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길타래 1, 읍내 나무전봇대 (13.2.5.)
― 사람들 살아가는 오늘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 누리는 삶’을 새롭게 이야기로 갈무리합니다. 옛사람은 옛날에 누리던 삶을 그무렵 이야기로 갈무리해서 옛이야기를 빚어 물려주고, 오늘 우리들은 ‘오늘이야기’를 날마다 즐겁게 빚어 우리 아이들하고 이웃한테 나누어 줍니다.
천 해나 만 해를 잇는 옛이야기일 때에 빛나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고이 이어 앞으로 천 해 뒤나 만 해 뒤에까지 즐거이 나눌 수 있어도 빛나는 이야기 됩니다.
어떤 유물이나 유적이 있어야 문화유산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누리는 삶을 되새길 수 있을 때에 ‘싱그러이 숨쉬고 빛나는 이야기보배’를 일굴 수 있습니다.
문화재 번호를 받아야 문화재가 되는 고인돌은 아니에요. 고흥 시골마을 곳곳에는 문화재 번호를 안 받거나 못 받은 고인돌이 무척 많아요. 거금도 몽돌은 처음부터 문화재 대접을 받지 않았어요. 고흥 바닷가는 처음부터 국립공원이지 않았어요. 시골마을 시골사람 스스로 정갈하게 돌보고 사랑한 삶터가 시나브로 아름다운 문화재 이름을 받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마당으로 거듭나요.
읍내 한켠 천천히 거닐며 ‘고흥읍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고흥군청 앞마당 옆에 있는 농협 건물 앞쪽 조그마한 빌라와 조그마한 살림집 사이에 나무전봇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저잣거리 나들이를 하러 읍내에 올 적, 가끔 이 나무전봇대 옆으로 지나갑니다. 팔을 뻗어 나무전봇대 몸통을 쓰다듬습니다. 나무전봇대에 씩씩하게 붙은 이름표를 올려다봅니다. 어느덧 시멘트전봇대로 바뀌어 거의 다 사라지지만, 이 나무전봇대 하나 고흥읍 한켠에 있어, 고흥읍이 지나온 발자취 하나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저 쇠딱지 하나에는 어떤 손길과 땀방울이 묻은 채 오늘까지 이어졌을까요.
읍내 옛 소방서 건물 한쪽에는 오래된 소방차 한 대 먼지를 먹습니다. 옛 소방서 건물은 한국땅에 몇 군데쯤 남았을까요. 또, 옛 소방서 건물에 깃든 옛 소방차는 한국땅에 몇 대나 남았을까요. 옛 소방서 건물은 고스란히 박물관이 될 만하고, 옛 소방차 한 대도 먼지를 먹기보다 고흥 아이들 어여쁜 손길을 타며 오래오래 사랑받는다면 한결 아름답겠지요.
머잖아 시골마을 우체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손으로 종이에 글월 한 쪽 적어 우표 한 닢 붙이고는 우체통에 두근두근 설레는 즐거움으로 부치는 사람 거의 없어요. 우체국에서 글월 한 통 부치려 해도 우표 아닌 종이딱지를 기계로 뽑아서 붙여 주어요. 고흥에서라도 우체국에서 종이딱지 아닌 우표를 곱다시 붙인다면, 고흥우체국 도장 콩 찍힌 글월이 이 나라 곳곳으로 날아갈 수 있다면, 아마 2013년뿐 아니라 2010년대와 2020년대에도 환하게 빛날 새 이야기 길어올릴 만하리라 생각해요. 서류봉투에도, 관공서 간행물에도, 국회의원 의정보고서에도, 모두 우표가 붙고 손글씨로 주소를 적어 집집마다 띄운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겠지요.
금산우체국 앞에서 빨간 우체통 바라봅니다. 도화초등학교 앞에 있는 옛 문방구이자 구멍가게였던 자리에 아직 남은 빨간 우체통 바라봅니다. 살짝 어루만집니다. 4346.2.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