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울음상점 랜덤 시선 33
장이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외버스, 김밥, 시집
[시를 노래하는 시 46]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 책이름 : 안국동울음상점
- 글 : 장이지
- 펴낸곳 :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11.30.)
- 책값 : 6000원

 


  아이들을 시골집에 두고 혼자 읍내로 장보러 가는 길에 시집 한 권 챙깁니다. 이 마을 저 마을 구비구비 돌며 천천히 달리는 군내버스에서 시 몇 줄 읽습니다. 가방 가득 여러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나서, 읍내에서 시골마을 돌아가는 군내버스 기다리며 다시 시 몇 줄 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면 아이들 바라보느라 종이책 손에 쥘 수 없고, 아이들 없이 혼자 움직이면 내 눈은 종이책을 바라봅니다.


.. 전깃줄들을 따라 무수한 전파가 흐르는 하늘. 군중들이 피곤한 직장을 가방 속에 넣고 집으로 흘러간다 ..  (군함 말리의 우주여행)


  책을 좋아하기에 책을 읽는달 수 있지만, 멧길을 오르거나 숲길을 거닐며 종이책 손에 쥐는 일은 없습니다. 나무를 보고 풀을 보는 즐거움이 온몸으로 스며들 뿐 아니라, 멧자락과 숲자락에서는 내 눈을 푸르게 쉬도록 이끄는 빛깔 가득하기에, 나무책 읽고 풀책 읽습니다. 메책 읽고 숲책 읽어요.


  시골 버스역에도 광고판 많고, 시골 읍내에도 가게 많아요. 집 바깥으로 나가면, 마을에서 벗어나면, 온통 눈을 어지럽히는 것투성이입니다.


  때때로 시외버스 타고 시골을 한참 벗어나 도시로 갈라치면, 종이책 여러 권 챙깁니다. 시외버스 덜덜거리는 소리에, 시외버스 달리는 고속도로 메마른 모습에, 좁은 걸상에서 옴쭉달싹 못하며 시달리는 몸은, 종이책마다 서린 이야기로 젖어들며 비로소 쉽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종이책 읽으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잊고, 메마른 모습을 잊으며, 고단한 몸을 잊어요.


.. 아버지가 고향을 잃고 한참 뒤에 어머니가 고향을 잃은 세상에서 나는 깨어난다. 버스비를 아끼느라 바지 속의 토킅을 만지작거리며 세 정거장이나 걸어왔다는 삼동 어느 날 아버지의 추운 이야기가 잘 아물지 않아 다시 수면제를 찾는다. 지갑 속에 명함이 늘어가고 시계 속의 숫자들이 허물을 벗어놓고 날아간다 ..  (셔벗 랜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꼭지를 틀면 집집마다 가게마다 물이 콸콸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느 살림집을 들여다보더라도 정수기를 으레 들입니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아주 마땅히 정수기가 붙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도 먹는샘물 페트병에 담아 팝니다. 나라에서 어마어마하다 싶을 돈을 퍼부어 댐을 세우고 물관 박고 물꼭지 붙이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수도물 그대로 마시지 않습니다.


  댐을 세우거나 물관 박거나 이래저래 하는 데에 들인 돈을 헤아린다면, 도시이건 시골이건 냇물과 도랑물 정갈하고 깨끗하도록 지키는 데에 돈이나 품을 썼으면, 누구라도 거저로 가장 맑으며 좋은 물을 마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리 안 많은 돈과 품을 들여도 냇물과 도랑물은 정갈하면서 깨끗할 수 있어요.


  왜 빗물을 마시지 못할까요. 왜 냇물을 마시지 못할까요.


  왜 빗물도 냇물도 흐뭇하게 마시지 못하는 삶터로 만들고 말까요. 왜 이러한 삶터에서 물 한 모금 느긋하며 한갓지게 즐기지 못하는 하루를 보내고 마나요.


.. 대학 입시 때인가 처음 정월 보름달에 빌었다. 고향집 앙상한 목련나무 꼭대기, 대머리 달은 내 인생의 편집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 생의 스토리를 다 안다는 듯 / … / 달은 그렇게 아버지처럼 늘 곁에서 걸었다 // 달빛에 기대어 잠시 졸아도 좋으리 ..  (십칠야 날씨, 포근함)


  서울로 마실 가는 길에 읍내 김밥집에서 김밥 두 줄 장만합니다. 시외버스에서 김밥을 먹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천천히 씹으며 천천히 읽습니다. 시외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며 더 빠르게 달리자, 멧자락에 낸 구멍길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밝음과 어둠이 되풀이되고, 눈이 따가우며, 속이 메슥거립니다.


  고속도로란 이런 길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더 빨리 달리자며 낸 고속도로란, 숲을 무너뜨리고 시골을 망가뜨리면서 다니는 길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자가용을 타든 시외버스를 타든, 이 탈거리는 기름을 태워 배기가스를 내뿜고, 자동차 한 대 만들기까지 숱한 지구자원을 쓸 뿐더러, 열 해 즈음 달린 자동차는 어느새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참말 끔찍한 쓰레기 내놓으며 지구별 더럽히지, 하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달리는 수레라고 하는 자동차는 스스로 달린다고 할 만할까요. 스스로 달리는 수레에 탄 사람은 걱정없이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할 만할까요. 왜 먼길을 애써 가야 하고, 왜 먼길을 애써 갈 때에 이렇게 빨리 달려야 할까요.


.. 사람들은 마음대로 삶을 규정해. /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내가 / 그런 삶의 시를 쓴다면 위선이야. / 사람들은 내게 위선을 바래. / … / 내가 꿈이야. 나는 텔레비전 속으로 잠들어 ..  (TV 채널들 사이를 떠도는 노래)


  지난날 사람들은 걸어서 움직였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명나라나 청나라에 갈 적이건,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올 적이건, 누구나 으레 걸어서 움직였습니다. 전라남도 시골에서 서울로 가든, 서울에서 전라남도 시골로 오든, 누구나 마땅히 걸어서 움직이던 지난날입니다.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던 이들은 몇 해에 걸쳐 오갔다 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해에 걸쳐 먼길 한 차례 오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온몸으로 가득 붙잡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을 여러 달 걸쳐 오가던 사람도 숱한 이야기를 온몸으로 듬뿍 사로잡아요.


  옛사람은 금강산 나들이 한 차례 하더라도 책 열 권 쓸 만합니다. 옛사람은 서울마실이나 시골마실 한 차례 하더라도 책 다섯 권 쓸 만합니다. 오늘사람은 외국마실 열 차례 하더라도 책 한 권 쓰기 어렵습니다. 오늘사람은 서울마실이나 시골마실 열 차례 하더라도 책 한 줄 쓰기 힘들어요.


.. 편의점 아가씨, 예쁘기도 하지, 어쩜 / 저 찻집 이름, lonely, 아름답기도 하지, / 여고생 깻잎 머리, 귀엽기도 해라, / 나는 구름 빛이고, 아까 산 〈탄토 템포〉를 / 듣는다 ..  (탄토 템포)


  나는 빨리 달리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빨리 태어나서 빨리 죽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빨리 먹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밥을 빨리 차려서 아이들한테 밥을 후다닥 먹일 마음 없습니다.


  나는 자가용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할 생각 없고, 운전면허증 딸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군내버스를 가끔 타지만, 으레 자전거를 타고, 언제나 두 다리로 걷습니다.


  나는 들길을 느끼고 싶어요. 나는 마을길을 헤아리고 싶어요. 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구름빛을 살피고 싶어요. 나는 새와 벌레와 풀을 이웃으로 삼아, 고즈넉한 시골자락 삶을 일구고 싶어요.


.. 군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안의 괴수들처럼 보였다 ..  (철남)


  서울은 넓습니다. 아파트와 건물과 찻길이 끝없이 이어질 만큼 넓습니다. 서울은 서울대로 넓은 만큼, 서울사람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시골은 넓습니다. 들과 숲과 바다와 벌이 멀리멀리 잇닿을 만큼 넓습니다. 시골은 시골대로 넓은 터라, 시골사람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다만, 이제 글을 쓰거나 시를 쓰거나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것저것 합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며 글을 쓰는 이는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서 흙 돌보며 대학교수로 일하는 이는 아주 적습니다. 시골에서 흙 먹으며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대통령 하는 이는 아주 없다 할 만합니다. 시골에서 흙 누리며 변호사나 법관이나 의사나 경찰이나 군인이나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이는 몇이나 될까요.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설산 사진이 / 둘러쓴 이불 밑으로 언 발을 집어넣는다. / 세상 참 춥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멀리 있다. / 고마운 텔레비전이 그곳에 대해 / 저능아처럼 논평한다. / 아비가 자식의 목을 눌렀다네요 ..  (천국, 내려오지 않는)


  장이지 님 시집 《안국동울음상점》(랜덤하우스코리아,2007)을 읽습니다. 장이지 님은 전남 고흥에서 어린 나날 보냈다고 합니다. 군내버스에서 이 시집을 읽다가, 읍내 버스역에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군내버스 기다리며 이 시집을 읽다가, 전남 고흥에서 흙 부대끼는 할매와 할배는 이 시집을 어떻게 읽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쁜 총각이 이쁜 시 하나 썼네, 하고 생각하실까요. 이쁜 젊은이가 이쁜 시집 하나 냈네, 하고 여기실까요.


.. 제일 깨끗한 눈은 딸에게 줄 / 선물이라지요 ..  (마술사와 눈, 노숙자의 꿈)


  시집을 덮습니다.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깃든 가장 정갈한 글월 한 자락은 장이지 님 할매나 할배한테 베푸는 말꽃, 곧 선물이라고 느낍니다.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담은 가장 따사로운 글월 두 자락은 장이지 님이 오늘 살아가는 서울에서 마주하는 이웃한테 건네는 말빛, 그러니까 선물이지 싶습니다.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춤으로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고소한 밥 한 그릇처럼 한껏 차리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씨앗 한 톨로 심는 시입니다. 4346.3.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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