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김수우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노래로 짓는 사랑꿈
[시를 노래하는 시 52] 김수우,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 책이름 :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 글 : 김수우
- 펴낸곳 : 시와시학사 (2002.12.15.)
- 책값 : 5500원

 


  아침에 작은아이가 일어납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대청마루에 서서 쉬를 누입니다. 쉬를 누이고서 문을 열고 섬돌로 내려선 다음 햇살을 쬡니다. 마당 한쪽 귀퉁이에서 마을 들고양이 여럿이 모여 아옹거립니다. 맞은편으로는 햇살이 눈부시고, 후박나무 잎사귀가 가벼운 겨울바람 맞으며 사르르 노래합니다.


  그런데, 바깥에 둔 물꼭지 쪽 처마 밑 빨래대에 빨래가 그대로 있습니다. 어라, 저 빨래는 엊저녁에 왜 안 걷고 그대로 있지? 저 빨래는 어젯밤 고스란히 추위에 떨며 한뎃잠을 잤잖아.


  아침부터 이 빨래를 걷을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고 새 하루 새 햇살 받아 보송보송 따순 기운 먹도록 해야 합니다.


.. 건널목에 언덕길에 무덤가에 / 잎눈, 잎눈 돋는다 / 사는 데에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되는 / 그냥, 봄 ..  (우수 이후)


  작은아이를 안거나 무릎에 앉히거나 바지를 갈아입히며 엉덩이를 조물락조물락합니다. 작은아이 엉덩이는 소담스러운 복숭아 두 알과 같다고 늘 느낍니다. 조물락조물락 주물럭주물럭 놀아도 무르지 않는 복숭아 두 알. 어쩜 아이들 엉덩이는 맛난 복숭아하고 쏙 빼닮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옆지기 어릴 적에도, 내 어릴 적에도, 모두들 귀엽고 어여쁜 엉덩이였겠지요.


.. 창문마다 무명 실타래 같은 길이 났다 / 그때부터 솔방울 하나도 집이 되었다 / 솔잎 하나가 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  (우리 몸 속에 마을이)


  큰아이가 일어납니다. 큰아이는 잠에서 깨어 눈을 뜰 적부터 종알종알 노래를 합니다. 들새는 들새대로 노래를 하고, 풀벌레는 풀벌레대로 노래를 하듯,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노래를 합니다.


  너는 참 아침마다 잠에서 깨며 고운 노래를 들려주는구나. 너희 아버지는 아침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떤 노래를 부르려나.


  아이들 아직 일어나기 앞서 깊은 새벽에 홀로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미역을 끊어 불립니다. 어제 읍내에서 매생이 두 손 장만했기에 매생이를 곁들인 미역국을 끓일까 하다가, 매생이국은 따로 끓이자고 생각합니다. 어제 매생이와 함께 장만한 언 명태는 오늘 저녁이나 이듬날 아침에 보글보글 끓일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고춧가루 없지 않나. 내가 고춧가루 안 먹으니 고춧가루 없는 살림인데, 고춧가루 없이도 ‘언 명태찌개’를 맛나게 끓일 수 있겠지요. 노래를 부르면서 찌개를 끓이면, 노래를 부르면서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면,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을 부르고, 나란히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 사람도 산도 / 멀리 있을수록 하늘빛에 가깝구나 ..  (풍경의 틈)


  여섯 살 큰아이는 만화책 두 권을 쥐어들고 대청마루 조그마한 걸상에 앉습니다. 작은 이불을 챙겨 무릎에 덮고 만화책을 펼칩니다. 세 살 작은아이는 똥꼬에 힘을 주며 똥을 눕니다. 오늘 아침에는 조금만 누는데, 잘 했다 잘 했어 이야기하면서 밑을 씻기고 새 바지를 입힙니다. 그러고는 밥물을 끓이고 미역국을 끓입니다. 몇 가지 나물을 헹구고 잘게 썰어 된장을 섞는 나물비빔을 마련합니다.


  밥을 즐겁게 먹고 나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아이들하고 놀까, 하고 생각합니다.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조금 멀리 나가 볼까요. 두 아이 손을 하나씩 잡고는 마을 뒷밭을 돌아 빙 한 바퀴 걸어 볼까요. 천천히 멧골 하나를 넘어 볼까요. 마당 평상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할까요. 햇살 맑게 드리우는 들판 어딘가 일찌감치 잎사귀 내민 들풀이 있는지 살피러 다닐까요.


  가끔 읍내나 면내에 다녀올 적마다 느끼는데,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조용히 누리는 하루는 더없이 조용하구나 싶습니다. 조용하니까 조용할 텐데, 자동차 거의 안 드나드는 곳에서 지내니, 바람 흐르는 소리와 할머니 거니는 소리와 풀잎 춤추는 소리와 새들 날갯짓 소리를 가만히 귀담아 들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자주 드나드는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를 자동차가 잡아먹습니다. 자동차가 안 다닐 적에는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계 소리, 사람들 손에 들린 손전화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온통 뒤덮습니다. 도시에서는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땅도 나무도 풀도 꽃도 벌레도 새도 마주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이웃 소리가 깃들지 못합니다.


.. 꽃무늬 벽지 위에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  (곰팡이꽃)


  마당에 놓은 평상에 앉든, 그냥 마당에 선 채로 있든, 눈을 감고 바람 흐르는 결을 맞아들입니다. 어느 바람이 후박나무 어느 가지 어느 잎사귀를 흔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 바람이 동백나무 어느 가지 어느 잎사귀를 건드리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어느 바람이 앙상한 매화나무와 모과나무와 감나무 가지를 살살 간질이는가 하고 떠올립니다.


  나무를 스치며 부는 바람은 소리가 다 다릅니다. 풀잎을 스치며 부는 바람도 소리가 다 다릅니다. 풀잎마다 춤사위가 다르고, 노랫소리가 다릅니다. 풀잎마다 풀빛이 다르며, 풀맛이 달라요.


  풀은 어떤 숨결로 사람한테 찾아왔을까 생각을 기울입니다. 사람이나 여느 풀짐승이 뜯어서 먹고 또 뜯어서 먹어도 씩씩하게 다시 돋고 자라는 풀은 그야말로 어떤 넋으로 이 지구별을 푸르게 담을까 생각을 기울입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씨앗 하나 심어 열매를 거두면, 이 열매는 나누고 또 나누어도 자꾸 맺힙니다. 마음속에서 길어올리는 사랑 열매는 베풀고 베풀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아마, 사랑 아닌 미움을 씨앗으로 심거나 시샘을 씨앗으로 심어도 늘 매한가지가 될 테지요. 미움이나 시샘도 끊이지 않을 테고, 닳지 않을 테며, 마르지 않을 테지요.


  그러니까, 나는 미움이나 시샘 아닌 사랑과 꿈을 길어올리고 싶습니다. 사랑과 꿈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과 꿈으로 마음을 넉넉히 채우고 싶습니다.


.. 담벼락 따라 지천으로 피어난 풀 싹도 /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더미도 / 누군가가 지은 집이었구나 / 서로에게 풍경이 되기 위하여 / 눈동자 같은 창문을 달아 내느니 ..  (누군가 집을 짓는다)


  아이들 재우는 밤에도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과 뛰노는 낮에도 노래를 부르지만,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아침과 낮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함께 먹는 밥상맡에서도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마실을 다니는 들길에서도 노래를 부를 만하며, 두 아이 자전거수레에 태워 땀 뻘뻘 쏟는 논둑길에서도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골마을 시골집 얻어 지내기까지, 도시에서는 노래를 거의 안 부르고 살았구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 이른바 노래꾼이나 노래패가 들려주는 노래를 노래테이프나 노래파일로 듣기는 했어도, 정작 나 스스로 내 목청을 맑게 틔우며 노래를 부르는 맛과 멋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어쩌면, 도시에는 노래가 없지 않나요. 돈벌이가 되는 대중노래는 있고 상업노래는 있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는 없거나 꿈을 찾는 노래는 없는 도시가 아닌가요. 반가운 이를 만나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도시에는 있을까요. 즐거운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신나게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도시에는 있나요.


  사람들은 왜 시골에서만 일노래를 찾으려 하나요. 도시에서도 즐겁게 일하며 즐거이 새 일노래를 부르면 돼요. 먼먼 옛날 옛적 부르던 들노래와 모내기노래와 시집살이노래를 되살려야 할 까닭은 없어요. 아니, 되살려도 즐거워요. 다만, 되살릴 때에는 되살리더라도, 오늘 우리가 새롭게 누리는 삶을 스스로 북돋우는 ‘내 노래’를 내 손으로 짓고 내 입으로 부르며 내 사랑으로 나누면 됩니다. 이렇게 내 노래를 즐기면서 내 이웃 노래를 듣고, 내 이웃한테서 노래 한 자락 들으면, 나도 내 노래를 내 이웃한테 들려주지요.


.. 바람은 골목골목을 깨운다 / 밥 주발에 꾹꾹 눌러 담긴 이름들을 부른다 ..  (아침 창가)


  김수우 님 시집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시와시학사,2002)를 읽습니다. 노래가 감도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야기가 피어나는 노래를 듣습니다.


  노래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 부를 때에 곱게 빛날까요. 이야기에는 어떤 가락을 실어 다 함께 부르면서 환하게 웃을 만한가요. 노래를 부르는 삶은 어떤 이야기꿈일까요. 이야기를 지어 도란도란 나누는 삶은 어떤 웃음꽃 피어나는 두레가 되는가요.


.. 나팔꽃이 피고 지며 / 바람이 들며나며 지은 집 ..  (아버지, 당신은)


  겨울이 춥습니다. 겨울이니까요. 겨울이 깁니다. 겨울이니까요. 봄은 따스합니다. 봄이니까요. 봄이 깁니다. 봄이니까요. 봄은 봄대로 흐르고, 여름은 여름대로 흘러, 가을과 겨울이 찬찬히 찾아듭니다. 알맞게 찾아와서 알맞게 흐릅니다. 기쁘게 찾아들어 기쁘게 감돕니다.


  겨울에는 들풀이 노랗게 시들면서 잠들고, 겨울에는 사람들도 조용조용 작은 집에 깃들어 이야기잔치 벌입니다. 겨울에는 풀벌레가 딱딱하게 굳으면서 잠들고, 겨울에는 들새와 멧새는 서로 깃을 부비면서 조용조용 풀섶에서 겨울나기를 합니다.


  추운 겨울이 왜 찾아올까요. 글쎄, 아기들은 왜 똥오줌을 안 가리면서 갓난쟁이 나날을 보내다가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달리고 하면서 천천히 자랄까요. 따순 봄이 왜 찾아올까요. 글쎄, 아이들은 왜 말문을 트고 눈빛을 밝히며 고운 목소리로 노래노래 부르며 온 집안과 마을을 따사로이 덥힐까요.


.. 마음은 아카시아 향기에 잠겼는데 / 어느 별이 고향이었을까 ..  (유산遺産)


  밭에서 풀을 뽑아 나물을 마련하는 할머니는 모두 시인입니다. 멧골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마련하는 할아버지는 모두 시인입니다. 밥을 짓는 어머니, 절구를 찧는 아버지, 모두 시인입니다. 흙마당에서 뒹굴며 흙투성이 되는 아이들 모두 시인입니다. 가느다란 가지에 가느다란 다리로 앉아 빼애빼애 노래하고는 뾰로롱 다른 나뭇가지로 날아가는 작은 멧새는 모두 시인입니다.


  구름은 하얗게 시를 쓰고, 하늘은 파랗게 시를 씁니다. 들은 푸르게 시를 쓰고, 바다는 파랗게 시를 씁니다. 숲은 푸르게 시를 쓰고, 냇물은 해맑게 시를 써요. 모두들 가장 깊고 너른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시를 나누고, 빛을 보살핍니다. 4346.1.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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