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골밥 먹고 쓰는 시
[시를 노래하는 시 45]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책이름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글 : 서정홍
- 펴낸곳 : 나라말 (2008.4.5.)
- 책값 : 8000원

 


  세 살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마당에서 별바라기를 하다가, 뒷밭으로 가서 다시 별바라기를 합니다. 아직 밤이 살짝 썰렁한 이른봄이기에 별바라기를 오래 하지는 않습니다. 밤에도 포근한 바람 부는 날 찾아들면, 아이들하고 마당 평상에 드러누워 오래도록 별바라기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이웃마을 나들이를 다닙니다.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비가 뿌려도 눈이 내려도, 언제나 자전거 나들이를 합니다. 아이들은 걸어다니면서도 날씨를 느낄 테고, 자전거수레에서도 날씨를 느낄 테지요. 철마다 다른 바람맛을 보고, 날마다 다른 바람내음을 맡으며, 시골에서 누리는 삶을 천천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다.


.. 단성 할머니는 무씨 심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무밭에 다녀오셨다 ..  (나이)


  나무는 언제나 나무 그대로입니다. 풀은 늘 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사람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사람한테 주어진 숨결을 살가이 못 느끼는 사람이 많고, 사람마다 물려받은 넋을 슬기로이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사람도 놀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이것을 하다 보니 일이 되기도 하고, 저것을 하다 보니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금을 긋지 않습니다. 살아가면 저절로 일이요 놀이입니다. 일이라서 고단하거나 놀이라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일이라서 힘들거나 놀이라서 재미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 그대로 자라고, 풀은 풀 그대로 돋습니다. 곁에서 아끼거나 사랑하는 숨결 있으면, 나무와 풀은 한결 싱그럽고 푸르게 빛납니다. 사람이 아껴 주든, 노루가 아껴 주든, 사람이 사랑해 주든, 토끼가 사랑해 주든, 나무와 풀은 이녁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숨결을 받아먹으며 한결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숨결은 사랑이 밑바탕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고도 하지만, 그냥 밥만 먹어서는 제 숨결을 건사하지 못해요. 사람이 먹는 밥은 그냥 밥 아닌 사랑 담은 밥입니다. 사랑으로 지은 밥을 사랑을 노래하며 먹을 때에 고운 숨결로 깃듭니다. 곧, 밥을 먹는 사람 아닌, 사랑을 먹는 사람입니다. 밥을 지어 내놓는 사람 아닌, 사랑을 지어 내놓는 사람입니다.


  흔히, 집밥과 바깥밥이 다르다고 하는데, 너무 마땅합니다. 같은 밥감으로 밥을 지어도, 어떤 사랑이느냐에 따라 달라요. 어떤 넋으로 어떤 사랑을 담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똑같은 글을 써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글 하나 써 달라 얘기해서 쓰는 글인가에 따라 사뭇 다릅니다. 누가 왜 바라는가에 따라 글 매무새가 다릅니다. 스스로 즐겁게 우러나와서 쓰는 글하고, 마감에 쫓기고 돈벌이에 휘둘리며 쓰는 글이 같을 수 없어요. 아이들과 웃으며 나눌 글하고, 혼자 머리 싸매고 씨름하는 글이 같을 수 없어요.


.. 아내는 내게 온 우편물을 뜯어보면서 /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 마치 자기에게 일어난 일처럼 / 기뻐하고 때론 안타까워하고 / 의견도 묻고 대책도 다 세웁니다 ..  (동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 일자리 찾아 다달이 얼마씩 벌어들여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도시에서 일자리 찾아 다달이 품삯 챙기려는 뜻으로 이 지구별에 태어날까요. 사람은 ‘달삯쟁이(월급쟁이)’일 때에라야 사람인가요. 달삯쟁이 노릇 안 하면 사람 구실 못 하는 셈인가요.


  어머니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 집을 떠나 집 바깥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돈벌이를 해서 집식구 먹여살린 지 얼마 안 됩니다. 백 해는커녕 쉰 해조차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 사회에서 92%에 이르는 사람이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정부 통계로는 92%라 하지만, 주민등록 아닌 시골에서 참말 살아가는 사람 숫자를 하나하나 꼽으면 시골사람은 훨씬 적으리라 느껴요. 선거철에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숫자를 헤아려 보면 쉽게 알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집 바깥을 떠돌며 돈을 벌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녁 땅을 건사하면서 밥을 짓던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밭과 제 숲과 제 땅을 디디며 살던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동산 아닌 보금자리를 돌보던 사람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나무하고 풀을 아끼던 사람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삶을 사랑으로 일구던 사람이에요. 사람은 학교에 다녀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버이한테서 삶을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사랑으로 슬기를 배우고 꿈을 나누던 사람입니다.


.. 이십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 아내는 땅콩을 삶아서 / 못나고 쭈그러진 것을 먼저 골라 먹는다 ..  (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시장이나 군수가 되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공무원시험에 뽑히거나 임용고시나 사법고시에 붙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연봉이 1억 원쯤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이런 일 저런 일에 걸개천 크게 만들어 곳곳에 내다 겁니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붙었다며 걸개천 크게 만들어 붙입니다. 시골에서 서울 어디에 있는 공공기관에 붙었다며 걸개천 새삼스레 만들어 내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울로 가서 돈을 잘 벌거나 이름을 크게 얻거나 힘을 단단히 거머쥐면 자랑할 만한 일로 삼는구나 싶어요. 시골에서 안 살고 서울에서 살아야 자랑거리가 되는구나 싶어요.


  아마, 그럴 테지요. 시골에서 눌러 지내는 나날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삶이거든요. 삶은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삶은 삶입니다. 사랑을 자랑하는 사람 있을까요. 없어요. 사랑 또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예 사랑입니다. 내 꿈이 이러저러하다고 자랑할 사람 없어요. 꿈은 스스로 즐겁게 이루는 길일 뿐입니다. 꿈 또한 그대로 꿈입니다. 믿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웃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따스함과 너그러움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시골살이는 자랑거리가 아닌, 삶을 누리는 고운 빛입니다. 이리하여,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기리거나 부추기려고 걸개천 붙이는 일 없어요. 서울 떠나 시골로 가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손뼉쳐 주거나 두 팔 벌려 반기는 일 없어요. 아주 마땅한 사랑이니 빙그레 웃습니다. 매우 홀가분한 꿈이니 방긋 웃습니다. 무척 포근한 믿음이니 가만히 웃습니다.


.. 여든세 살, 덕산 할머니가 / 오늘따라 자꾸 숨이 가쁘다는데 / 마을 할머니들 처방은 다 다르다. // 밥을 많이 묵우서 그렇다. / 밥을 많이 안 묵우서 힘이 없어 그렇다. / 숨이 가빠도 밥을 많이 묵우야 낫는다. / 지랄하고 자빠졌네. / 숨이 가쁜데 밥을 우찌 묵노 ..  (처방)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글을 쓰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다 보면, 굳이 글을 안 써도 되고, 애써 책을 안 읽어도 되기에, 참말 시골 글쟁이는 아주 드뭅니다. 흙 만지는 웃음이나 흙 먹는 기쁨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춤이나 노래로 노래하는 사람은 더없이 드뭅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모두 서울로 가야 할 만하다고 여깁니다. 서울살이를 글로 쓰지, 시골살이를 글로 안 써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시골로 가니 글을 조금 끄적이지, 처음부터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따로 글을 안 써요.


  서울에서는 흙을 만지지 못하기에 자꾸 글을 쓰고 맙니다. 서울에서는 흙을 디딜 일 없기에 자꾸 책을 읽고 맙니다.


  나무를 안아 보셔요. 수십 수백 수천 권 책이 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풀을 쓰다듬다가 톡 따서 먹어 보셔요. 수만 수십만 수백만 권 책이 내 몸으로 젖어듭니다. 하늘을 안아 보셔요. 별을 안아 보셔요. 햇살을 먹어 보셔요. 바람을 마셔 보셔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이 내 마음으로 파고듭니다.


  흙을 만질 때에는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삶을 읽고 느낍니다. 흙을 다룰 때에는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사랑을 깨닫고 나눕니다.


  시골밥은 흙밥입니다. 시골집은 흙집이고 시골일은 흙일이듯, 시골삶은 흙삶입니다. 흙을 북돋우며 삶을 북돋웁니다. 흙을 사랑하며 이웃을 아낍니다. 흙에 농약이나 비료 함부로 줄 수 없듯, 내 이웃한테 겉발림이나 겉치레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살이 하는 이들이 자꾸 겉발림이나 겉치레에 마음을 빼앗겨요. 흙이 없으니 옷차림에 자꾸 눈길을 둬요. 흙 만지는 사람은 옷차림을 아랑곳하지 않아요. 흙을 만지거든요. 흙을 안 만지니까 겉모습에 넋이 나가고 말아요. 흙을 만지니까 돈에 휘둘리지 않아요. 흙을 안 만지니까 돈에 사로잡혀요. 시골사람은 흙밥을 먹는다면, 서울사람은 돈밥을 먹어요. 돈을 벌어 돈을 쓰니까 서울사람은 모두 돈밥이요 돈삶이에요.


..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 우리 마을에서 예순 해 넘게 농사만 짓고 살아온 ‘윗마을 어르신’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온갖 작물 다 심어 봐도 수지가 안 맞아, 차라리 묵혀 두는 게 낫다고 몇 해 전부터 농사를 짓지 않는다 ..  (농사 일지 3)


  서정홍 님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2008)를 읽습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며 시를 쓰는 서정홍 님이 내놓은 시집을 읽습니다.


  곰곰이 읽습니다. 천천히 읽습니다. 시골집에서 아이들과 복닥이며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읽습니다. 어느덧 다 읽고 덮습니다. 두 아이가 아버지 등에 올라타며 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 그래, 하나씩 올라타며 놀아라. 아니면, 둘이 나란히 올라타며 놀아라. 방바닥에 엎드려 시집을 읽으니, 아이들은 아버지 등판을 새로운 놀이터로 삼습니다.


  이제 시집 다 읽고 덮을라치니, 아이들은 아버지더러 더 엎드리라 하면서, 등판을 밟거나 깔고앉으며 놀겠답니다. 그래 그래, 너희 좋을 대로 해라.


.. 여름날, 비바람에 / 떨어진 가랑잎과 / 가을날, 찬바람에 / 떨어진 가랑잎은 다르다 ..  (다른 까닭)


  서정홍 님 시집에는 흙내음 나는 글이 얼마 없습니다. 이웃을 만나거나 한국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는 곧잘 있는데, 막상 서정홍 님 스스로 흙을 만지면서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웃 할매와 할배 살아가던 모습 가운데 한 자락 들여다보며 옮겨적은 이야기는 있으나, 서정홍 님 스스로 흙을 만지며 사랑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음꽃짓는 이야기는 잘 안 드러납니다.


  그래도, 이렇게 시골마을 시골사람 이야기를 적바림한 시집은 요즈음 아주 보기 힘듭니다. 곁에서 시골이웃 지켜보며 적바림한 글을 엮어 시집을 내놓는 분은 이제 아주 없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못내 서운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서정홍 님인데, 흙 밟거나 흙 만지는 이야기가 너무 없어요. 시골에서 보금자리 꾸리는 서정홍 님인데, 햇살 먹거나 바람 마시는 이야기가 너무 얕아요. 시골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서정홍 님인데, 나무랑 풀이랑 숲이랑 들이랑 멧골이랑 벌레랑 새랑 구름이랑 빗물이랑 눈송이랑 하늘이랑 별이랑 달이랑 해님이랑 안개랑 무지개랑 가을이랑 봄이랑 사귀는 이야기가 너무 뜸합니다.


  시골살이가 안 즐거울까요. 시골살이가 안 고소할까요. 시골살이가 안 따스할까요. 흙밥 먹으며 흙삶 노래하는 시를 기다립니다. 흙밥 나누며 흙사랑 춤추는 시를 기다립니다. 흙밥 지으며 흙꿈 이루는 시를 기다립니다.


  단성 할매 무밭 이야기도 좋지만, 서씨 아재 텃밭 이야기를 즐겁게 쓰기를 빌어요. 단성 할매 이야기는 단성 할매가 쓰면 돼요. 서씨 아재 이야기는 바로 서씨 아재가 써야지요. 서씨 아재 이야기를 단성 할매가 써 주겠습니까. 서씨 아재 이야기를 서씨 아재가 쓸 때에, 비로소 흙맛 빛나는 시노래 태어나리라 생각해요. 4346.3.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