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아, 미안하다 민음의 시 139
심언주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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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와 설거지
[시를 말하는 시 8] 심언주, 《4월아, 미안하다》

 


- 책이름 : 4월아, 미안하다
- 글 : 심언주
- 펴낸곳 : 민음사 (2007.3.26.)
- 책값 : 7000원

 


  씻습니다. 밥을 하고 밥을 먹인 뒤 아이들을 씻기고 나서 나도 씻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면서 나 혼자 달랑 씻는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니 나부터 씻는 일도 없습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 무렵, 굳이 방바닥 따숩게 덥히지 않을 적에는 아이들 씻기기 앞서 물을 따숩게 하려고 보일러를 돌리며 내가 먼저 씻습니다. 따순물 나오기 앞서 찬물이나 미적지근한 물이 흐를 때에 내가 씻고, 물이 따뜻하다 싶으면 비로소 아이들을 불러서 씻깁니다.


  아이들 옷을 벗기고 바닥에 옷가지를 죽 깝니다. 아이들 씻기며 흐르는 물이 옷가지에 떨어지도록 합니다. 아이들 씻길 때 머리며 팔이며 다리며 비비고 닦고 하노라면, 아이들이 참 작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아이들 키높이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보면, 내 눈높이가 어떠한가 하고 다시금 깨닫습니다. 무럭무럭 자라날 아이들이 어떤 몸밥을 먹고 어떤 마음밥을 받아들이는가 하고 천천히 헤아립니다. 어른인 내 몸과 마음을 건사할 밥이란 무엇이요, 아이들 몸과 마음을 다스릴 밥은 어떻게 마련할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돌아봅니다.


  생각을 씻고, 삶을 씻으며, 살림을 씻습니다. 따스하게 흐르는 물에 씻고, 시골마을 촉촉히 적시는 빗물에 하나씩 씻습니다.


.. 안성군 대덕면 삼한리 / 아버지 무덤 위에도 풀들이 자란다. / 아버지를 따라왔는지, 아버지가 끌고 왔는지, 아버지가 모셔 왔는지 잔디 사이로 고들빼기, 개망초들이 비죽비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예감)


  겨울바람이 차갑습니다. 겨울이거든요. 차가운 만큼 옷을 여러 겹 껴입습니다. 찬바람 쐬며 마당에 서면, 그예 겨울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밤에 아이들 쉬를 누이며 마당에 내려서면, 이야 별 좋네,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이 늦게까지 잠들지 않아 찬바람 듬뿍 쐬며 마당에 서거나 마을 한 바퀴를 돌 때면, 아이들도 이 추위를 새삼스레 느낍니다. 추위를 느끼며 밤하늘 올려다보고, 찬바람 하늘에도 밝게 빛나는 별을 누립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밝고, 밤이 깜깜할수록 달빛이 곱습니다.


  그런데, 별과 달은 시골에만 있지 않아요. 도시에서도 별과 달은 어김없이 있어요. 그저, 도시에서는 도시를 이루는 건물과 자동차와 아스팔트가 빚는 먼지덩이 때문에 별빛과 달빛이 막힐 뿐입니다.


  밤이 가시고 새벽이 찾아오면 환한 햇살이 드리웁니다. 환한 햇살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온누리를 따사로이 보듬습니다. 햇살은 시골 들판에만 드리우지 않습니다. 조용한 숲에도 드리우고, 도시에도 드리우며, 공장 굴뚝이나 고속도로 새까만 길바닥에도 드리워요. 다만, 도시사람은 건물에서 등불 켜고 살아가느라,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안쪽에만 머무니까, 햇살이 드리우는 줄 못 느낍니다. 아니, 햇살을 안 먹으려고 창문을 가립니다. 땅속으로 파고들기까지 합니다.


.. 김밥천국 아줌마는 천국을 말고 있어요. 어두운 하늘 같은 김 한 장을 펼쳐 놓고 곤두서는 밥알을 꾹꾹 눌러요. 밥알 위에 당근 채찍 우엉 부엉 어영부영을 눕히더니 검은 멍석을 둘둘둘 말아요 ..  (안녕, 김밥)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바라봅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이루어 누리는 삶결 그대로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사람답게 온누리를 바라봅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결대로 온누리를 바라봅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숲결대로 온누리를 바라보고,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다결대로 온누리를 바라봐요.


  대통령이라면 대통령 자리에서 바라보겠지요. 시장이나 군수라면 시장이나 군수 자리에서 바라보겠지요. 서른 살 어른이라면 서른 살 어른이라는 자리에서 바라봐요. 두 아이 키우는 어버이라면 두 아이 어버이 자리에서 바라보지요. 누구나, 스스로 어떤 자리에 서며 삶을 누리느냐에 따라 눈길·눈썰미·눈높이·눈빛·눈매가 다릅니다. 좋거나 나쁜 금으로 가르지 않아요. 누리는 삶에 따라 바라보는 눈이 다를 뿐이에요.


  더 깊이 바라보는 사람은 더 깊은 삶을 누리는 셈이지요. 더 넓게 바라보는 사람은 더 넓은 삶을 즐기는 셈이에요. 더 따숩게 바라보는 사람은 더 따순 삶을 나누는 셈이요, 더 넉넉히 바라보는 사람은 더 넉넉한 삶을 펼치는 셈입니다.


  아는 대로 바라보지 않고, 사는 대로 바라봐요. 아는 대로 사랑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사랑해요. 아는 만큼 말할 수 없어요. 살아가는 만큼 말할 뿐이에요. 아는 만큼 일하지 않아요. 살아가는 결 고스란히 일해요.


.. 운길산에서 천남성을 만났다 호들갑을 떨었떠니 어떻게 생겼느냐고 그가 물었다 ..  (천남성)


  겨울 설거지는 여름 설거지와 다릅니다. 그러나, 겨울이든 여름이든 틈틈이 조금씩 설거지를 합니다. 겨울에는 따순 물로 설거지를 하며 손을 녹이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로 설거지를 하며 더위를 식힙니다. 겨울에는 틈틈이 물을 쓰면서 물이 얼지 않도록 하고, 여름에는 틈틈이 물을 쓰며 더위가 가실 수 있게끔 합니다.


  사랑이 흐르고 생각이 흐르며 마음이 흐릅니다. 내 마음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려 이웃과 나눕니다. 내 가슴속에서 생각을 끌어내어 동무와 주고받습니다. 내 삶자리에서 꿈을 피워내면서 살붙이랑 어깨동무합니다.


  그릇을 부시며 시를 씁니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 훔치면서 시를 씁니다. 아이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시를 씁니다. 잠자리에 나란히 드러누워 노래노래 부르다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곯아떨어지며 시를 씁니다. 깊은 밤에 팔이 저려 문득 잠에서 깨고 보니, 나도 아이도 모두 새근새근 잠들었네요. 찌릿찌릿한 팔을 천천히 빼고, 작은아이 머리를 가만히 바닥에 내립니다. 이불깃을 여밉니다. 또 한 번 밤별을 구경하고 기지개를 켭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르게 앉습니다. 허리를 폅니다. 마음을 엽니다. 지난 하루를 기쁘게 되새기고, 오는 하루를 고맙게 맞이합니다. 깊디깊은 한겨울이기에 멧새 소리는 없습니다. 머잖아 봄이 찾아오면, 이 깊은 밤과 새벽에도 멧새는 우리 집 둘레에서 맑은 봄노래 부르겠지요.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마을 개구리 모두 깨어나 밝은 물노래 부를 테고, 이윽고 풀벌레 하나둘 깨어나 싱그러운 풀노래 부를 테지요.


.. 쪼끄만 새알들을 누가 / 추위 속에 품어 주었는지 / 껍질을 쪼아 주었는지 / 언제 저렇게 가득 깨어나게 했는지 / 가지마다 뽀얗게 새들이 재잘댄다 ..  (목련)


  심언주 님 시집 《4월아, 미안하다》(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4월이 왜 미안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4월한테 무엇이 미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 무엇을 굳이 미안해 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내가 뭘 잘 알아보지 못했든, 딱히 미안해 할 일은 없으리라 느껴요. 미안해 하지 말고, 즐겁게 웃으면서 4월한테 웃음을 베풀면 넉넉하리라 느껴요. 우리 삶에는 잘 하고 못 하고 하는 금이란 없거든요. 그저 삶이니까요. 그예 삶이니까요.

  시험을 치르는데, 50점을 받아서 못 했다거나 100점을 받아서 잘 했다 할 수 없어요. 99점은 못 했을까요. 51점은 잘 했을까요.


  밥을 짓는데, 물이 조금 더 깃들 수 있고 덜 깃들 수 있어요. 쌀알 부피에 맞게 물 부피를 ㏄로까지 재서 밥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밥물에 올리는 불크기를 몇 분 몇 초로 재서 살펴야 하지 않아요. 깜냥으로 쌀과 물을 맞추고, 냄새와 느낌으로 불을 올려요. 반찬을 하든 국을 끓이든 그렇지요. 빨래를 할 적에도 그렇지요. 아이들하고 나눌 사랑을 숫자로 재거나 따지지 않아요. 몇 시간 놀아 주면 될 일이 아니에요. 몇 시간 가르치면 될 일이 아니에요. 온통 삶으로 누릴 뿐이에요.


  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안일 나누기(가사노동 분담)’를 이렇게 저렇게 딱딱 숫자와 크기에 맞추어 자를 수 없어요. 서로 즐겁게 함께 나누는 집안일이요 집안살림이에요. 공무원이라면 어떤 성과물이나 결과나 실적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우리 삶은 공무원 삶이 아닐 뿐더러,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어떤 숫자와 실적’이라 하는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 할 턱이 없어요. 우리는 누구나 서로서로 삶을 누리고 사랑을 나눌 사람이거든요. 경제성장율 몇 퍼센트를 따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따사로이 얼싸안거나 어루만지는 보드라운 손길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시 한 줄도 사랑이요 꿈이며 삶입니다. 사랑으로 쓰는 시요, 꿈으로 빚는 시이면서, 삶으로 나누는 시입니다. 4346.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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