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옛이야기 그림책 까치호랑이 19
이억배 글.그림 / 보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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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31

 


이야기로 주고받는 고운 사랑
―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이억배 글·그림
 보림 펴냄,2008.8.27./9800원

 


  저녁에 아랫배 살살 아픕니다. 밤에 뒷간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살피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자고 생각하며 잠듭니다. 깊은 새벽, 큰아이가 쉬 마렵다며 잠에서 깹니다. 큰아이 쉬를 누입니다. 나도 다시 누울까 하다가, 아무래도 배가 많이 아파 뒷간에 갑니다. 큰아이 이불깃을 여미고는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어, 큰아이 쉬 누일 적에는 못 본 눈이 마당에 얇게 깔렸습니다. 눈이네, 오늘도 눈이 새삼스럽게 내리네.


  날씨가 포근하니, 아침이 되면 이 눈이불은 곧 녹을 듯합니다. 깊은 밤에만 살몃살몃 쌓이는 고흥 시골마을 눈이불이란 가만 보면 퍽 귀엽구나 싶습니다. 아니온 듯 다녀가는 눈이랄까요. 나 조용히 다녀가요 하고 인사하는 눈이랄까요. 느즈막한 밤까지 놀던 아이들을 재운 밤 열한 시 언저리까지도 눈발은 안 날리더니, 깊은 새벽 두 시 반께에는 얇게 깔린 눈이불이라면, 우리 아이들 잠들 즈음부터 내린 듯해요.


.. 여러 해 동안 이렇게 하다 보니 커다란 주머니에 이야기가 가득 찼어.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이야기를 쌓아 두기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보여주지도 않았지. 그러니 벽장 안 이야기 주머니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어 ..  (6쪽)

 


  아이들은 몸에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았으면 쉬 잠자리로 찾아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몸에 기운이 살짝이라도 남았으면 잠자리로 찾아들더라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좀 고단했는지, 아버지가 먼저 누워서 ‘아버지는 이제 모르니 너희끼리 놀 테면 놀아라.’ 하는 마음이었는데, 큰아이부터 아버지 곁에 눕습니다. 설마 싶어 작은아이를 부르니 작은아이도 아버지 곁에 눕습니다. 두 아이를 나란히 눕히고 팔베개를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 문득 떠오른 아주까리 동백꽃 노래를 부르다가는, ‘여우놀이’ 노래를 부릅니다. “벼리야 벼리야 뭐하니?” 하고 부르면 아이는 무얼 한다 말하고, 나는 또 무얼 한다는 말을 받아 말꼬리를 잡습니다. 몇 차례 말놀이를 이었다 싶으면 넌지시 “죽었니 살았니?” 하고 묻다가 “살았다!” 하고는 두 아이 배를 간질입니다.


  큰아이는 과자를 사먹고 싶은지, “아버지 아버지 이제 내가 부를 테니 조용히 해.” 하고는 “사름벼리 버스타고 읍내가서 칸츄사지.” 하는 넉 자 맞추는 노래를 네 마디 구성지게 부릅니다. 얼씨구, 이 녀석 봐라. 이윽고, 동생 이름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끼워넣으면서 노래 줄거리는 다르게 엮어서 재미나게 부릅니다. 어허, 요 녀석 봐라.


  말문이 트인다는 말은 이렇구나, 말문이 열린다는 말이 이와 같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곁에서 어버이가 하나를 하면 아이는 스스로 열 가지를 한다더니, 그 옛말이 이렇게 나한테 찾아오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도 어린 날 우리 아이처럼 내 어버이 말을 받아먹으면서 내 말을 하나하나 살찌우고 살았겠지요.


  이야기로 살찌우는 넋이요 생각이며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이야기를 빚어 어버이가 아이를 가르치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는구나 싶습니다. 노래 한 자락이 이야기 되고, 말 한 마디가 이야기씨앗 되는구나 싶어요.


  밥짓기나 옷짓기나 집짓기도 이야기로 물려주거나 가르칩니다. 한겨레 어느 누구도 밥짓기를 책으로 남겨 물려주지 않습니다. 옷짓기나 집짓기도 노래를 부르듯, 아니 노래를 부르며 물려주거나 가르쳐요. 어떤 책을 써서 옷을 이리 마름하고 저리 천을 잘라 바느질하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옷을 지어요.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집을 지어요.

 

 


.. 다음날 머슴이 신랑을 따라가려고 짐을 챙기는데, 주인 영감이 이러는 거야. “너는 따라나설 것 없다. 집안일이나 해라.” “안 됩니다. 제가 꼭 가야 합니다.” 머슴은 애가 달아 떼를 썼어. “이놈, 네가 감히 누구 명이라고 거역을 하느냐?” ..  (14쪽)


  이야기로 주고받는 고운 사랑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나누는 참다운 삶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씨앗으로 삼아 마음밭에 뿌리고 일구는 너른 꿈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가시내도, 줄넘기놀이를 하는 우리들도,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놀이를 하는 우리들 입에서 노래가 그칠 일이 없습니다. 놀이를 즐기는 우리들 마음에서 이야기가 없을 일이 없습니다. 일하는 어른들한테도, 놀이하는 아이들한테도, 노상 노래와 이야기와 웃음이 한가득 흐드러집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마당에서나 골목에서나, 으레 노래와 이야기와 웃음이 환하게 얼크러집니다.


  입에서 입으로 노래가 흘러요. 눈에서 눈으로 사랑이 흘러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가 흘러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삶이 흘러요.


.. 그제야 머슴은 그동안의 일을 모두 이야기했어. 주머니에 갇힌 이야기들이 귀신이 되어서 신랑에게 해코지를 하려 했다고 말이야 ..  (28쪽)


  이억배 님이 예쁘게 빚은 그림책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보림,2008)를 읽습니다. 옛이야기 틀을 빈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인데, 아마 이 이야기도 틀뿐 아니라 줄거리까지 옛이야기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림책 줄거리를 보면, 머슴 아이는 퍽 똑똑합니다. 머슴을 부리는 양반집 사람들은 무척 어리석고 어리숙합니다. 머슴 아이는 신분이나 계급은 없지만, 슬기롭고 착하며 참답습니다. 양반집 사람들은 신분이나 계급은 있으나, 어리석고 어리숙한 나머지 삶을 읽거나 느낄 줄 모릅니다.


  곧, 똑똑하지도 못하고 슬기롭지도 못한 양반집 사람들은 ‘이야기’를 꽁꽁 묶어서 숨깁니다. 아마, 이야기뿐 아니라 돈도 생각도 마음도 사랑도 꽁꽁 묶어 숨기고는, 저희끼리만 나누어 가지려 했겠지요. 머슴 아이는 이야기이든 무엇이든 혼자 꽁꽁 싸매지 않습니다. 신분도 계급도 없으니 돈도 없을 텐데, 그예 홀가분한 아이일 테니, 굳이 무언가 싸매야 할 일도 까닭도 허울도 껍데기도 없어요.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엽니다. 사랑을 열고 꿈을 열어요. 하루하루 재미나게 누려요.


  이야기는 늘 샘솟습니다. 이야기는 꺼내고 꺼내도 마르지 않습니다. 사랑이나 꿈도 마르지 않고 샘솟아요.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환하게 빛나면서 새로 샘솟아요. 꿈을 펼치는 사람은 자꾸자꾸 아름답게 새로운 꿈이 자랍니다. 이 꿈 하나 펼쳤대서 시들시들 사라질 일이 없습니다. 저 꿈 하나 펼쳤으니 흐물흐물 힘을 잃지 않습니다.


  나눌수록 커지고, 함께할수록 빛나는 사랑이요 꿈이고 이야기입니다. 어깨동무할수록 즐겁고, 서로서로 누릴수록 기쁜 사랑이면서 꿈이며 이야기예요. 온누리 모든 것은 모두모두 함께 누리라고 있습니다. 4345.12.3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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