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94 : 후박나무와 함께 읽는 책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1)》(한길사,1992)를 요즈음 들어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3년에 처음 읽었고, 그 뒤로 틈틈이 다시 읽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를 찬찬히 읽다 보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어요. 어떤 말지식을 얻으려고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슬기로운가를 헤아리려고 읽는 책이기 때문일까요. 한참 되읽다가 269쪽에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 바라보는 산, 골짜기와 내들의 이름을 모두 지었다고 했다. 그 이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우리 말 이름이다 … 그런데 중국글자를 숭상하던 양반들은 이런 마을 이름들을 중국글자말로 지어 붙였다.” 하는 대목을 보고는 다시 밑줄을 긋습니다.


  그래요. 우리 겨레 옛사람은 이 나라 골골샅샅 마을 이름을 모두 한국말(토박이말)로 지었어요. 냇물 이름, 멧골 이름, 들판 이름, 바다 이름 모두 한국말로 붙였어요. 조그마한 오솔길 하나에까지 이름이 있어요. 야트막한 동산 하나에도 이름이 있어요. 작은 벌레 한 마리한테까지 이름이 있어요. 들풀과 들꽃한테도, 숲을 이루는 나무한테도, 냇물과 바닷물에서 살아가는 물고기한테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한테도, 숲에서 살아가는 짐승한테도 모두 어여쁜 이름을 붙였어요. 구름에도 이름이 있지요. 별에도 이름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늘 말하는 가장 쉽고 가장 흔하며 가장 빛나는 이름들, ‘해·달·물·불·바람·밥·옷·집·흙·돌·하늘·땅·바다’ 같은 낱말도 우리 겨레 옛사람이 붙였어요. ‘손·발·머리·마음·코·입·귀·눈·허파·염통·애·손가락·머리카락’ 같은 이름도 참말 알맞고 살갑게 붙였습니다. 이뿐인가요. ‘사랑·꿈·믿음·생각·웃음·눈물·빛·무지개·미리내·하느님·이야기’ 같은 이름은 그지없이 아름다우며 해맑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답다’나 ‘어여쁘다’나 ‘아리땁다’나 ‘예쁘다’ 같은 낱말은 어떻게 빚었을까요. ‘맑다’나 ‘밝다’나 ‘놀다’나 ‘좋다’ 같은 낱말은 어떻게 일구었을까요.


  한삶을 교육자 한길 걸으며 한겨레 말삶을 북돋우려고 힘쓴 이오덕 님이 쓴 책은 ‘바로쓰기’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 우리 옛사람이 온누리에 새 이름 즐겁게 붙이던 고운 넋을 이야기꽃으로 피우려는 《우리 글 바로쓰기》라고 느껴요. 사랑을 살찌우는 말입니다. 꿈을 빛내는 글입니다. 믿음을 나누는 말입니다. 생각을 북돋우는 글입니다. 이야기를 즐기는 말입니다. 사람들 마음속마다 아리땁게 드리우는 하느님 넋을 밝히는 글입니다. 아이들과 까르르 웃으며 누리는 말입니다. 논술이나 문학을 하라는 글이 아니라, 삶을 일구며 이웃과 어깨동무하라는 글이에요.


  한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맨손으로 눈송이 뭉쳐 노는 아이들은 마당 한켠 후박나무 밑에서 서로서로 웃고 떠들며 달립니다. 후박나무는 겨우내 찬바람 마시며 꽃봉오리 단단히 여밉니다. 새봄 찾아와 따스함 무르익으면 천천히 잎사귀 벌려요. 우리들 가슴에도 착한 사랑 싹트면 천천히 자라 알차게 피어나겠지요. 개구지게 놀며 손 꽁꽁 언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내 큰 손으로 작은 손을 꼬옥 감싸며 녹입니다. 글 한 줄에서 생각을 읽고, 아이들 몸짓 하나에서 노래를 읽습니다. 4345.12.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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