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 읽기
오늘날 한국에서는 술을 곡식이나 물로 빚는다기보다, 화학조미료와 화학첨가물로 빚곤 한다. 이른바 소주란, 또 맥주란, 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싶을 화학조미료덩어리요, 화학첨가물덩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어디에서 어떤 물을 길어올려 빚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한때 막걸리바람이 불었는데, 막걸리는 달달한 술이 아니다. 막걸리는 시큼한 술이요, 밥이 되는 술이다. 들일을 하며 몸이 쑤시고 결리는 일꾼들이 새로 힘을 북돋우라고 빚는 술이다. 곧, 막걸리는 집집마다 마을마다 손수 정갈히 심어 돌보고 거둔 나락으로 빚는 쌀술이지, 나라밖에서 사들인 쌀이라든지 밀로 빚는 단술이 아니다. 한국쌀 아닌 수입쌀을 써야 단맛이 더 난대서 막걸리조차 수입쌀을 쓰는데다가, 수입밀을 섞기까지 하는데, 이런 단술에 어찌 막걸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게다가 단맛 내는 화학첨가물은 또 얼마나 많이 타는가.
들에서 힘껏 일하고 나서 한숨 돌리는 참을 먹으며 마시는 술이 아닌,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기름 좔좔 흐르는 먹을거리를 차려서 배가 터지고 골이 핑 돌도록 마시는 술이라면, 이러한 술 또한 술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다. 골이 핑 돌도록 퍼붓는 술은 술 아닌 알콜덩어리요,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막짓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왜 이다지도 술을 많이 마시나. 한국사람은 왜 이렇게 술집 많은 마을에서 살아가는가. 삶이 너무 힘들어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셈일까. 톱니바퀴 같은 도시요 쳇바퀴 같은 일자리라서 술로라도 몸과 마음을 달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일까. 자동차와 공장과 아파트에서 내뿜는 매캐한 바람에 휩싸여 맑은 바람이란 하나도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니까, 술로라도 몸과 머리를 달래야 할까.
술이면 그예 술일 뿐이라지만, 시나브로 ‘참술’과 ‘거짓술’로 나눌밖에 없다고 느낀다. 어느 모임자리에 가거나 잔치자리에 가면 어김없이 술잔을 받아야 하다 보니, 이래저래 받는 술잔에서 한 모금 두 모금 입술을 적시면서 술맛을 천천히 느낀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에서 빚는 막걸리는 무엇보다 물맛부터 맛이 없네.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처럼 커다란 도시에는 흙을 일구어 쌀을 거두는 시골숲이 없다 보니, 서울쌀도 부산쌀도 인천쌀도 아닌 어디에서 사들이는지 알 길 없는 쌀을 쓰느라, 곡식맛도 느낄 수 없네. 화학첨가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환히 보이네. 탄산은 또 얼마나 섞는지 뻔히 보이네. 포천 막걸리라 한들 대수롭지 않네. 조그마한 시골 면에서 조그마한 시골마을 쌀과 물로 빚는 막걸리가 아니라면, 이제 어느 막걸리도 마실 만하지 않네. 고장마다 소주가 다르다 하지만, 이곳에 간들 저곳에 간들, 화학증류 소주란 내 몸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술이 못 되네. 이런 술을 마시면서 어떤 힘을 낼 만하려나. 이런 술을 마시는 동안 새 넋이나 새 사랑이 피어날 수 있으려나.
들일 하던 들사람이 들밥 먹고 들술 마시면서 하루하루 아름다이 누린 한겨레인데, 이제 들일 하던 들사람 없고, 들밥 먹고 들술 마시던 삶이 사라졌대서, 막술과 거짓술만 나돌아도 되려나. 아니, 들판을 메꾸거나 밀어 없애 찻길을 닦고, 도시를 넓히며 아파트를 지으니까, 이렇게 막돼먹은 터전에서는 막돼먹은 밥과 술을 퍼부을밖에 없으려나.
정갈한 시골마을에는 정갈한 술내음이 흐르고, 조용한 시골마을에는 조용한 밥내음이 흐른다. 왁자지껄 어수선하거나 시끄러운 도시에는 어수선한 술내음과 시끄러운 밥내음이 어지럽게 춤춘다.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