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코의 술 애장판 9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04

 


농약 안 쓰기를 바라나요
― 나츠코의 술 9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11.12.25./9000원

 


  깊은 밤을 포근히 감싸는 눈이 소복소복 내립니다. 작은아이가 잘 자다가 칭얼거려서 살살 어르며 안습니다. 몇 시인가 살피니 새벽 두 시 사십사 분. 쉬를 누일까 싶어 오줌그릇에 앉힙니다. 쉬를 눌 생각은 않고 낑낑거리기만 합니다. 그래, 쉬는 안 누려니. 다시 살며시 안습니다.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선 채 마당을 내다봅니다. 눈 내리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립니다. 눈이 제법 쌓이려 합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이지만 밤이라 조금 쌓이는구나 싶습니다. 이 눈이 언제까지 내릴까 모르겠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이내 녹을 테고, 해가 구름에 가려 좀 늦게 뜨거나 오늘 하루 안 비춘다면, 어쩌면 낮까지 꽤 하얀 시골마을 모습을 보여주겠구나 싶군요.


  그나저나 눈이 내리는 소리라니, 아주 오랜만입니다. 우리 식구 아직 도시에서 살던 무렵에는, 밤이나 새벽에 눈발이 날려도 골목이 시끄럽고 부산했어요. 도시에서는 눈이 내렸다 하면 ‘사람 다닐 생각’ 아닌 ‘자동차 다닐 걱정’ 때문에 밤이나 새벽에도 바쁘게 눈을 쓸거나 치우려 해요.


  나는 언제나 깊은 새벽에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곤 하기에,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눈 나풀나풀 내리는 밤을 누리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이렇게 내리는 하얗디하얀 눈이 온 시골과 도시를 곱게 안는 모습을 가만히 내버려 둘 텐데요.


- “괴짜를 넘어서 그 정도면 기인이지. 농작물은 파는 게 아니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기인 아니야, 그 사람.” “헤헤, 기인이 아니면 뭔데?” “너 같은 건 감히 흉내도 못 낼 만큼 훌륭한 농업인이야.” “뭐!” “지금의 농업은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뀌어서 원칙을 지키면 기인으로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 정도도 모르는 거야, 진키치?” (8∼9쪽)
- “어이, 조심해! 논이 온통 농약범벅이야. 탱크가 깨졌어!” “여기 벼는 전멸이군.” “이삭이 맺혀도 어디 먹을 수 있겠냐, 이런 걸.” (15쪽)

 


  자동차라곤 하나도 없던 지난날, 그러니까 얼추 백 해쯤 앞서를 떠올립니다. 그무렵에는 눈이 온대서 딱히 눈을 쓸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을 쓴다기보다 ‘사람 지나갈 자리’만 넉가래로 슥슥 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그냥 두면서 사람들 발자국으로 ‘눈밭 사이 지나갈 길’이 트였으리라 생각해요. 따로 어른들이 눈을 쓸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눈놀이를 하면서 눈을 제법 치울 테고, 눈사람 만들겠다며 눈을 굴리면 눈은 어느새 많이 사라져요.


  자동차가 넘실거리는 오늘날 이 지구별에서는 어디를 가나 ‘눈 걱정’을 합니다. ‘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들판과 멧자락에 눈이 소복소복 덮이면서 흙은 겨울잠을 포근히 잡니다. 눈이 사그락사그락 소리 내며 쌓이는 동안 들짐승이나 멧짐승이나 들새나 멧새는 먹이 찾느라 애먹을 테지만, 그동안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먹이를 건사했을 테니, 조용히 웅크리면서 눈을 바라볼 테지요.


  겨울 들머리에 말라죽은 풀은 눈을 맞으며 폭폭 쓰러집니다. 눈밭에 파묻히며 조금 더 빨리 흙으로 돌아갑니다. 나뭇가지는 눈을 찬찬히 안으면서 ‘자 자 춥다구, 더 단단히 껍질을 여미고 새봄을 기다리자구.’ 하면서 씩씩하게 우뚝 섭니다. 철이른 꽃 몇몇 피운 동백나무는 붉은 꽃잎에 하얀 눈발 안으면서 ‘아이 추워.’ 하고 오들오들 떨지만, 붉은 잎사귀는 꼿꼿하며 야무지게 빛납니다. 하얀 눈덩이를 안아도 붉은 꽃잎은 시들지 않아요. 되레 더 맑고 환하게 붉은 빛 뽐냅니다.


- “맛있다. 맛있어.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무가, 왜 남아돌아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읍내 아침시장에 내다 팔 거니까. 그래도 남으면 모두에게 나눠 주지. 그러니 걱정 마.” (20쪽)
- “아버지는 옛날부터 농사일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즐겁게 일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멍청한 것. 농사꾼한테 좋고 싫을 게 뭐 있냐!” “죄송해요.” “그럴 거 없다. 대신 행여 농사꾼 흉내 같은 건 내지 마라.” “더 이상 흉내는 내지 않겠어요. 진짜 농사꾼이 되겠어요.” (42∼43쪽)

 

 


  내 어릴 적부터 어른들은 겨울눈 바라보며 으레 한 마디씩 했습니다. ‘이렇게 눈이 펑펑 퍼부어야 시골에서는 흙이 살아 이듬해에 농사 잘 지을 수 있지.’ 도시사람은 눈이 많이 오면 길 막힌다고 아우성이지만, 가만히 살피면, 눈이 오는 아름다움이나 뜻이나 즐거움을 살피거나 느끼지 못하는 나머지, 스스로 삶을 갉아먹는 셈 아닌가 싶어요. 눈이 온대서 주식투자를 안 할 수 없다 하고, 눈이 오더라도 신문은 찍고 방송은 내보내야 한다지만, 눈이 오건 말건 은행을 열고 관공서 문도 열어야 한다지만, 사람살이에서 한복판에 놓일 가장 대수로운 대목은 바로 ‘흙’이요 ‘숲’이 아닐까 싶어요.


  어느 누구도 흙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숲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냇물과 골짝물과 바다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바람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햇살 없이 살지 못해요.


  흙이 있어야 파인애플이든 바나나이든 망고이든 뭐든 거둬요. 흙이 있어야 겨울딸기이든 봄수박이든 가을능금이든 거둬요. 비닐집 농사짓기라 하더라도, 흙이 있어야 해요. 비닐집에서 물꼭지를 틀어 물을 주더라도 냇물과 골짝물이 흘러야 비로소 수도물 쓸 수 있어요. 댐에 가두는 물은 어디에서 갑자기 샘솟는 물이 아니에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이 싱그럽지 않으면, 제아무리 자동차와 공장과 발전소 들이 바람을 어지럽히더라도, 지구별 곳곳을 도는 바람이 숲에서 걸러지며 다시금 맑게 불지 않는다면, 도시이고 시골이고 사람은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아요. 햇볕이 사라지면, 지구별은 하루아침에 차갑게 식으며 모두 말라죽어요.


  어떤 물질이나 문명이나 문화나 기계나 진보나 혁명이라 하더라도, 흙 앞에서는 덧없어요. 물 앞에서는, 바람 앞에서는, 숲 앞에서는, 해 앞에서는, 어떠한 것들도 우쭐거릴 수 없어요.


  삶이 있고 난 다음에 문화입니다. 삶이 있고 난 자리에 정치입니다. 삶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경제이든 스포츠이든 역사이든 교육이든 철학이든 사상이든 환경이든 노동이든,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먹일 수 있습니다. 흙을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어요. 흙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서울대 합격’이나 ‘국가고시 합격’이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 흙을 모르는 채 대학생이 된다 한들, 흙을 등진 채 공무원이 된다 한들, 이들 지식인이나 관리들이 이 나라 이 땅을 얼마나 어떻게 아끼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 “농사일에는 원래 남자도 여자도 없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을 하지. 당신 손은 부르트고 터져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칠어질 거야.” “그렇게 되고 싶어요. 한시라도 빨리 튼튼한 손과 무엇에도 지지 않는 의지를 갖고 싶어요.” (62쪽)
- “조합장 말이 맞아. 미래의 농사꾼에겐 자격이 필요하다고. 사람이 다 농사꾼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야. 농사꾼이 되어 가는 거지.” (73쪽)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비료나 풀약을 만든 지 얼마 안 됩니다. 한겨레 흙일꾼이 비료나 풀약을 사다가 흙에 뿌린 지 아직 얼마 안 됩니다. 비료농사와 풀약농사는 아직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수천 해 이어온 ‘땀농사’와 ‘손농사’, 그러니까 두레와 품앗이로 이루어진 마을살이 흙일은 어느새 송두리째 자취를 감추어요.


  우리 식구는 고흥 시골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품앗이로 마늘 심고 마늘 캐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마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남아, 이렇게 마늘밭 일은 서로 거듭니다. 마을에 젊은이가 있으면 논일도 서로 두레와 품앗이로 돕겠지요. 기계힘을 빌어 논밭을 뒤집지 않겠지요. 사람이 손힘과 다리힘으로 흙을 만지고 보듬을 적에는, 이 흙알 하나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깊디깊이 느낄 테니, 섣불리 비료나 풀약을 뿌리지 않겠지요. 내 손이 닿는 흙인걸요. 내 다리가 폭폭 빠지는 흙인걸요. 내 손발에 비료 냄새나 풀약 냄새가 밴다면 내 몸이 남아날까요. 내가 먹을 내 밥에 스스로 비료나 풀약을 칠 수 있겠습니까. 내 아이한테 차려 줄 밥상에 반찬으로 비료나 풀약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습니까.


- “빼어난 술은 제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법이죠. 무엇이 일본 최고인지 따위로 경쟁하는 건 무의미해요.” (122쪽)
- “당신은 당신의 술을 만드세요. 오빠의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시켜, 당신 자신의 술을 만드는 겁니다.” (123쪽)
- “힘이 있으면서 깔끔하고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 술. 감탄하기보단 감동하게 만드는 술.” (140쪽)

 


  일본 전통술 빚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1) 아홉째 권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만화쟁이 오제 아키라 님은 열두 권에 이르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을 그리며 첫째 권이든 아홉째 권이든, 또 마지막권에서까지이든, ‘술 이야기’보다 ‘흙 이야기’를 훨씬 자주 더욱 깊이 들려줍니다. 틈틈이 ‘술 빚는 넋’과 ‘술 담그는 매무새’를 밝히기는 하지만, ‘흙 만지는 넋’과 ‘흙 일구는 매무새’를 더 낱낱이 드러내요.


- “농사꾼은 백 가지 일을 하고, 백 가지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래.” (218쪽)


  그러고 보면, 어느 인문책에서고 ‘흙’을 다루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따로 흙을 밝히려 하는 책이 아니고서야 흙일을 다루는 적은 없다 할 만해요. 문학책이건 인문책이건 예술책이건 이런저런 자기계발책이나 처세책이건, 또 교과서나 참고서이건, ‘흙’도 ‘물’도 ‘숲’도 ‘바람’도 ‘해’도 말하지 않고 다루지 않으며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삶’을 안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책들은 삶하고 너무 동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흙일꾼은 백 가지 일을 하면서 백 가지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 한다는데, 하나하나 따지면, 흙일꾼 백 가지 아닌 천 가지나 만 가지 일을 하면서 천 가지나 만 가지 것을 빚어요.


  흙일꾼은 먹을거리만 짓지 않습니다. 예부터 흙일꾼은 입을거리도 짓습니다. 흙일꾼은 저희 보금자리, 곧 집을 스스로 짓습니다. 흙일꾼은 사람하고 이웃하는 들짐승이나 멧새한테도 먹이를 나누어 주고, 집을 따로 지어 주기도 합니다. 콩 석 알 심는 것이 바로 ‘들짐승과 먹이 나누는 넋’이에요. 처마 밑 제비집 그윽하게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곧 ‘멧새와 삶을 나누는 매무새’예요.


  농약 안 쓰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이 ‘도시로 떠나 보낸 딸아들’을 일깨워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런데 고향은 시골인 도시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눈길과 흙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슬기로우며 따사롭게 깨우치도록 하면 됩니다. 시골 어르신들 딸아들이 마음속에 따순 사랑을 심어야 해요.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골에 어버이 둔 이들’ 모두 당신 어버이가 어떤 흙일을 하는가를 제대로 느껴, 도시살이와 시골살이 모두 제자리를 찾도록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도시에서 아이들 낳아 돌보다 보면 하나같이 아토피에 천식에 폐렴에 온갖 아픔을 달고 산다지요. 시골집으로 와서 정갈한 밥과 물과 바람과 햇살 먹으면서 흙을 뒹굴며 살면 추운 겨울날 뛰놀아도 몸 아픈 데 하나 없다지요.


  도시로 떠난 시골 분들이 굳이 유기농 곡식 사다 먹지 않아도 돼요. 당신 어버이가 시골에서 유기농 곡식 일구도록 이끌면 돼요. 시골 늙은 어버이가 ‘도시 젊은 딸아들’한테뿐 아니라, 저잣거리에 내다 파는 여느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 모두 유기농으로 짓도록 ‘도시 젊은 딸아들’이 북돋우면 돼요. 서로서로 싱그럽게 살아갈 때에 흙이 살고 한겨레가 살며 지구별이 살아요.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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