽃내음 번집니다. 앵두알 붉게 맺히면 앵두알내음 번지고, 앵두꽃 흐드러질 때에는 앵두꽃내음 번져요.


  도화고등학교 앞문 곁에 봄꽃 가득한 나무 우람합니다. 도화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이 봄꽃 기쁘게 누릴 테지요. 고등학교를 마친 뒤 고흥을 떠나 도시로 가면, 봄마다 꽃잔치 벌이는 우람한 나무를 떠올리며 고향을 그릴까요.

 

 

 

 


  논둑 어디나 시멘트로 바릅니다. 아이들과 시멘트 논둑길을 걷습니다. 아이들은 들판 앞에 서서 한참 들여다봅니다. 무엇을 들여다볼까요. 푸릇푸릇 봄풀 들여다볼까요. 냉이꽃 들여다볼까요. 푸른 잎사귀 사이로 볼볼 기어다니는 개미나 거미를 들여다볼까요.


  풀섶 한쪽에서 하얀제비꽃 핍니다. 도랑 바닥도 시멘트로 발라, 가재이고 다슬기이고 살아갈 터 없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도랑 바닥이라 하더라도, 큰비 몰아치고 나면 논흙 쓸려서 새롭게 흙바닥 이루어집니다. 새로 생긴 흙바닥에 논생물 다시 찾아올까요. 논생물 다시 찾아들면 가재도 다슬기도 다시 돌아오고, 가재와 다슬기 다시 돌아온 이곳에 개똥벌레 숨결 이을 수 있을까요. 지난해에는 개똥벌레 여럿 만났으니, 올해에도 우리 마을 둘레에서 개똥벌레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꽃을 맺는 갈퀴나물을 뜯습니다. 꽃을 맺기 앞서 신나게 뜯어서 먹었습니다. 꽃이 맺은 뒤에도 즐겁게 뜯어서 먹습니다. 나물이거든요. 볕이 덜 드는 곳에서는 키가 좀 작은 유채꽃 피고, 볕이 잘 드는 곳에서는 벌써 어른 키만 한 유채꽃 핍니다. 꺽다리 유채꽃 옆에는 앉은뱅이꽃이라 할 만한 꽃다지 앙증맞습니다.


  고흥 아이들은, 다른 시골자락 아이들은, 봄날 봄마실 다니면서 봄꽃맞이 얼마나 즐길까 궁금합니다. 제아무리 고3 수험생이라 하더라도, 한껏 흐드러진 봄날에는 학교 수업쯤이야 하루 거른 채 다 같이 가까운 들판을 손 잡고 거닐며 까르르 웃음꽃 터뜨리며 봄나물 뜯어서 도시락 먹으면 얼마나 재미날까요. 아니, 봄날에는 아예 학교수업일랑 그만두고, 날마다 들판에서 들일을 하고 들놀이를 누리면서 들바람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자운영 꽃빛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생물 교과서에도 미술 교과서에도, 어떠한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들판에서 들일을 하다가 쉬면서 자운영 꽃송이 하나 톡 따서 냠냠 씹어먹어요. 자운영내음 온몸으로 번지며 목마름이 가시고 배고픔도 가라앉습니다.


  이름을 아는 들풀은 이름을 아는 대로 뜯어서 먹습니다. 이름을 아직 모르는 들풀은 네 이름이 무엇일까 헤아려 보며, 내 나름대로 살짝 새 이름 붙입니다. 잎맛과 꽃맛 헤아리면서 풀이름 어떻게 붙이면 어여쁠까 생각합니다.


  하얗게 꽃이 필 적에도 고소하면서 향긋한 찔레꽃이요, 푸릇푸릇 새잎 돋을 적에도 맑으면서 향긋한 찔레잎입니다. 찔레잎을 따고, 쇠뜨기꽃을 뽑습니다. 봄까지꽃이며 자주광대나물이며 마음껏 뜯어서 먹습니다.

 

 

 

 


  나 한 입 먹고 아이 한 입 먹습니다. 들마실을 하니까 들풀을 들밥 삼아 먹습니다. 여섯 살 세 살 어린 아이들은 온 들판 저희 것으로 삼아 뛰놉니다. 우리 집 처마에서 살아가는 제비들이 우리와 함께 들길에서 놉니다. 우리는 땅을 밟고 달립니다. 제비들은 들판 위를 훨훨 납니다. 아이들은 들노래 부르고, 제비들은 하늘노래 부릅니다.


  그런데, 들판에서 만난 제비가 ‘우리 집 제비’인 줄 어찌 아느냐고요? 우리 집 처마 밑에 지난 삼월 십오 일 즈음부터 제비가 다시 왔거든요. 지난해 우리 집 처마에서 새끼를 깐 제비들이 올해에는 아주 일찍 찾아왔어요. 새벽부터 저녁까지 마당에서 늘 바라보는 ‘우리 집 제비’들이라서, 들판에서 만나도 곧장 알아볼 수 있어요. 너희도 우리하고 같이 놀고 싶구나, 하고 손을 흔듭니다. 이제 보름쯤 더 지나면 이웃집에도 봄제비 찾아올 테고, 고흥 마을 어디에나 제비춤잔치 벌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예쁜 시골마을 고흥에서 한국에 가장 내로라할 만큼 뽐내며 내놓거나 나눌 아름다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우주 산업’ 아닌 ‘숲과 들과 제비’가 되리라 느껴요. ‘우주관문 고흥’ 아닌 ‘제비고을 고흥’으로 다시 태어나, 고흥 아이들이 고흥 아끼며 사랑할 길을 곱게 열 수 있기를 빕니다. 4346.4.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 길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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