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까지꽃 책읽기
2011년 가을에 전남 고흥 두멧시골에 깃들면서 2012년 봄에 ‘봄까지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어릴 적에도 이 꽃을 보았을 테고, 예전에도 이 꽃을 보았을 테지만, 지난날에는 이 꽃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들어도 이내 잊고, 모습을 보아도 고개를 돌리면 곧장 잊었어요.
‘봄까지꽃’이라는 풀이름은 강운구 님이 쓴 《시간의 빛》이라는 사진책에 잘 나옵니다. 이 풀이름을 놓고 일본 학자는 ‘개불알풀’이라 일컬었고, 한국 학자는 처음에 이 이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어요. 시골사람은 일본 학자가 일컫는 이름이나 한국 학자가 어설피 받아들인 이름을 안 쓰고 살았을 텐데, 아니 모르고 살았을 텐데, 한국 학자들은 나중에 시골사람 스스로 붙여서 쓰는 이름을 듣고는 천천히 바로잡았다고 해요.
시골사람은 학자가 아닙니다. 시골사람은 전문가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풀이름과 꽃이름과 나무이름은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시골사람은 대학교를 다닌 적 없고, 시골사람은 규장각이라는 데를 모르며, 시골사람은 팔만대장경 또한 몰라요. 그렇지만, 모든 벌레이름과 새이름과 짐승이름은 시골사람이 붙였어요. 벼, 보리, 수수, 서숙, 콩, 팥, 밀 같은 이름도, 겨, 방아, 베틀, 쭉정이, 피, 절구 같은 이름도, 몽땅 시골사람이 빚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골사람은 이름을 짓는 사람입니다. 더없이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사람은 스스로 먹을거리를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습니다. 시골사람은 삶을 스스로 짓습니다. 곧, 삶을 바탕으로 사랑을 스스로 짓고, 믿음을 스스로 짓습니다. 어떤 임금이나 학자나 신관 같은 사람이 없어도, 시골사람은 시골사랑과 시골믿음을 스스로 지어요.
시골사람은 꿈을 스스로 짓지요. 시골사람은 아이한테 붙이는 이름도 스스로 짓지요. 시골사람은 구름, 하늘, 해, 별, 달, 흙 같은 이름도 스스로 지어요. ‘봄까지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름을 헤아립니다. 한 송이 살며시 똑 따서 입에 넣고 봄내음을 맛봅니다. 꽃송이도 먹고 잎도 먹으며 줄기도 먹습니다. 봄까지꽃 곁에서 자라는 광대나물도 먹고, 광대나물 곁에서 자라는 봄까지꽃도 먹습니다. 두 꽃 곁에서 자라는 별꽃도 먹으며, 별꽃 곁에서 자라는 두 꽃도 먹습니다. 어느새 봄이 코앞입니다. 4346.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